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 Theme.3 한국 독립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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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최초 독립선언식·시위 주축세력
신앙적 양심 따라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한 자주독립의 빛과 소금
글 |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기독교는 평신도들을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나 교회 직분자들까지도 3·1운동에 적극 참여·주동했기에 일제의 핍박과 그 피해가 매우 컸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3,426명으로 종교인 가운데 가장 많다.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5%나 차지한다. 구한말부터 여성해방과 지도자 양성에 힘써오던 기독교의 영향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3·1운동 이후에는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무장 항쟁에 직접 뛰어들었으며, 개신교 역시 한말 이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과는 달리 국권회복운동과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천주교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자는 출교하는 등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신자 개개인의 신앙적 결단에 따른 독립운동 참여는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증거는 3·1운동에서도 드러난다. 1919년 말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3·1운동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총 검거자 19,525명 중에 천주교인이 55명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이 통계에 포함된 이들은 3·1운동 주동자들이었거나 과격시위자들이었을 것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공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양심에 따라 천주교에서도 이 운동을 주동한 인물들을 배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 맺고 독립운동 전개 3·1운동 이후에는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무장 항쟁에 참여한 사례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방우룡(方雨龍)이 이끄는 의민단(義民團)이다. 의민단은 1919년 말경 왕청현 춘화향(春華鄉)에서 조직된 천주교인이 중심이 된 무장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단장 방우룡을 비롯하여 부단장 김연군(金演君), 참모장 김종헌(金種憲), 영장 허은(許垠), 서무부장 정준수(鄭駿秀),재무부장 홍림(洪林) 등이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대원은 300여 명에 달했다. 특히 이 단체는 그 지역 천주교인들의 헌금으로 재정을 충당하여 다른 단체에 비해 비교적 재정 공급이 원활하였으며, 한때 소총 약 400정, 권총 약 50정, 수류탄 약 480발을 소유했을 정도로 군비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이 단체는 1920년 6월 이후 국민회·북로군정서·광복단·의군단·신민단 등과 연합활동을 폈고,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미주지역에서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실력양성과 교민 단결에 노력하다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민회의 파송을 받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 이동휘, 여운형 등도 각기 독립운동의 방략은 약간씩 달랐지만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대통령, 국무총리, 외무차장 등 각각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에도 평안도·황해도·함경도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평양에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는 종래 장로교계의 한영신·김원보·김용복 등이 조직한 애국부인회와 감리교계의 손진실·이성실·박승일 등이 조직한 애국부인회가 임시정부의 권고로 통합한 것이었다. 이 단체는 평안도 각지에 7개의 지회를 두고 군자금 모금, 배일사상 고취, 독립운동 요원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1920년 10월 일제에 발각되기까지 2,4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고 연통제의 업무도 담당하였다. 이와 비슷한 군자금 모금과 연통제 임무를 수행하였던 평안도 지역 기독교 여성단체로 강서의 반석대한애국청년단, 순천의 대한민국부인향촌회,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단 등이 있었다. 1919년 8월에 서울에서 결성된 임시정부의 국내 지원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에도 신현구·박연서·김상덕 등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밖에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적십자회 국내 지부 등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쿄 2·8학생독립선언 주도·후원 기독교는 평신도들을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이나 교회 직분자들까지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컸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직업적 종교인, 즉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 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5%나 차지한다. 구한말부터 여성해방과 지도자 양성에 힘써오던 기독교의 영향이 3·1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총인구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3·1운동과 관련된 총 피검자의 17.6%를 차지하고 이들이 대부분 과격행위자이기보다는 시위주동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의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의열투쟁 참여하고 무력항쟁에 나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적 결단에 따라 일제를 응징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한 의열투쟁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일행에게 폭발탄을 투척하여 사상자를 낸 강우규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장로교의 전도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총독을 죽이려 한 이유를 “이 총독은 첫째 하느님의 계명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 또 남의 것을 탐내지 마라’ 한 것에 위반되고, 만국 공법을 규란(糾亂)하며, 민족자결주의를 멸시하며, 세계의 여론을 무시하는 ‘극흉 극악한 죄인’이므로 죽이려고 결심했다”고 고백하였다. 북간도 지역에서 교민 자치와 독립운동 단체로 조직되었던 국민회는 임원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회장 구춘선(具春先)은 교회의 영수였으며, 각 현에 조직한 분회장도 그 지역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유력자로 임명하였다. 국민회는 1920년 5월 산하에 정규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도 전개하였다. 동아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5월에 결성된 신민단(新民圍)도 단장 김규면(金圭冕)을 중심으로 단원 300여 명이 러시아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무력항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