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 Theme.3 무장투쟁에 나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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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치열했던 여성 항일투사의 삶
만삭 몸으로 적진 뛰어들고
수많은 전투 승리로 이끌며 여성상의 한계 넘어서다
글 |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수)
1919년 3·1운동 이후 여성단체가 등장하고, 독립군 단체가 조직되면서 여성들의 무장투쟁도 나타났다. 당시 여성들은 선전문을 배포하거나 군자금 모집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1920년 말경에는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군량과 무기 수송에 어려움을 겪자 여성들이 나서서 이를 도왔고, 탄우(彈雨)가 쏟아지는 전선에 뛰어들어 독립군을 위로하고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어떤 부인들은 일본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부터 적지 않은 만주 한인 여성들도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하였다. 여장군으로 불린 허성숙은 1939년 8월 일본군 총탄에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황정신은 임신한 몸으로 유격대에서 활동하던 중 산속에서 출산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여전사들 가운데는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체포된 후에는 일제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그 수가 남성보다 훨씬 적은 것은 여성 독립운동가와 관련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며, 엄격한 공훈 심사 규정도 한 몫 한다. 여성이라는 특수한 지위와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까닭이다. 전통시대의 여성상이 현모양처였기에 밖에 활동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고, 육아·집안 노동 등을 전담해야 했기에 독립운동에 제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런데도 독립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염원은 대한인의 한 사람으로서 뒤지지 않아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무장투쟁에 나선 여성들’도 있었다. ‘무장투쟁’이라 함은 사전적 의미로는 ‘정치·군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무장 집단이 조직적으로 벌이는 군사 행동’이라고 하는데, 독립운동사에서는 무기로써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는 경우를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여성 중심이거나 일부 여성이 포함된 독립군 단체가 결성되어야 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무장투쟁’과 여성 운동가를 연결 짓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맞게끔 그러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무장투쟁이 전개된 곳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이었다. 그곳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에 제격이었다. 이를 근거지로 독립군들은 국내진공작전을 벌였고 만주나 연해주로 침략해온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이러한 무장투쟁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만주를 중심으로 여성들의 무장투쟁의 양상과 활약상을 간략히 살피려 한다. 1920년대 초 무장투쟁 여성 독립운동가 1910년대 전후 만주 지역의 여성 독립운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 큰 변화가 일었고 그 결과 여성단체가 등장하였으며, 독립군 단체가 조직되면서 여성들의 무장투쟁도 나타났다. 먼저 북간도부터 살펴보면, 이곳은 두만강 건너편에 있어 1860년대 이후부터 한인들이 농사를 짓던 곳이고 연해주와 인접해 있어 독립운동가들의 교류가 잦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군과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잦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대표적이다. 김숙경은 독립운동가 황병길의 부인으로 남편을 돕거나 소속 단체를 지원하였다. 그는 1919년 간도지역 3·1운동에 참가한 뒤 그해 9월 훈춘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의연금이나 군자금을 마련하였고, 1920년 10월에 일본군의 경신대학살 당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장태화는 1924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서 대동회(大同會) 선전원으로 선전문을 배포하거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여자 독립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김죽산은 독립군에 많은 물품이나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다음으로 서간도에는 압록강 너머 험준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독립군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독립군들은 일본 수비대의 경계망을 뚫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발한 진공작전을 펼쳤다. 당시 무장투쟁으로 이름을 날린 여성은 윤희순·박신원·김우락·허은·남자현 등이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라 불리는 윤희순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뒤에 무장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자식들은 물론 독립군의 부인들로 ‘가족부대’를 구성하였다. 이는 “국권 회복은 매 가정, 전 민족이 동원되어야 하고,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먼저 실력이 있어야 하며 내 집안부터 실행해야 한다”라는 생각에서였다. 박신원은 독립군의 통신 연락, 독립자금 송부, 평양감옥에서 탈출한 독립지사를 만주로 도피시키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일본군에게 붙잡혀 불 속에 던져지는 등의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우락은 남편 이상룡이 서간도로 망명한 뒤부터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옆에서 도왔다. 그와 관련한 자료가 없음에도 공훈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예이다. 허은은 길림 유하현에 근거지를 둔 서로군정서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자 의병장 허위의 재종손녀이다. 가족의 생계를 돌볼 수 없던 남자들을 대신해 농사를 짓고, 독립군을 위해 군복을 마련하거나 조석(朝夕)을 준비하는 것은 독립군의 부인, 며느리, 딸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고자 중국식 검정 두루마기를 입곤 했다. 이러한 그의 일들은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