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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 Theme.4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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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간 임정 이끌어온 정신적 사표(師表) 


강인한 ‘민족 어머니’로

따뜻한 ‘마음의 고향’으로  훌륭한 리더십 보여주다 


글 |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복종과 순종”만이 절대적인 가치관인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살아왔던 여성 대부분은 강제 병합이라는 충격적인 사회 변동 속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여성들은 3·1운동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임을 선언함으로써 ‘백성’이 아닌 국가의 주인공인 ‘국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7년간 임시정부를 지탱할 수 있었던 요인도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여인들은 임정 안살림부터 옥바라지, 자녀양육, 경제활동까지 병행하며 극한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강인했고 따뜻했다. 조국을 떠나 생사를 넘나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고향과 같은 존재였으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다툼이 생기면 때론 달래고 때론 꾸짖는 등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단연코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낙네’ 굴레를 벗어나 사회구성원으로 자각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 식민지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과 군대해산 등으로 대한제국은 완전히 고립된 ‘국제사회 미아’가 되고 말았다. 강제 병합 이후 “복종과 순종”만이 절대적인 가치관으로 미화되거나 강요되는 엄혹한 분위기였다. 여성 대부분은 잔존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가장(家長) 결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었다. 


충격적인 사회 변동은 ‘아낙네’에게 사회적인 책무가 무엇인지를 일깨웠다. 이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절대적인 가치관에서 점차 벗어나 민족 문제를 고민하면서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인식 변화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직접 실천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3·1운동에서 여성들은 사회구성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임을 선언했다. ‘백성이나 신민’이 아닌 국가의 주인공인 ‘국민과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7년 임시정부를 지탱할 수 있었던 요인도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자율적인 양육으로 자녀들의 독립운동을 이끌다


조마리아(趙姓女)는 1862년에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煽)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중근의 어머니로 세례명은 마리아다. 안태훈과 결혼하여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에 참여하여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이처럼 조마리아는 자녀들을 모두 성스러운 민족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하얼빈의거 이후 옥중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민족 어머니’로서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당시 신문은 이를 두고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 위대한 사람 뒤에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의미임)라고 평가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을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 말할 수 있으리. …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어떤 어머니가 목숨이 위태로운 자식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조마리아는 자식이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왜놈 순사를 호령하며 당당하게 삶을 마감하라는 가슴 아픈 충고를 전한다.


안중근 의사가 굽힘없이 치열하게 일제 침략에 저항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묵묵히 지원한 어머니가 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떠나는 아들을 붙잡지 않고 오히려 독려했다. 아들을 보낸 뒤 자신의 모든 패물을 내놓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들이 순국한 이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아들의 뜻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조국을 떠나 연해주를 거쳐 상하이에 정착한 후에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고향과 같은 ‘어머니’였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을 때 때론 달래고 때론 꾸짖는 등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 여성 정위원으로서 독립투사들의 버팀목이 되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치며 간절히 바랐던 조국 독립은 결국 보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들 정신적인 사표(師表)가 되다


굴곡지고 한 많은 근대사회를 꿋꿋하게 살아온 여성의 상징적인 인물은 바로 곽낙원(郭樂園)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어머니로서 14세에 해주 텃골[基洞]에 사는 김순영(金淳永)에게 시집을 갔다. 평생 아들과 손자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도록 너무나 헌신적이었다.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이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자, 곧바로 인천항 물상객주 집을 찾아가 바느질과 밥 짓는 일을 해주며 옥중 아들을 돌보았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는 서울로 올라와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김구가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 하루 두 끼니를 먹기도 어려울 만큼 궁핍한 생활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통에서 배춧잎을 주워 끼니를 해결하였다. 며느리가 둘째 손자를 낳은 후 폐렴으로 사망하자 손자들을 데리고 안악으로 돌아왔다. 1925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는 “죽어도 고국강산,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해객창(上海客窓) 김구씨 모친”이라는 기사에서 빈한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자 1934년 손자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다시 탈출했다.


이후 곽낙원은 큰손자를 군관학교에 입학시키면서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들을 돌보는 등 고락을 같이하였다. 생신을 맞아 그녀는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라고 말했다. 생일선물비를 받은 곽낙원은 절약한 생활비를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그 돈을 하사하였다. 이는 청년단원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단지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임시정부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임시정부 ‘안살림꾼’을 자임하다


1900년 출생인 철부지 소녀 정정화는 동갑내기 김의한(金毅漢)과 1910년에 결혼했다. 남편은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金嘉鎭)의 아들이다. 3·1운동 와중에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 활동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은 갑자기 사라졌다. 부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국외 항일투쟁에 나섰다. 이들 망명은 그녀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며느리로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망명했다. 삼종지도를 아녀자의 당연한 미덕으로 알고 그저 따랐던 ‘나약한’ 존재였다. 신문·잡지 등을 통하여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키웠다. 정정화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 거듭나고 있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지사들을 보면서 생계유지는 가장 급선무로서 생각되었다. 생계비를 마련하려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시아버지와 남편 등과 의논한 후 임시정부 밀령에 따라 국내 잠입을 결행하였다. 상하이에서 이륭양행 배편을 이용하여 단둥에 도착하여 신의주를 거쳐 무사히 서울로 들어왔다.


기대와 달리 모금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을 만한 자산가나 명망가들은 만남조차 꺼리는 것을 느꼈다.  일가 도움으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잠입한 경로를 역순으로 다시 상하이로 향하였다. 이후에도 다섯 차례나 국내로 들어오는 등 임시정부 요인들 생계 해결을 우선적인 문제로 생각하였다. 


망명 생활에서 여성들은 자녀들을 장래 독립운동가로 키우려는 일을 ‘시대 소명’이자 책무로서 인식했다. 인성학교나 3·1유치원 운영이나 한글교육 강조 등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임시정부나 한국광복군과 관련된 대소사가 있으면 여성들을 이끌어 책임지고 치렀다.


 정정화는 천성적으로 겸손하고 부지런했다. 주위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데 선천적인 뛰어난 능력도 겸비하였다. 피난살이 속에서도 임시정부 대가족이 공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은 그녀와 같은 ‘종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임시정부의 절반을 떠받친 여성’이라는 평가는 너무나 당연하다.


1998년 8월에는 자서전 .녹두꽃.을 보완한 .장강일기.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임시정부 초기 운영된 연통제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감내한 대장정의 복원에도 크게 도움을 주는 장엄한 ‘민족 서사시’이다. 정정화 삶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동단결의 정신이다. 시종일관 김구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였으나 당파를 달리하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냈다. 


해방 후에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통일정부 수립에 동참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도지사급 감찰위원을 제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부부의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남편이 납북되는 아픔을 겪었다. ‘부역자’로 낙인이 찍혀 남모른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외아들 김자동을 올곧게 키웠다. 후손들도 민주화를 위한 여정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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