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 Theme.1 여민(女民) 독립운동의 전개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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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에서 ‘민국시민’으로 성장하다
구국에서 여성해방까지
자유·평등·평화 향한 시대변혁에 온몸 던져
글 |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그늘에 있었던 ‘안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국가’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 국가 구성원임을 자각한 여성들은 ‘구국운동’의 주체로 나섰다. 여성독립운동은 의병운동부터 국내항일운동, 학생운동, 의열투쟁, 만주방면, 노령방면, 중국방면, 임시정부, 광복군, 미주방면 등 독립운동의 다양한 방면에서 실천되었고 항일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구국’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의 대열에 섰던 여성들은 다름 아닌 누군가의 자녀, 부인, 어머니였다. 조국 광복의 빛이 된 여성독립운동가는 2021년 3월 기준으로 526명이 서훈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의 배면에 가려진 여성독립운동가는 수없이 많다.
역사의 프레임, 틀을 깬 여성들
19세기 한국여성은 제도와 사회, 편견의 울타리, 그리고 ‘안사람’의 범주 속에서 자유의지와 행동을 제한당했다.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그늘에 있었던 여성들은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여성해방운동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 국가 구성원임을 자각한 여성들은 ‘구국운동’의 주체로 나섰다.

한국여성의 항일구국운동은 ‘일제저항’과 ‘국권회복’의 조국 현실을 직시하면서부터 나타났다. 개항 이후 선교사의 국내 입거와 기독교 보급, 여성교육기관의 설립 확산은 여성의 사회인식을 변화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1860년 동학사상의 최제우가 주창한 반상(班常)과 노주(奴主)의 신분 계층 타파와 남녀동권의식,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박영효·홍영식·김옥균·서재필이 전근대적인 사회제도 혁신과 여성교육 필요를 강조하고, 1895년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됨에 따라 여성은 교육 기회를 통해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다.
1886년 최초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의 개교 이후 교육에 대한 열망은 1898년 9월 1일 북촌 양반부인에 의해 발표된 최초 여권선언서 「여권통문」으로 공식화되었다.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 주장은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여자흥학회’, ‘부인학회’ 등 각계 여성단체 조직으로 이어지고 근대여성교육을 이끄는 ‘1세대 여성유학인’이 배출되면서 근대여성교육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1907년 국가 채무를 갚지 못해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하자, ‘나라 빚을 갚자’는 취지가 「국채 1,300만원 취지서」로 발의되면서 신분과 나이·성별·지역을 뛰어넘는 순명(順命)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여성도 전국에서 여성국채보상운동 단체 46개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의연금 모금활동에 앞장섰다. 그들은 양반가 부인·전관직 부인·개화여성·부실·기생·농민부인·상인부인·교사·학생·궁녀·여승이었다. 이들은 ‘구국(救國)’의 의미를 가슴에 품은 ‘민국시민(民國市民)’이었다.
의병부터 3·1운동·독립운동, 광복까지
1920년 『독립신문』은 “大韓人아 大韓人은 이 國民軍의 명하에 한 대 뭉칠지어다…” 기사를 통해 국민개병을 모집했는데, 여성도 그 대상이라는 것을 주지시켰다. 우리 역사에서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九國)’ 의지는 응축된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여성도 간접적 또는 직접적으로 구국의 대열에 섰다.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 윤희순 의병가사 ‘안사람 의병가’ 중에서
‘일제 저항’과 ‘국권회복’의 현실에 남녀 구분은 없었다. 양반가 여성들은 ‘안사람 의병단체’를 조직하여 의병운동에 참여했고,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 과정에서 여성은 ‘여학생결사대’와 ‘애국부인회’, ‘부인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를 외치다 투옥되어 일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멀리 태평양 건너에서 조직된 여성단체 ‘대한여자애국단’, ‘부인회’, ‘대한부인구제회’는 안중근 의사 재판지원금을 모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립을 위해 독립의연과 국민의무금을 보냈다. 여성독립운동 실천에 국경의 구분은 없었다.
독립운동은 총과 칼을 든 것만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구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나라를 향한 국민의 주인(主人)됨이요, 신의(信義)의 결집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천만 충의자녀가 다 독립의 군인이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립을 위해 여성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안사람, 피난지를 찾아 떠나면서 독립정신을 잊지 말라고 전하는 자녀의 교육자, 독립자금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었던 여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멕시코, 쿠바 등에서 남녀동권의식을 가지고 실천한 여성독립운동가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구성원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것, 그것은 여성독립운동가가 확신한 국민의 책무였다. 의병운동에서 3·1운동, 국내외 독립운동 역사의 주역으로 조국 광복의 빛이 된 여성독립운동가는 2021년 3월 기준으로 526명이 서훈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의 배면에 가려진 여성독립운동가는 수없이 많다.
세계여성사에서 한국여성독립운동 자리 찾아야

쓰개치마를 쓰고 야학당을 찾았던 여성의 저고리와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실용적으로 변하는 과정은 사회의 질책과 물음에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었다. 남편을 잃고 종교에 귀의한 여성이 해외 유학에서 학위를 받고 애국계몽운동에 선 이유, 고된 추위와 싸우며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여성들이 적진에 있었던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역사의 흔적이 세기를 넘어 여성독립운동가의 기록과 사진, 자료로 남아있다.
세계적인 여성상으로 헬렌 켈러, 퀴리부인이 소개된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이어간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도 결코 이에 못지않다. 한국여성독립운동사는 세계여성사의 한 부분이다. 이제는 세계여성사의 자리에 한국여성독립운동의 역사도 자리매김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