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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 Theme.2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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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거치면서 이념적 무기로 수용


조선공산당 혁명과제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항일투쟁의 새 길 제시


한국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금기의 언어였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는 곧 ‘빨갱이’와 동일시되었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언급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주의사상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수용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었다. 3·1운동은 식민지 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 실천적 무기력함 속에서 아나키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회이념을 민족독립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게 되었다.  


홍범도의 귀환


광복 76주년을 맞아 지난 8월 1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군 스스로 ‘날으는 장군’으로 부를 정도로 명성을 떨치던 홍범도 장군은 오랜 동안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 그가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을미사변을 겪으면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함경도 지역의 산포수들과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소비에트 러시아로 건너가 소비에트 적군 내 한인 빨치산 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 1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김규식, 여운형 등 56명의 한국대표 중 1인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레닌을 면담하여 독일제 마우세르 권총을 선물 받았다. 그는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자연스럽게 1927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금기의 언어, 사회주의  


한국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금기의 언어였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는 곧 ‘빨갱이’와 동일시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는 해방 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는 양민을 학살하는 비인간적인 살인마, ‘국가에 해를 끼치는 폭력의 대상’ 즉 ‘빨갱이’로 규정되어 소탕되고 제거되어 마땅한 존재로 형상화된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해방 후 4·3사건과 여순사건에서 ‘빨갱이 사냥’은 역설적으로 국가 정체성의 확립, 즉 북한 정권에 대항하는 ‘반공’ 국가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4·3사건과 여순사건에 협력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규정하여 국가폭력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국민이 형성되었다. 


더욱이 한국전쟁 시기 보도연맹을 비롯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은 한국사회에 반공을 더욱 내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언급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비극적 현대사 속에서 사회주의운동은 연구의 대상에서조차 외면되거나 금기시되어 왔다. 사회주의 운동이나 이론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조차 불온시되었다.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국내에 사회주의가 소개된 것은 이미 1884년 1월 18일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유럽의 사회당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가 이루어졌고, 1899년 5월 12일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백이의(白耳義, 벨기에) 사회주의와 사회당에 대한 사건이 언급된 바 있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에는 외국의 아나키스트의 테러활동에 대한 기사가 소개되고 있었다. 이 시기 소개된 사회주의 사상은 맑스주의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길드사회주의, 페이비어니즘 등 복잡다기한 조류들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상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수용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었다. 3·1운동은 식민지 민중에게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3·1운동 직후 작성된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와 1920년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 등에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결과에 따른 세계사의 새로운 전개를 언급하고 있었다. 또한 3·1운동 직후 조직된 ‘조선민족독립대동단’은 1919년 9월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사회주의를 철저적으로 시행한다’는 노선을 내걸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수많은 운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기성회와 조선노동공제회 등은 전국에 존재하는 노동, 농민, 청년단체를 망라하는 위상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이들 내부에는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1920~1922년은 국내에서 민족주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등이 혼재되면서 그 내부에 분화과정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이 무렵 일간지와 정기 간행물은 유물사관, 소비에트 혁명정부와 레닌에 관한 기사를 종종 다루고 있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무려 61회에 걸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표제 하에 그의 일생, 활동, 볼셰비키혁명 등을 연재하였다. 1920~1922년 무렵 국내에서 발간된 <개벽(開闢)>, <공제(共濟)>, <아성(我聲)>, <신생활(新生活)> 등 잡지에는 맑스의 계급, 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사상과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등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이 소개되었다. 


이와 같이 식민지하에서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의 이념은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1차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혁명운동의 영향, 민족자결주의론에 대한 자각 등의 국제적 조건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적·계급적 모순의 첨예화, 3·1운동 이후 정치의식의 고양 등을 계기로 국내 신문, 잡지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수용되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 실천적 무기력함 속에서 아나키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회이념을 민족독립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게 되었다. 


김사국, ‘국민대회사건’ 이후 사회주의자가 되다  


1892년 충남 연산 출신 김사국은 1904년 6월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안국당과 동생 김사민과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서 불교와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그는 보성학교를 수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한성중학을 마치고 만주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3·1운동 직전 김사국은 서울에 와서 한남수, 홍면희, 이규갑 등과 ‘국민대회사건’을 주도하다가 일제가 1919년 4월 15일 제정한 「제령(制令)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당시 김사국은 13도의 국민대표로서 조직된 국민대회를 통해 임시정부인 ‘한성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실행하려 하였다. 즉 그는 보신각 앞에서 노동자 수천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부르고, 봉춘관에서는 13도의 유지가 회합하여 국민대회를 열고, 그 봉춘관 앞에 국민대회의 간판을 달고 임시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기독교, 천도교, 불교, 유림 대표, 일부 지역 대표 20여 명이 모임을 갖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국민대회사건’으로 1년 6개월의 형을 살고 1920년 9월 출옥한 김사국은 1921년 1월 서울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서울청년회는 청년단체였지만 사실상 점차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한 ‘사상단체’로 바뀌어 갔다. 이 무렵 무산자동지회, 신사상연구회(이후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등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지향하는 단체인 ‘사상단체’들이 만들어졌는데 서울청년회도 그러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사상단체’들은 국외의 사회주의 전위조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국내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려는 활동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고 계급해방을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청년회 출신인 김사국이 1924년 3월 코민테른에 보고한 문서 「조선내 공산주의조직의 발생과 활동 약사  КИМСаКук, BO ИККИ, доклад No. 1 Краткий исторический обзор возникновения и деятельности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организации в Корее, 1924.3.17」 중  「조선 내 공산주의운동의 발생과 분화」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독립단’의 모든 성원들은 1921년에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문화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마르크스-공산주의자들’ 등 독자적 사상을 가진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독립단, 아마도 ‘조선민족대동단’이 문화주의자, 아나키스트, 사회(공산)주의자 등으로 분화되어 갔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김사국은 1922년 10월 이영, 김영만, 임봉순 등과 서울청년회 내에 ‘공산주의그룹’을 창립하고 1923년 2월 그룹의 이름을 ‘고려공산동맹’이라 하고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 승인을 받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는 1923년 3월 간도 용정(龍井)에서 김정기, 방한민 등과 반일 교육기관으로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피신하여 영안현 영고탑에서 대동학원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일제의 방해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 김사국은 1924년 5월 폐병이 걸린 상태에서 귀국하여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나 1926년 5월 35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동지이며 부인인 박원희는 그의 유지를 이어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상설론을 주장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결국 그녀 또한 1928년 1월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역사적 재조명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은 일제로부터 독립과 해방이 1차적 과제였다. 1925년 4월 17일 창립된 조선공산당의 조선혁명의 과제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혁명이었다. 따라서 민족주의계열과 연합하여 신간회 등 반제통일전선체를 만들어 일제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은 치안유지법에 의해 처벌받았다.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國體)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 또는 정(情)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치안유지법에 의해 일제의 천황제를 부정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향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한 사회주의운동은 처벌되었다. 1925년 5월 공포된 치안유지법에 의해 검거된 인원은 해방 직전까지 대략 2만여 명이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운동 관련자였다. 그동안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되어왔다. 앞으로는 신청주의가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역사 속에서 그들의 고투(苦鬪)가 잊혀지지 않도록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비(非)국민, ‘빨갱이’가 아니다. 과거 냉전과 반공시대의 사고 속에서 벗어나 이제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전명혁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 중이며 역사학연구소 소장,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부관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근현대 사회운동사 전공으로 최근 사상사, 법제사, 기록과 역사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운동연구』,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공저) 등이 있으며, 「1920년대 ‘사상사건(思想事件)’의 치안유지법 적용 및 형사재판과정」(2019), 「1960년대 ‘동백림사건’과 정치사회적 담론의 변화」(2012), 「1960년대 ‘1차인혁당’ 연구」(2011)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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