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 Theme.1 한민족 역사와 함께해온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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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증언하는 명백한 한국 영토
독도 역사 바로 세워
민족정기 일깨우고 자존심·자긍심 고취해야
글 | 최홍배(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정학부 교수)
독도는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엄연한 우리 국토이자 상징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확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 ‘과연 독도는 우리 땅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인(倭人)들의 집요한 식민사관의 잔영이 남아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추더니, 급기야는 독도마저 일본 땅이라는 한심한 망발을 늘어놓는다. 이를 두고 비애국적이다 매국적이다 하는 소모적 논쟁의 일단은 접어두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독도가 우리 땅임을 천명해 보고자 한다.
독도의 역사와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
2005년 한국시인협회 시인들이 독도에 갔다. 그때 시인 고은은 “내 조상의 담낭/ 독도/ 내 오랜 담즙으로/ 나는 온갖 파도의 삶을 살았다 (…) 내가 내 자식이 되어/ 너에게로 돌아온다/ 내 자식의 담낭, 독도 내 이름을 불러 세상 가득히 너의 천년을 전하여 왔다”고 시낭송을 했다.
일제 식민지 35년은 우리 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 영구지배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한 시기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만든 ‘식민사관’은 아직까지 남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독도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왜곡 변조한 독도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해양영토 주권에 대한 민족정신의 회복과 국민의식의 개혁은 독도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고 해양영토 수호에 앞장선 인물들이 있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로 잘 알려진 신라장군 이사부, 조선 초기 일본 왜구의 침입으로 울릉도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동해 바다 험난한 물길을 건넜던 김인우, 남회, 조민 등이 있다. 조선 중기 울릉도 수토정책을 수행한 장한상, 박석창, 한창국에 이어 구한말 울릉도에 일인의 침탈이 더욱 심해지자 현지상황을 조사하러 간 우용정, 이규원 등이 있다. 울릉도와 독도를 수호한 인물 중에 특히 기억해야 할 이름은 17세기 조선 숙종시대 안용복이다. 그는 민간외교의 선구자였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마쓰시마(松島)도 본래 우리 우산도(芋山島)라고 말하고 일본에 가서 울릉과 우산은 원래 조선에 속한다(鬱陵芋山本屬朝鮮)고 주장했다. 그는 영웅에 비길만한 사람이다”고 기술했다.
역사문헌에 나타난 대한민국 땅 독도

첫째, 일본은 “한국이 옛날부터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정부 관찬지에 우산이 독도라고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조선 후기에 “울릉(울릉도)과 우산(독도)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독도)은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松島)”라고 기술하였다.(『동국문헌비고』(1770년)·『만기요람』(1808년)·『증보문헌비고』(1908년)). 이로써 우산도가 독도이며 한국 영토임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일본은 “옛날부터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18세기 고지도인 나카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図)」(1779년)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본토와 함께 채색되지 않은 상태로 일본의 경위도선 외측에 그려져 있고, 일본의 서북 쪽 경계를 ‘울릉도와 독도가 아니라 오키섬’이라고 한 일본 지방관리 사이토 도요노부(齊藤豊宣)가 쓴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1667년)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18세기 「동국대지도」, 「아국총도」, 「해좌전도」 등에 우산도(독도)를 울릉도의 동쪽에 작게 그려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임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일본은 “17세기말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지만, 독도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693년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둘러싸고 외교 분쟁(울릉도쟁계)이 발생하였다. 1696년 1월 28일 막부는 일본인 도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 바로 직전에 돗토리번(鳥取藩)에 울릉도와 독도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질의하였다. 이에 대해 돗토리번은 “후쿠우라(福浦: 오키섬 항구)에서 독도(松島)까지 약 80리(里), 독도에서 울릉도(竹島)까지 약 40리(里), 독도(松島)는 일본의 어느 주(州)에 부속되어 있는 섬이 아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따라서 울릉도 도해금지에 독도는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다섯째,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여 독도 영유 의사를 재확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876년 일본이 지적 편찬사업을 하면서 내무성이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태정관(太政官)에 질의를 하였다. 1877년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최고 행정기관이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한 증거이다. 19세기 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무단으로 들어와 온갖 불법행위를 하였다.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은 “울릉전도와 죽도와 석도(독도)를 관할한다”는 칙령41호를 반포하였다. 이것은 우리 정부가 울릉도의 일부로서 독도에 대해 주권을 행사해 온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는 사례이다.
미래를 위해 독도수호가 중요한 이유

일본이 자국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무력행사를 통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말살한 행위였다. 만해 한용운은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변하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주역량을 갖춘 민족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아울러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고 찾아야 한다. 이들이 각계 분야에서 최고의 지도자가 되어 정의롭고 사람을 섬기고 사회를 통합하는 리더십을 보이도록 해야 한다. 예지력과 통찰력을 가진 깨어있는 우리 민족은 ‘증오와 대결’이 아니라 ‘사랑과 화합’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지구촌 사람들이 화해와 평화를 통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5대양 6대주의 ‘진정한 선구자’가 될 때 독도 운명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독도는 우리 민족의 보물섬이다. 동방의 등불이 평화로 빛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독도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