[2021/05] Theme.2 한국 독립운동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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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36년간 지속된 독립운동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호국불교 정신으로 최일선에서 항일투쟁
글 | 김광식(동국대학교 교수)
일제강점기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던 불교는 1911~1912년에 전개된 임제종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섰다.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법정사에서는 승려와 주민이 연합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 호국불교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행보는 3·1운동에서 나타났다. 한용운은 천도교의 최린과 상의하여 종교계가 주도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를 따르던 학인들은 각 연고 사찰로 내려가 지방 만세운동을 파급시켰다. 불교는 3·1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학인들은 각처의 사찰을 순방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상해로 망명해 국내 불교와 임정과의 연결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내 특파원, 독립자금 전달,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 전달, 독립운동 사료의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임제종운동으로 한국 불교 수호
일제가 한국을 강탈한 침략적 책동에 저항하였던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에 불교도 참여하였다. 의병전쟁이 발발하자, 승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참여하였다. 그리고 의병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식량 및 휴식처를 제공한 사찰이 많았다. 그래서 일제는 의병을 후원한 사찰을 보복 차원에서 방화하였다. 그 무렵 한국이 일본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자, 그를 극복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50여 개 처의 사찰과 1,270여 명의 스님이 그 운동에 참여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흐름에서 전국 각처에서 사립학교가 등장하였을 때에도 승려들은 사찰의 부속학교를 설립하여 불교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비롯하여 전국의 큰절에 30여 개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였다. 일제는 불교를 관리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하였다. 사찰령은 불교의 인사권과 재산권을 통제하는 법령이었기에 그를 저항하는 운동이 등장하였다.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사찰령 철폐운동이 추진되었다. 그때 승려 2,280명은 사찰령 철폐를 주장하는 건의서를 만들어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한편 불교의 본격적인 저항은 1911~1912년에 전개된 임제종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산중불교의 타성에 젖어 있었던 불교는 개항이 되고 근대문명이 유입되자, 도회지로 진출해 근대적인 교단을 건설하였다. 이런 구도에서 나온 것이 1908년에 설립된 원종(圓宗)이었다. 그러나 통감부는 원종을 인가해 주지 않았다. 국권 강탈 직후 친일 승려는 원종을 인가받기 위해 일본의 조동종과 맹약(1910년 10월)을 체결하였다. 굴욕적인 그 맹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불교인들은 거센 반발을 하였거니와 그 운동이 임제종(臨濟宗)운동이었다. 한국 불교에는 활발한 임제종의 정신이 배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 불교를 수호하려 하였다. 1911년 2월 송광사에 모인 승려들은 원종 맹약을 거부하고, 임제종을 출범시켰다. 그 이후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를 기반으로 하여 그 운동이 전국으로 전개되었거니와 1912년 5월 서울 인사동에 세워진 임제종 중앙포교당의 설립은 그 운동의 상징이었다. 이 운동의 주역은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등 민족적인 승려들이었다.
한편 3·1운동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법정사(서귀포, 중문)에서 승려와 주민이 연합하여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 승려, 불교신도, 주민 등 600여 명이 단합하여 서귀포로 진출하여 제주도에 있는 일제를 몰아내려는 치열한 항쟁이었다. 항쟁을 주도한 승려들은 동학운동, 의병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으며, 주민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분노하여 함께 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

한용운은 3월 1일 하루 전날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학인 10명을 불러 3천매의 선언서를 제공하면서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때 한용운으로부터 만세운동 동참을 요청받은 학인들은 3·1운동의 적극적인 참여를 결정하였다. 학인들은 탑골공원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각 연고 사찰로 내려가서 지방 만세운동을 파급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각 처의 사찰(해인사, 범어사, 동화사, 신륵사, 봉선사, 김룡사, 화엄사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지방 사찰에서의 만세운동은 학인 승려들의 주도로 지역주민과 연합하여 선언서 및 격문을 만들면서 추진되었다.
불교는 3·1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1919년 4월,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됨에 있어서 박한영과 이종욱이 전북 및 강원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서울 중앙학림에서 불교도 독립운동 본부가 출범하였다. 이 본부에 가담한 학인들은 각처의 사찰을 순방하면서 자금을 모금하였다. 학인들은 자신이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이런 활동을 하던 학인들은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국내 불교와 임정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다. 임정에 파견된 학인은 10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국내 특파원, 독립자금 전달, 독립운동 소식의 국내 전달, 독립운동 사료의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런 흐름에서 학인 승려들은 의용승군제(義勇僧軍制)를 추진하였고, 대한승려연합회(중견 승려, 대표 12명)의 이름으로 승려선언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국문, 영문, 중문 3개 국어로 제작된 선언서는 호국불교 전통의 계승, 불교 민족대표(한용운, 백용성)의 독립정신 계승을 다짐하면서 일제와의 혈전을 피력하였다. 또한 학승 10여 명은 만주 무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그들은 훈련을 마친 후, 국내에 돌아와 군자금을 모금해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에 제공하였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불교는 고양된 민족의식으로 불교 자주화 운동에 나섰다. 이는 자주적인 종단 건설로 귀결되었다. 일제는 민족적인 종단 건설을 방해하였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각성된 힘으로 종단 건설을 추진하였다. 즉 사찰령 철폐운동, 중앙기관(총무원) 건설, 승려대회의 개최를 추진하였다. 마침내 1929년 1월 3~5일, 조계사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종헌을 제정하여 자주적인 종단을 건설하였다. 종헌의 실천운동은 많은 시련을 겪었으나, 1941년 조계종의 출범으로 일단락되었다.
불교 자주화 및 종단 건설운동은 불교 청년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불교 청년들은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비밀결사 만당(卍黨)을 결성하여 자주불교, 항일불교의 노선을 추진하였다. 또한 선수행을 하는 승려인 수좌(首座)들은 일본 불교 배격, 한국 전통선 수호를 표방하면서 중앙본부인 선학원(禪學院, 종로 안국동)을 1921년에 창건하였다. 송만공(수덕사), 오성월(범어사) 등이 주도한 선학원은 전국 선원 및 수좌의 본부로서 저항불교, 항일불교의 거점이 되었다. 선학원은 수좌대회(1934)와 유교법회(1941)의 개최를 통해 민족불교 정신을 고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불교 관련 국가유공자 104명에 달해

한용운은 불교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는 시인,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이다.그의 독립운동은 임제종운동, 3·1운동 민족대표, 불교 만세운동의 추동, 불교청년운동 지도, 신간회 참여, 대중운동의 지도, 심우장에서의 저항 등 폭넓게 걸쳐 있다. 그의 문학은 민족문학으로서, 시집 『님의 침묵』 뿐만 아니라 소설, 시조, 수필, 평론 등 다양한 방면에서 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백용성은 한용운과 함께 3·1운동의 민족대표였으며 임제종운동도 함께 이끌었다. 서울에 독자적인 포교당(임제파 강구소, 대각사)을 건립하여 활동하였다. 대중을 위한 포교, 민족문화 창달 차원에서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일본 불교의 상징인 대처식육(帶妻食肉)을 반대하는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하고, 독자노선인 대각교(大覺敎)를 만들었다.
백초월은 한용운과 백용성이 3·1운동으로 인해 수감되자, 불교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서울에 불교독립운동본부를 만들고, 학인들을 추동하여 불교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운동자금의 모금, 상해 임정 및 만주 독립군에 자금 전달, 강원(월정사, 동학사, 봉원사) 학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는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도 받았다. 출옥한 그는 독립정신을 잃지 않고 일심교(一心敎)라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9년 10월,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 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쓴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3년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지만, 또다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44년 청주 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승려 김성숙은 봉선사에서 3·1운동을 추진하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출옥한 그는 불교청년운동, 노동운동을 하다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북경의 민국대학에 재학하면서, 불교청년운동 및 진보적인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후 조선민족해방동맹, 의열단, 조선의용대에 관여하였고 임시정부(중경)의 국무위원도 역임하였다. 8·15 해방 직후, 귀국한 그는 민족적, 중도적인 정당 활동을 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송만공(수덕사)은 참선의 대가로, 선 방면에서 민족불교의 자존심을 수호하였다. 선학원이 민족불교 노선을 갈 수 있도록 활동하였다. 그의 독립정신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은 1937년 2월, 조선 총독에게 강한 경책을 한 이른바 할(喝) 사건이다. 즉 그는 불교의 자주노선을 위해 조선총독은 일체 간섭치 말라고 경고를 날렸다. 이런 발언은 민족의식,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다. 그래서 한용운은 송만공의 행적을 『불교』지에 청사에 길이 빛날 행보라고 남겼다. 송만공의 그 발언을 전해들은 모든 승려들의 가슴이 뛰었다. 그는 용돈을 모아서 한용운에게 활동 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리고 1943~1945년 3년간, 서산의 간월도에서 일제의 죄악 7개조(한글 사용 금지, 징용·징병 단행, 재산 강탈 등)를 제시하며 일제 패망, 해방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단행하였다. 기도가 끝난 3일 후에 8·15해방이 되었는데, 그는 무궁화 꽃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유묵을 썼다.
불교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

이런 입론에서 불교 민족운동이 나온 것이다. 한국인의 민족종교인 불교가 외부의 적(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통치로 자유와 평화를 박탈당하고, 인권과 민족의 존재마저 부정당하자 그를 자행한 일제를 부정, 극복하는 의식 및 행보에 나섰다. 한국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 이와 같은 행보를 갔으니 그야말로 호국불교, 민족불교이었다. 때문에 불교계 구성원(승려, 신도)은 한국불교의 이런 전통을 인식하고, 계승하며 독립운동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