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 Theme.4 한국 독립운동과 민족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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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독립투쟁에 진력한 비밀결사운동
민족정신 부활 이끈
한민족의 구심점… 민중봉기 깃발 높여
글 | 성주현(숭실대학교 HK연구교수)
일제는 직접적인 저항세력인 의병과 잠재적인 민족운동세력의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무력적인 탄압과 조직적인 파괴공작을 획책했으며, 민족정신의 부활을 주장하는 민족종교에 대한 탄압 역시 집요했다. 이에 따라 국내의 민족종교는 비밀결사를 통해 조국독립투쟁을 지속했다. 천도교 천도구국단의 민중봉기는 1919년 3·1운동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고, 경남지역의 천도교인들은 조선총독 등을 암살하려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바 있다. 천도교, 대종교, 보천교 등 민족종교는 을사오적 처단, 대한독립선언, 3·1운동 6·10만세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했고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 1910년대 대표적인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천도교의 천도구국단, 태을교와 청림교의 비밀결사운동 등이 있다. 천도구국단은 1914년 8월 31일 천도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종일은 일제강점 직후 보성사를 중심으로 범국민신생활운동과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불교와 기독교 등과 연대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새로운 모색을 하던 중 천도구국단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황 등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일본이 패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시국선언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경북지역 천도교인들도 비밀결사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홍주일, 이시영, 정운일, 신상태, 변상태 등은 1913년 조선국권회복단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윤상태 등과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고 독립투쟁에 진력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외에도 남형우, 신성모, 신상태, 김기수 등은 1909년 9월 결성된 대동청년단 조직에 참여한 바 있다. 태을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충남 부여의 이용규를 비롯하여 윤병일 이만식 이내수 김태영 진치만 전용규 손진형 등은 1913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독립의군부에 참여한 바 있으며, 이용규 등은 1916년 4월 국권회복을 모의하고 임자문을 맹주로 하고 신술로서 조선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척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칙명서와 마패를 제작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청림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이종학과 정태순이 국권회복을 도모하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이들은 청림교 입교 이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함남 고원 출신 윤덕린은 1918년 6월 7일 서울로 올라와 “배일당의 수괴 경성부내에 잠복하고 각 지방의 불령자를 은밀히 선동하여 불온을 기도한다”라는 문서를 총독부에 투서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비밀결사운동 3·1운동 이후 1920년대는 일제의 지배정책이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제한적이나마 결사가 허용되었으나, 민족종교는 ‘유사종교’라 하여 여전히 포교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조선총독부 인사를 암살하려거나 의형제를 맺는 방법을 통해 전개되었다. 경남지역의 천도교인들은 조선총독 등을 암살하려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바 있다. 고성과 진주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바 있는 황태익은 1920년 3월 9일 진주면 옥봉리에서 교인 7명과 경남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4월 초순 재등(齋藤) 조선총독의 순시와 부산축항 축하식에 참석하는 정무총감 암살을 기도하다가 피체되었다. 이밖에도 평북지역의 천도교인들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국민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독립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조직된 한용단에 참여하였다. 평남 강동군 이치모는 비밀결사 농민단을 조직하고 강동경찰서와 주재소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강원도 김화군 태을교인 조준호는 1920년 4월(음) 우부근과 함께 ‘국권회복팔인조’라는 독립단을 조직하고 조선독립의 목적 달성을 기원했다.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운동은 1930년대 중반 이후에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도 전시체제에 편입되어 경제적·사상적으로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도발한 이후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면서 전시동원체제를 법률로써 성립시킨 1938년의 시점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배정책을 크게 변화시킨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확대 적용되면서 식민통치가 더욱 확대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국가총동원체제가 구축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지배와 수탈체제를 더욱 강화해 갔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의 구호 아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심지어 식민정책에 저해되는 말을 할 경우 ‘유언비어’라 하여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통제하였다. 이와 같은 식민지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한국 중심의 세계질서 개편’ 내지 ‘민족의 자주성, 주체성, 자존의식’ 등은 당연히 탄압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즉 민족종교는 ‘조선독립을 표방하고 있고 일본이 패망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민족종교의 기본적인 신앙 활동마저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 아래 여전히 비밀조직의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전시체제기 비밀결사운동 평양 출신 한원빈은 국내에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만주 장백현에서 이주한 천도교인을 모아 비밀결사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반만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전국 각지의 천도교인을 규합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통일적 또는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그 본부를 서울 중앙총부에 둘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천도교청년당의 핵심당원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오심당’을 결성하여 적절한 시기에 민중봉기를 계획한 바 있다. 또한 1930년에는 장학병과 이용하 등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생활론의 영향을 받고 겉으로는 합법적인 농촌계몽운동으로 농우회를 조직하고, 그 이면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혁산구락부’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인도교는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이른바 ‘신국가 건설’을 표방한다고 하여 1937년 3월 교인 80여 명을 검거하여 채경대, 김행식 등 33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으며, 청림교 정서복은 1932년 보안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피검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강원도 통천군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청림교를 재건하다가 1938년 1월 교인 37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선도교는 1930년 일제의 패망과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1백일 수련으로 교인 785명이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었다. 정도교와 성도교는 중일전쟁 이후 조선독립을 기도하다가 대대적인 검거를 당하였으며, 인천교 전용주는 교인에게 ‘조선이 독립이 되면 신도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삼도교는 함용환 등 12명이 1937년 3월 9일 정오를 기해 총독부 광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전개하려다가 검거된 바 있으며, 천지중앙명류도는 교의에 따라 조선독립을 주장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태백산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일제패망과 조선독립 기원한 민족종교 일제 말기 일본 패망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고 현실화되어 감에 따라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지속되었다. 제주 보천교인 양원준은 교인들에게 일제의 패망과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민족종교의 비밀결사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은 일제강점 직후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 민족운동이 지하활동을 모색하였듯이 민족종교의 활동도 비밀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민족종교에 대한 인식과 탄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태을교계 민족종교의 포교활동도 비합법적이고 비밀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는 총독부 관리 암살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 비밀결사와 개인적으로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있다. 1930년대는 일제 패망과 조선독립을 위한 기도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