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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 Theme.1 후손들이 걸어온 고난의 한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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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왜 어렵게 살게 되었나 


친일 경찰에 두들겨 맞고

빨갱이 가족으로 내몰려… 일제강점기보다 혹독했다 


글 | 김희곤(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순국 의병장이나 목숨을 끊어 저항했던 순절지사의 후손들은 삶의 토대를 잃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요시찰 대상이 되면 그 가족들은 늘 불안한 삶을 보냈다.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른 인사들은 단 하루도 감시받지 않는 날이 없이 살았다. 광복 이후에는 또 다른 고난이 앞을 막아섰다. 반민특위가 주저앉던 날,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기에 이르렀다. 대낮에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나다닐 수 있는 인물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독립운동은 반세기지만, 가족과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시간은 그로부터 한 세기를 훌쩍 넘는다. 


독립운동가와 독립유공자가 있다.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은 독립운동가요, 그로 말미암아 정부로부터 포상이 된 인물은 독립유공자라 일컫는다.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그 공적과 기여가 증명되어 포상된 인물은 2021년 3·1절 기준 16,685명이다. 이들이 남긴 사연들은 얼마나 많을까. 흔히 말하듯이 사람마다 한 권씩 소설로 쓴다면 얼마나 엄청난 것일까. 이것도 대단한 양이지만, 그 가족이나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곡절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는 50년 남짓하다. 그 중간 분기점이 1919년 3·1운동이다. 앞 시기에는 의병전쟁과 구국계몽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 큰 몫을 해냈다. 후반기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이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전쟁, 국내외 의열투쟁, 사회운동 등이 큼직한 성과를 일구어냈다. 이처럼 독립운동은 반세기이지만, 가족과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그로부터 3~4대에 걸쳐 한 세기를 훌쩍 넘는다. 해방이후 곧바로 분단과 6.25전란이 이어지면서 수난의 장면과 고통도 파란만장했다.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수난의 장면들


첫째, 의병전쟁에 참전한 인물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고 옥살이를 견뎌낼 동안 가족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1908년 왕산 허위 의병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한 뒤, 또한 의병장이었던 둘째형 허혁(허환)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은 대거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 터를 잡고 독립운동과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가족들은 만주를 넘어 러시아지역으로 흩어져 목숨을 겨우 이어갔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둘째, 의병에 이어 구국계몽운동을 펼치다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했던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 문중도 마찬가지다. 종손은 종가를 지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국가가 무너졌는데 종가가 무슨 대수냐고 일갈하고서,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려고 만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손이 되고, 끝내 종가 임청각을 처분했지만, 그마저도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졌다. 독립군을 길러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대 수반이자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동안 가족들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광복 이후 그 후손들은 고아원 신세를 겪어야만 했다. 


셋째, 3·1운동 당시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현장에서 순국한 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태형 90대를 맞고 돌아와 죽음을 맞은 인물도 많다. 그 가족들의 삶은 그날로부터 상상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시간을 맞았다. 날마다 겪어야 하는 감시는 말할 것도 없고,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날들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나라 밖으로 망명한 인물도 허다하다. 뒷날 광복을 맞았다고 가족과 후손의 삶이 퍽 달라지지도 않았고, 손수레 끌고 간장 장수했던 인물도 있다.


넷째, 3·1운동 때 사회주의가 새로운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계급투쟁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자는 구호는 1920년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다. 제2의 3·1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이끈 최대 조직은 조선공산당이요, 학생사회과학연구회가 앞장섰다. 거기에 천도교 구파가 참가하였으니 최초의 좌우합작을 일구어낸 셈이다. 이것이 나라 밖에서 민족유일당운동으로, 또 이듬해에는 국내외에서 신간회와 근우회로 나타난다. 이를 이끈 권오설은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일제로부터 받은 가족의 수난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해방 이후 남북분단은 그들에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일제강점기보다 더욱 혹독한 시대를 만들어냈다. 


  다섯째, 해방을 맞았지만 온전한 광복은 아니었다. 분단도 그러하거니와, 진정한 광복은 불의가 무너지고 정의가 바로 서야 하는 것이다. 친일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의 바람이 일어났지만, 정치·사회·경제만이 아니라 심하게는 종교계까지 어느 한 군데서도 시원하게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앞으로의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는 뜻이다. 그럴 때 독립운동가의 공적과 가족 후손들의 희생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정확한 청산이 없는 처지에 가족을 돌보는 일은 아예 기대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여섯째,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회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를 만들었다. 일제통치에 눈감고 지낸 사람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망하게 만든 데 책임이 있거나 일제에 빌붙어 작위를 받은 자, 민족을 짓밟은 대표적인 인물만 처벌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대상은 1,0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대통령이 나서서 부숴버렸다. 그러니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악랄하게 고문하던 고등계 경찰 출신이 다시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붙잡아 밤새 두들겨 패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친일 경찰출신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조차 했으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심산 김창숙은 역사 바로 세우기와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가 거듭 탄압을 받았다. 그렇게 짓밟히는데 그 가족들의 삶이 일제 통치 때보다 나은 것이 있었을까. 의열투쟁사에 우뚝한 김시현이 배급받은 밀가루로 연명하다가 삶을 마감한 이야기는 그저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고난의 길은 쉽게 끝나지 않아


 순국 의병장이나 목숨을 끊어 저항했던 순절지사의 후손들은 삶의 토대를 잃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라 밖으로 망명했던 인물들은 국내의 자산을 대부분 잃었다.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요시찰 대상이 되면 그 가족들은 늘 불안한 삶을 보냈다.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른 인사들은 단 하루도 감시받지 않는 날이 없이 살았다. 항일 사회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은 일제 통치 시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광복 이후 분단 시기에는 또 다른 고난이 앞을 막아섰다. 더구나 반민특위가 주저앉던 날,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기에 이르렀다. 대낮에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나다닐 수 있는 인물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런 형편에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가족 후손의 희생에 보답하자는 이야기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립유공자 포상이 제대로 추진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말이었다.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2년에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갑자기 시작되어, 광복 이후 44년이나 지난 1989년까지 포상된 독립유공자는 겨우 750명 남짓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독립유공자나 그 아들딸, 또는 손자녀 가운데 한 사람에게만 연금이 주어졌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돌아온 것은 한 사람 살아남는 데 머문 것이다. 독립운동 출발점인 의병전쟁에서 목숨 잃었던 분의 후손은 광복이 될 때 이미 증손이나 고손이 되었으니 연금조차 받을 수 없었다. 최근에 제도가 조금 보완되기는 했지만 실제 수혜자는 극히 드물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기어코 일어서리라, 그것만이 임의 뜻이니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돌아보자고 말하면, 또 그러느냐며 고개 돌리는 경우다 많다. 그들을 불쌍하게 보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공헌과 희생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출발한 후손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일이요,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머리를 스치는 말이 있다.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고, 악착같이 살아오는 동안 정부로부터 생활비 한 푼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뚝 일어서지 못한다면 순절하신 증조부의 후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순국선열유족회 이동일 회장의 말이다. 의병전쟁에 참전하고, 나라 망하자마자 27일 단식하여 순절한 이중언의 증손자로서, 견뎌내야 했던 수난의 깊이와 이를 악물고 견뎌낸 정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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