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테마

[2021/09] Theme.1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양대 산맥

페이지 정보

본문

민족주의·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전개과정


다른 노선 지향했지만

서로 적대시하지 않아…계급모순보다 민족 우선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있었지만 서로 적대하거나 경원시하지 않았다. 이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인해 많은 갈등과 분열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가장 큰 모순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민족을 강점한 데서 발생한 ‘민족모순’이었기에, 민족의 자주독립이 사회주의가 지향한 계급모순 타파보다 우위에서 작용했다.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북에 진주하지 않았다면,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상호 협조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여야를 구성하고 통일된 정부를 구성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적 장면이다.   


20여 년 전쯤 고려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아나키즘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한 적이 있었다. 일본 메이지대학 교수가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에서는 계급해방 투쟁이 미약했다”고 비판했다. 아나키즘은 1902년 도쿄대학생이었던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 1877~1954)가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 번역하면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원래는 지배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사회주의 이념의 하나로서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필자가 “일제강점기 한국의 가장 큰 모순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민족을 강점한 데서 발생한 민족모순이다. 민족모순이 계급모순보다 더 컸고, 더 근원적이었기 때문에 계급모순이 민족모순의 하위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해주었다. 일본인 교수는 “이제 이해가 간다”고 수긍했다. 


사회주의 인정했던 민족주의 계열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있었지만 서로 적대하거나 경원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에서 1917년의 러시아 10월혁명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러시아 혁명당은 처음으로 붉은 기를 높이 들고 전제(專制)를 뒤엎고 큰 정의를 선포했으며, 각 민족의 자유·자치를 인정했다. 전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였던 러시아가 일변하여 극단적인 공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세계 개조(改造)의 제일 첫 번째의 동기가 되었다.”


한국 민족주의의 대표적 인사인 박은식 선생의 이런 평가는 사회주의에 대한 민족주의 계열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사회주의자였던 이동휘가 선임된 좌우합작 정부였던 것도 이를 말해준다. 


당초 임정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당초 정부조직 등 모든 권한을 갖고 있던 의정원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일종의 내각책임제를 구상했다. 그러나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지 대통령 제도가 아니니 대통령 행세를 하면 헌법위반”이라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편지에 자신은 이미 대통령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거부했다. 정부가 분열될 것을 우려한 안창호는 대통령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국내에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해 국내로부터 활동자금을 조달하려 했는데,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여기에 이승만이 직제에도 없는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미주 교포들의 성금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면서 문제를 악화시켰다. 결국 의정원 의원들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제기해 1925년 3월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해외에서 시작된 한국 사회주의 운동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그 기원이 해외에서 시작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또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의 반영이다. 만주 북단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유동열 등의 민족적 사회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 유스테판 등의 한인 볼세비키들이 1918년 4월 28일(러시아력)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것이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결성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체코군이 반볼세비키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베리아 지역은 내전에 휩쓸리는데, 이때 김알렉산드라가 백위군에게 처형당하면서 한인사회당은 큰 위기를 맞았다. 김알렉산드라는 처형당하기 직전 “나는 볼세비키다…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때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는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을 연재해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인 볼세비키를 기렸다. 


1920년 1월 바이칼호 서쪽의 이르쿠츠크 공산당 산하에 김철훈 등이 주축이 되어 한인지부를 결성했다. 이들이 훗날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되는데,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경쟁에 나서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두 파의 파쟁이 가져온 가장 큰 비극이 ‘자유시 참변’이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둔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은 흑룡강성 밀산(密山)에 집결해 3천 5백여 명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일제의 대규모 토벌에 정면 대응하는 대신 일단 러시아령으로 들어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4천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들은 우수리강을 건너 연해주의 이만(Iman)에 집결했다가 1921년경에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집결했다. 이들의 지휘권을 놓고 이동휘 계열의 대한국민의회 문창범 등과 이르쿠츠크 계열의 고려군정의회의 오하묵 등이 다투다가 조정에 실패하자 러시아 적군(赤軍)이 무장해제에 나섰는데, 이를 거부하는 독립군들과 총격전이 발생해 다수의 독립군이 살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고려군정의회 측은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고 발표했지만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으로 다르다. 이 사건은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던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대러시아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국민대표회의 열어 임시정부 재정비 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의 재정비를 논의했다. 국내와 만주, 연해주는 물론 중국 관내, 미주 등 각지의 독립운동단체 대표 130여 명이 참가한 한국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민족대회였다. 만주지역 무장투쟁을 대표하는 김동삼이 의장을 맡은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재조직하자는 창조파로 나뉘었는데, 결국 양 파가 의견 접근에 실패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만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참의부(1924.8), 정의부(1924.12), 신민부(1925.3)를 설치했다. 이것이 ‘삼부(三府)’인데, 임시정부 직할의 참의부는 압록강 건너편 간도를 관할했고, 정의부는 그 북쪽을, 대종교가 주축인 신민부는 백두산 북쪽을 관할했다. 이들은 각각 행정부와 의회는 물론 무장 독립군부대를 갖춘 사실상의 준(準) 정부였다. 이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수많은 국내진공작전을 실시했다. 특히 1924년 5월 19일에는 참의부 제1중대에서 압록강을 따라 내려오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滕實)가 탄 배를 저격해서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국내에 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25년 4월 17일 지금의 서울 을지로(황금정)의 아서원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조선공산당은 이후 일제의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2차당, 3차당을 계속 조직했는데, 1928년 1월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라는 결정서를 전달한 이후 1930~1940년대에는 원산 출신의 이재유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경성 콤그룹을 중심으로 지하활동을 전개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분단 그리고 친일정당의 후예들


1945년 8·15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북에 진주하지 않았다면 해방 이후의 정국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상호 협조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여야를 구성하고 통일된 정부를 구성했을 것이다. 프랑스가 좌파 레지스탕스 중심으로 사회당을 결성하고 우파 레지스탕스 중심으로 인민전선을 결성해 나치를 청산하고 좌우통합의 프랑스를 건설한 것이 한국에서도 재연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해 권력을 준 결과 사회주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백범 김구 중심의 한독당까지 모두 제거되고, 분단체제에 기생하는 이승만 중심 친일세력인 독립촉성중앙회(자유당)와 김성수 중심 친일지주정당 한민당이 각각 여야로 나뉘어 정국을 독차지했다. 현재 한국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두 친일정당의 후예들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권력을 독점, 사유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 이덕일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왔다. 방송, 신문, 잡지의 기고 활동과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지식과 열정을 나누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대표 저서로 『이덕일의 한국통사』, 『이덕일의 고금통의』, 『조선이 버린 천재들』,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이 있다.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설립,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