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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 Theme.4 특별좌담ㅣ 순국선열 후손들의 삶과 고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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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순국선열과 후손 예우 제대로 할 때 

국가 정체성 및 위상 확립 


● 일  시 

2021년 5월 20일(목) 오후 3시

● 장  소

순국선열유족회 독립관 무궁화홀

● 사회자 

심재추(월간 순국 편집주간)


● 참석자

이동일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이중언 선생 증손)

김시명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직전회장(김필락 선생 증손)

김병기 광복회 학술원장(김승학 선생 종손)

정만기 일광기념관장(정시해 의병장 증손)

이강세 광복회 광주지회장(이근주 선생 손자)


우리는 주요 행사 때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한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한 순국선열 15만여 명 가운데 지금까지 서훈을 받은 분은 3,500명이고 유족보상금을 받는 인원은 885명에 불과하다. 또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자들의 후손은 상당수 대가 끊기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를 위한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외면하고 홀대해 온 순국선열과 그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예우와 지원을 해야 한다. 이에 월간 <순국>은 ‘순국선열 후손들의 삶과 고난의 여정’을 주제로 특별좌담을 진행했다. 


이동일 회장올해는 순국선열의 날이 제정된 지 82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하지만 여전히 순국선열이 누구이며 왜 예우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국민이 많다. 이에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정론지로서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월간 <순국>지에서는 순국선열 후손들을 직접 모시고 선조들이 독립운동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후손으로서 살아온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자리를 마련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린다.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한 끝없는 저항

슬픔·울분에 무장투쟁부터 자결순국까지


사회자 먼저 참석하신 분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선조들의 삶과 독립운동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한다.


정만기 : 일광 정시해 의병장의 증손으로 현재 일광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정시해 의사는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며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을 맡았다. 이후 순창전투에서 의병본진 중군장으로 싸우다 33에에 순국해 호남의병 최초순국 의사가 됐다. 이는 호남의병이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순국 6년 후인 1912년 일광 정시해 의사 추모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는 사실이 최근 문서에서 밝혀졌다. 서슬퍼런 일제강점기 때 순국의병 추모사업을 한다는 것은 지금의 국가보안법에 걸릴 만큼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역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선양사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이강세현재 광복회 광주지회장을 맡고 있다. 조부는 이근주 열사로 충남 홍성에서 홍주의병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되자 통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자결 순국하셨다. 이근주 의병장은 지역 의병 활동에 있어서 상당히 큰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58년 홍성군에서 독립운동사에 관한 기록을 담은 대한의사비를 묘소 앞에 세웠다. 2017년 1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김병기  현재 광복회 학술원장이며 증조부는 희산 김승학 애국지사다. 증조부는 평안도 출신으로 만주 최초의 의병단체인 대한독립단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다 광복군사령부에서 무장투쟁과 만주지역 삼부시대 참의부 참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비롯해 임정 학무총장 대리를 역임, 독립신문사 주필이었던 박은식 선생과 독립운동사를 펴내기 위해 독립운동 자료를 모은 후 해방 후에 <한국독립사>라는 독립운동통사를 쓰셨다. 이는 독립운동가가 쓴 최초의 독립운동사다. 해방 후인 1964년에 돌아가셨다. 


김시명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직전 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독립운동가 김필락 선생이 증조부 되신다. 우리 집은 안동 독립운동의 중심이라 일컫는 내앞마을에 있었다. 증조부는 김대락, 김동삼 등과 함께 안동에서 활동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이들과 함께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기려 했으나 고조모가 편찮아 같이 가지 못하고 안동에 남아 손두원·손영학 등과 함께 길안 3·1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일경의 계속된 추격을 받았던 선생은 손두원의 피살(3. 24)에 이어 다음날 가택에 침입한 일경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동일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중언 의병장이 증조부시다. 집안은 안동 하계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대대로 벼슬을 지냈다. 증조부는 1879년 문과에 급제해서 언관생활을 하다가 1880년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며 만인소를 올렸고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안동에 내려와 숙부인 향산 이만도 의병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셨다. 이는 안동 독립운동의 대표 시발점이라 할만하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해 집 밖에 작은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늘 존경하고 의지했던 숙부 이만도 선생이 24일 단식한 끝에 순국하자, 연이어 27일 단식으로 스스로 그 길을 따라 자정순국했다.


죽음도 꺾지 못한 신념과 원칙

순국선열 후손들의 궁핍한 삶


 

사회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수많은 순국선열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지만 순국선열 후손들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순국선열 후손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오셨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정만기 1909년 일제는 호남토벌작전을 벌여 의병들을 전멸시킨 후 후손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회유작전을 벌였다. 할아버지에게도 면장과 군수 자리를 제안했으나 계속해서 거절하자 끝내는 아버지를 강제징병하겠다고 위협했다. 목숨도 명분도 잃을 수 없었기에 결국 아버지는 중국으로 도망갔고 소학교 훈도(교사)를 하면서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셨다. 해방 후에도 부자가 될 기회는 있었으나 아버지는 명분을 더 중히 여기셨다. 광복 후 일제 적산(敵産)에 대한 전수조사가 있었는데 친척 관리로부터 적산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욕되게 할 수 없다며 단번에 거절하셨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은 만큼 국가가 공식적으로 지원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생각한다. 


1994년 일광 정시해 의사 기념사업회를 재차 발족하면서 기념관을 지었는데 당시는 정부의 관심이 적었고 지원이 없었기에 고창지역민 3천여 명의 성금을 모으고 모자란 자금은 아버지가 재산을 출연해 충당하면서 완성할 수 있었다. 기념관을 만들고 기념사업회를 발족해서 모양새는 갖췄지만 호남의병 최초 순국 의사임에도 아직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977년 서훈을 받은 뒤 등급 재심사를 신청을 했지만 봉투를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고는 제안을 거절했다.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후손들의 삶은 보상은커녕 명분 때문에 더 어렵게 사는 경우가 많다. 


 김시명  순국선열 후손에 대한 일제의 회유는 전국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안도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조부가 28살 되던 해 경찰서에서 군청의 서기 일을 하라며 회유를 해왔다. 당시 조부는 ‘아버지를 때려죽인 놈들 밑에서 밥 빌어먹으라는 것이냐’며 거절했지만 계속된 회유와 고문으로 33살에 돌아가셨다. 


  이강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아버지는 장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열심히 돈을 버셨고 육군상무사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다행히 생활형편은 좋아졌지만 아버지는 6·25전쟁 중 병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제가 7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상업 수완이 좋으셔서 땅을 많이 사두신 덕분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지만 다행히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김시명   우리 집안은 땅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에 빼앗겨서 힘들게 살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베를 짜서 밭을 사시긴 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살았다. 공부를 잘한 덕분에 무시험으로 안동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지만 돈이 없어 포기하고 다른 중학교에 극빈자로 등록금을 면제받고 들어갔다. 고등학교도 실습포상으로 등록금 면제를 받아 다녔다. 이동일 회장도 굉장히 어렵게 산 것으로 아는데 안동지역에서 독립운동한 분들의 후손은 다른 지역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한 것 같다.


이동일  벼슬 생활을 할 때는 전답이 있었지만 증조부가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가진 게 없었다. 우리 가족은 감시를 피해 울진, 영덕 등지에 숨어 살다 광복이 되어서 서울에 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동생들과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안한 것 없이 지냈다. 그 생활은 비참해서 말도 못한다. 고물을 주워서 판 돈으로 초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는 어머니 병시중에 입학금을 쓰느라 늦게 다녔다.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고철을 주우며 소년가장 노릇을 했지만 퇴계 이황 15대 직계 자손으로서 진성이씨 하계파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학교생활을 했다. 지금도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선조를 원망하지 않았다. 


해방 후 핍박받은 독립운동가들

친일청산, 너무 오래 미뤄둔 숙제


사회자 김병기 박사는 순국선열 공청회 때 ‘독립운동가와 가족수난사’라는 주제로 특강을 해주신 바 있다. 추앙받고 남들보다 대우받아야 할 순국선열 후손들이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살게 되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린다.


김병기  힘을 합쳐서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까지는 다들 열심히 했지만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승전국인 미·소의 정략적인 국제 정세에 더해 독립운동가 사이에 내분이 있었다. 좌우익의 갈등뿐 아니라 우익 안에서도 이승만 계열이니 김구 계열이니 서로 갈등이 일어났다. 사실 어느 나라나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한 인물들이 중심이 돼서 나라를 건국하고 그들이 주역이 된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는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더 핍박을 받았다. 해방 후에 곤욕을 치른 경우가 많아서 차라리 일제강점기 때가 더 낫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해방 정국에 이르러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지 못한 탓에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청산을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민족의 불행이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인식 부족

올바른 보훈정책과 국가적 예우 필요


사회자  아직 순국선열 후손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것 같다. 후손들에 대한 지원 방안을 시스템화하여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순국선열 후손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와 지원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과 개선방안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한다. 아울러 바람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항상 독립운동가들이 찾아왔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다. 저 역시 독립유공자의 증손자다 보니 교육 혜택을 못 받아 매일 수업료 때문에 쫓겨 다녀야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비참한 삶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선 우리 자신도 노력해야 하지만 국가가 나서야 한다. 국가보훈처의 예우보상은 참전유공자에 집중돼있고 상대적으로 독립유공자는 뒷순위로 밀려났다. 더군다나 독립항쟁계열 단체로는 광복회만이 유일하게 공법단체로 지정되다 보니 많은 단체가 소외돼서 국가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순국선열유족회 또한 공법단체가 아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가 먼저 나서서 지원해줘야 함에도 순국선열 후손들이 해달라고 애원하는 상황이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동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서로 힘을 모아야 함에도 구심점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도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여러 기념사업회와 독립운동단체들이 많지만 회원 대부분이 80대 이상의 고령층인 것도 문제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오래전부터 후손들의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후손들의 이야기는 ‘1차 사료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역사적 가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라도 후손들의 이야기를 수집해서 역사 기록물로 남길 계획이다. 왜냐면 기록을 남겨야 역사가 되는 것이지 머릿속에만 있으면 역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독립운동사는 기초적인 사실만 기술할 뿐이지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현장이야기는 후손들이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남겨야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정립된다.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일을 하면서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순국선열이 이미 죽은 자들이고 대부분 후손이 없다 보니 여러 면에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모든 게 표로 연결되는 세상이다 보니 단체의 타당성은 인정하면서도 지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헌법 전문에 순국선열을 명기하는 문제나 유족회의 공법단체 지정 문제가 흐지부지되는 것을 보면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은 인원이라도 똘똘 뭉쳐서 우리의 정당성을 요구해야 하는데 순국선열은 82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뭉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배우지 못해 어렵게 살다 보니 적극성이 없어서이다. 단체를 운영하려면 중지를 모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게 순국선열의 가장 큰 문제다. 


 이강세 인원수는 우리 단체 역시 똑같이 느끼는 문제다. 처음 광복회 지회를 맡았을 때 인원수가 얼마 안 돼 연합지회를 만들고서야 30명이 됐다. 지금은 회원이 50명이지만 사무실이 있는 보훈회관 내 다른 단체와 비교하면 여전히 인원수가 적다. 그래도 각종 행사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많은 관심을 보이며 지원해주고 있다. 순국선열유족회도 인원수가 적지만 활발한 활동을 통해 관심을 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병기  현재 광복회는 수권자 1명만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집안사람 모두가 회원이 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단체가 힘을 기르려면 수권자 중심이 아닌 후손을 모두 회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순국선열유족회도 한 집안에서 한 사람만이 회원이 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돼 있는데 회원 자격의 폭을 넓혀야 한다. 저는 증조부의 장종손이지만 수권자는 아니다. 아직 삼촌과 고모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수권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수권자만 회원으로 받는다면 그 단체는 항상 나이 많은 사람만 모이고 젊은 사람은 올 수 없다. 시스템이 바뀌어서 일반 자손들은 준회원으로라도 등록을 받아야 회원이 많아져서 제 역할을 하게 된다. 


정만기  우리 지역의 경우 독립유공자는 96명이지만 후손은 5~6명밖에 안 돼서 광복회 지회를 결성할 요건이 안 된다. 광복회에 회원 자격을 수권자로만 하면 나중에 단체가 없어질 것이니 개선할 것을 요구했지만 수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창은 독립유공자 후손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독립유공자유족회를 발족했다. 현재 3.1절, 8.15 행사 등을 고창군과 공동으로 치르고 있다. 제가 가장 젊다는 이유로 유족회장을 맡고 있는데 대부분 연세가 70~80대의 고령이기에 나오실 때마다 젊은 후손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해서 회원 수를 늘리고 있다. 


 한국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창군도 민선7기 단체장 중 5기까지 친일파의 후손들이 차지했다. 순국선열의 후손이 단체장으로 배출 될 확률보다는 앞으로 친일파 증손자가 단체장으로 선출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동일 유족회는 그동안 우리 단체의 당위성을 알리며 헌법 전문에 순국선열의 정신 명기, 순국선열유족회의 공법단체 지정, 순국선열추념관 건립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실로 이낙연 민주당 전 대표가 관련 법안을 발의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또한 정세균 전 국무총리를 방문해 순국선열의 참담한 상황을 토로하여 보훈처로부터 올해 2억 원, 내년에 1억 원을 추가로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는 무궁무진한 독립운동 자료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33년의 역사를 지닌 월간 <순국>지가 있고 지난 15년 동안 찾은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을 해서 큰 효과도 봤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하나씩 체계적으로 실현하다 보면 순국선열유족회가 비록 회원 수는 적더라도 대한민국의 정신적인 측면을 이끌어나가며 독립운동사에 하나의 키를 가지고 매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자  순국선열은 그동안 홀대를 받아왔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후손은 단 한 번도 연금을 받지 못했다. 순국선열을 애국지사와 같게 예우 및 지원을 해야 한다. 순국선열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유족회가 아직은 작지만 올바르게 멀리 내다보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유족회와 월간 <순국>지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밀어주시기를 바란다. 오늘 귀한 분들을 모시고 좋은 말씀을 나눴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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