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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 Theme.2 독립운동가의 가족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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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외면당한 독립운동 


독립정신 가문에 새겼지만

고통과 치욕의 삶만 남아… 누가 애국하려 하겠는가 


글 | 김병기(광복회 학술연구원장)


 23년간의 옥살이 끝에 집에 돌아왔으나 아내와 외아들은 이미 일제의 손에 학살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의 며느리는 고문 끝에 두 눈을 모두 잃었다. 증손자들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거나 백색 테러를 당하는 등 세상을 떠났고, 남은 자녀들은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나라는 찾았으나 국가는 후손들의 삶을 외면했고, 대한민국에서 3대가 이어지도록 고통스런 삶이 계속되었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말은 하나의 정설로 굳어졌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3대(증손)를 넘어 4대(고손)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4대가 망한다’는 말이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자정순국으로 이어진 한 가문의 이야기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의 침략과 불의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지사는 70여 명에 이른다. 자정순국(自靖殉國)은 그저 살기 싫어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일제가 힘으로 짓밟고 억눌러도 결코 꺾이지 않고,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기(義氣)의 표현인 것이다.


향산 이만도(1842~1910)는 자결순국투쟁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향산은 퇴계 이황의 11대손으로 1866년 문과에 장원급제 한 뒤 10여 년 동안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한 정통 관인이었다.  


일제는 1895년 8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1896년 1월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된 <예안통문>에 의해 선성(宣城)의병을 결성하였고, 향산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들이 상주 태봉전투를 치르고 난 뒤 청량산으로 들어가 전열을 가다듬자, 일본군은 의병 본거지를 초토화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의 주도세력을 진성이씨 문중이라 보고 상계의 퇴계 종택에 불을 질러 집 일부와 1천 4백여 권의 서책을 모두 불태웠다. 


  향산이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것은 9월 4일이었다. 이미 죽음을 결심한 향산은 날마다 선조의 묘소를 찾아다니며 종일 통곡하였다. 비통하게 10여 일을 보낸 향산은 9월 17일부터 자정(自靖)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향산이 단식에 들어가자, 한자리에 모인 일가친척들은 차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향산은 주위 사람들에게 저녁을 먹을 것을 두 번 세 번 권했으나 누구도 그 말을 쉽게 따를 수 없었다. 그러자 향산이 크게 역정을 내며 곧바로 자진(自盡)하려 하였다. 이에 놀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잘못을 빌고 음식을 먹은 뒤에야 비로소 자진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단식 24일 되던 날인 10월 10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향산 이만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나라가 무너진 뒤 이만도는 망국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짓밟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인물이 즐비한 마당에, 이만도는 나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의로운 죽음을 택하였다.


이만도의 순국은 후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동생 이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아들 이중업도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나 1921년 6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 김락의 항일 투쟁은 더욱 처절하였다. 예안 3·1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일제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두 눈을 모두 잃었다. 두 손자 이동흠, 이종흠은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가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맏사위가 금계마을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김용환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파락호라 비웃었지만 실제로는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공급한 독립운동가였다. 둘째 사위 또한 정재 류치명의 증손자로 안동청년회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 참가하여 사회운동을 벌였다.


향산이 일으킨 순국의 물결은 집안 조카인 동은(東隱) 이중언(李中彦, 1850~1910)이 뒤를 이었다. 그는 ‘문과 갑과 제3인’으로 대과를 통과하고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이중언에게 이만도는 집안 숙부이자 학문적 선배요, 과거시험과 관직의 길잡이였다. 선성의진에 참가하여 전방장(前防將)으로 태봉전투에도 참가하기도 하였다. 


향산의 단식 소식을 듣자 동은은 이미 숙부의 뒤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향산의 순국 소식을 들은 이중언은 곧바로 단식에 들어갔다. 아들 서호(瑞鎬)가 울면서 고하였으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식한 지 27일 만에 순국에 이르렀다. 순국자정한 향산의 뒤를 그대로 이은 것이다.


혹독한 시련의 한복판에 선 백남규 의병장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어느 한 사람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 가운데서도 백남규(1884~1970) 의병장의 혹독한 삶은 유별나다. 백남규 의병장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와 안동진위대 부위(副尉)로 복무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군인으로 평탄한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그는 이강년 의병장의 의진을 따라 의병의 길로 들어섰다. 백남규는 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우선봉장이 되었다. 그 후 제천전투, 갈평전투, 죽령전투 등을 거치면서 도선봉(都先鋒)이 되어 이강년 의진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작성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은 발목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그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한 이후에도 백남규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벽, 내성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1909년 12월 경기도 죽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다.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8년 만에 풀려났다. 옥에서 나오자 상해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1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3년간을 복역한 셈이다.

오랜 감옥살이 끝에 옥문을 나와 보니 사랑하는 아내와 하나 있던 아들은 이미 일제의 손에 학살되고 말았다.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 5년 만에 53세의 나이에 재혼하여 아들과 딸을 두었다.  


해방이 되고 나라는 찾았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더 이상 주역이 되지 못했다. 백남규 의병장에게도 이승만 사람들이 찾아와서 건국사업에 참여하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우국노인회 회장과 국민회 고문이 되어 활동하던 중 그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옛 친구 권용일 의병장을 만났다. 권용일은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우군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일본군과의 무수한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동지요, 동갑나기 친구였다. 권용일 역시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한 후 해외로 떠돌다가 해방 후 고향인 제천에 정착한 터였다. 


6·25전쟁은 백남규 의병장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전쟁 중 부인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몸소 끼니를 지어 어린 자식들과 생활을 해야 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일정한 직업도 없었기에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백남규의 유일한 낙은 제천 사는 친구 권용일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차비가 없어 충주에서 제천까지 1백 여리의 길을 매번 걸어서 갔다. 선생은 재혼 후 남매를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 후 경기도 광릉 언저리에서 수해(水害)로 일찍 죽고, 53세에 낳은 아들이 한 점 혈육으로 남았다. 너무나 가난했던 까닭에 외아들인 준기 씨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하고 말았다.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해 시장 주변을 떠돌며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부끄럽습니다만 현재 조그만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라며 주눅 든 목소리로 수줍게 말하는 그를 보며 ‘당신이 왜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알 수 없는 울분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임청각의 수난과 그 후손들


  석주 이상룡(1958~1932)은 1910년 12월 주진수를 통해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건설의 계획을 접하고 처남 김대락과 함께 망명 계획을 세웠다. 이상룡은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가산을 정리하고 노비문서를 다 불태워서 많던 노복들은 각각 흩어져 돌아가서 양민(良民)이 되게 하였다. 


1911년 정월 5일 이른 새벽 이상룡은 가묘(家廟)에 하직하고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일행은 1월 27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한데 고개를 돌려 고국을 돌아보니, 돌아올 기약이 묘연했다. 압록강을 건너서면 안동현이다. 마차 두 대를 사서 울퉁불퉁한 만주의 얼어붙은 길을 달려 7일 만에 겨우 회인현 횡도천에 도착했다. 


낯설고 물설은 만주 땅에서 거처할 곳조차 없는 신세를 돌아보면서 이상룡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가 남긴 『서사록』에는 이때의 심경을 ‘생각컨대 내가 50년 동안 너른 집 깊은 처마의 훌륭한 거처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집을 나서서는 문득 집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고 보니, 사람의 한 생애가 대부분 허깨비임을 참으로 깨닫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룡이 안동 법흥동에서 거처하던 임청각으로 말하자면, 원래 아흔아홉 간의 고성이씨 대종택이었고 그는 고성이씨 종손이었다. 


  이상룡은 오두막집에 물러나 살면서 날마다 우리나라 역사를 초록하여 학생들의 교과서를 마련하였다. 불편한 거처, 험한 음식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그 고생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으나 이상룡은 홀로 태연하였다. 산비탈에 몇 마지기의 콩밭이 있었는데 이상룡은 날마다 가서 김을 맸다. 


1932년 5월 이상룡이 서란현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들 준형은 가족을 이끌고 귀향하였다. 이때 임청각이 중앙선 철도 부설로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장차 철도 때문에 무너질 터인데, 4백 년 지켜온 유물이 빈 언덕이 된다면 어찌 마음이 절통하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하며, ‘4백 년 된 집을 잃을 바에야 차라리 지난날 압록강에 빠져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한다’고도 했다. 굴욕적인 나날이었으나 광복의 날이 머지않았음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에게 ‘일제가 싱가포르를 점령했다’는 보도는 세상만사를 비관하게 만들었다. 1942년 9월 이준형은 목 동맥을 끊어 자결하였다. 유서에는 ‘하루를 더 살면, 하루의 치욕만 더할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99간 대저택의 안락과 명문대가의 부와 명예를 초개처럼 던져버린 채 독립투쟁에 한평생을 바쳤던 석주 이상룡의 간난신고의 삶은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나라는 찾았으나 후손들의 삶은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3대가 이어지도록 고통스런 삶이 계속되었다. 국가는 후손들의 삶을 외면하였고, 6·25전쟁의 와중에 손자 이병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증손자들 또한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거나, 백색 테러를 당하는 등 세상을 떠났고, 남은 자녀들은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할까 싶어서 인터뷰조차 꺼린다’는 증손자 이항증 선생의 말이 아릿하게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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