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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 Theme.3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전선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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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공 협동’으로 성사된 신간회운동


정치 이데올로기 내려놓고

민족주의 공동목적 위해 공감과 포용의 폭 넓혀


1927년 일제에 대한 비판과 비타협적인 전략에서 정치적 자주의식이 또렷했던 국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당시 신간회의 창립과 운영에 적극 참여했던 민족지도자들은 노선과 성향이 다양했지만 일제의 속박과 차별에 대해 공유했던 비판적 문제의식에 따라 ‘민족유일당’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호 절제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공감과 포용의 폭을 넓혔다. 사회주의 진영은 이데올로기적 좌우 구별보다 반제국주의적 항일 여부에 입각한 좌우 구별을 더 우선시하면서 민족구성원 내의 어리석은 불협화음을 조성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간회운동은 민족진영, 특히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좌익’의 주도적인 리더십에 의해 추진되었고 공산당 및 사회주의 진영이 전략적으로 합세함으로써 ‘민족단일당’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성사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소위 ‘문화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한민족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차별정책을 노골적으로 강화하면서 민족분열공작을 지속했다. 그렇지만 기미독립혁명(3·1독립선언과 만세시위 그리고 통합 상해 임시정부 출범)으로 희망을 갖게 된 한국인들은 각종 문화적·학술적 계몽활동을 더 많이 전개했는데, 이는 1920년에 나란히 창간되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경쟁적으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었다. 원래 실력양성운동은 1907년 신민회가 제시했던 독립방략의 하나였는데, 두 신문사들은 계몽, 문맹퇴치, 신문물 소개, 민립대학 설립, 그리고 물산장려운동 등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대한제국 말기에 좌절되었다가 기미독립만세시위 이후 한규설, 이상재 등 백여 명이 앞장서 재추진했고, 후에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합세하여 1923년 3월에는 약 1천 명의 인사들이 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국민 모금운동에 나섰다. 이에 총독부는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어 민립대학운동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또 물산장려운동은 대한제국기의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는데,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 등이 처음 주도하였고, 1923년에는 서울에서 “조선인이 만든 것을 입고 먹고 쓰자”는 슬로건 하에 국산품 애용, 소비절약, 금주, 금연 등의 생활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0년대 한민족의 항일운동은 이 같은 교육계몽과 생활개신운동에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분열과 말살을 기도했던 일제의 간교한 ‘문화정치’의 실상에 대한 폭로가 계속되었고, 동양척식회사에 의한 농토탈취와 일제와 결탁한 지주들의 횡포에 대한 소작농들의 저항과 투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 배경에는 물론 조선공산당, 조선노농총연맹, 조선농민총동맹 등도 있었다(김운태, 2002: 373-374). 이때 지식인들도 현안 비판투쟁에 적극 나섰는데, 예컨대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논리와 기백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공개비판하고 민족정기를 세워 투쟁할 것을 역설했다. 


안재홍은 ‘살기(殺氣)에 싸인 문화정치(文化政治)’란 사설에서 “문화정치의 음험한 내막”이 이미 “그 본색”을 드러내 “온갖 불의와 비도를 자행”하고 있으나, 시대는 이미 “피압박민중의 해방의 투쟁을 고조하는 시대”이니 일본은 배타적인 “도국근성”을 버리고 아시아 각 민족이 서로 원수 지음이 없이 “자주자립”하는 길로 나아가는 추세에 동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선집 1: 46-48). 또 동양척식회사가 토지조사 사업을 벌이면서 조선 내 각종 농토를 농민들로부터 탈취하고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만주로 떠나는 일이 발생하자, ‘농민도의 고조’란 사설을 써서 이제 “조선인의 전장(戰場)은 밭두둑과 논두렁과 창고마당이 되어야한다”고 선언했다. 전 인구의 약 8할이 농민임을 들어 이제는 노동을 천시했던 과거의 “서생도”가 아니라 “농민도가 조선인 생활의 표준과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떠한 경우든 우리 땅은 뺏기지 말고 우리가 농사지어야 하고 누구든 이를 “장해하는 어떤 놈들이고 부숴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할 노릇 다해 보고 쓸 재주 다 써보고 부릴 부지런 다 부려보아도 끝끝내 생활할 수 없고 자꾸만 쫓겨 갈 밖에 없고 헤어져 없어질 밖에 없는 형편이면 덩어리가 되어라. 문문히 가지 말아라. 조선이란 우리의 나라이다. 온갖 것에 우선권이 있다. 땅에고, 공장에고, 산에고, 바다에고, 직업에고, 의식에고, 조선인이 반드시 또 마땅히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 이런 것에 발바투 덤벼서 요구하고 싸우고 지키고 찾아오고 그것이 모두 틀리는 곳에 더욱 큰 가장 무서운 방책을 채용하는 것이 농민도의 본질이다(선집 1: 181-183)”라고 역설했다.


비타협적 전략에서 출발한 신간회


일제에 대한 이 같은 비판과 비타협적인 전략에서 정치적 자주의식이 또렷했던 국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 바로 신간회(新幹會)였다. 1927년 1월 19일 창립 발기인 회의를 거친 뒤 그 발기인으로 김준연, 권동진, 이갑성, 이승복, 문일평,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조만식, 한기악, 한용운, 홍명희, 이종린, 이상재 등 당시 각 분야의 대표적 인사들이 참여했다. 발기인 대회 바로 다음날 창간되었던 .현대평론.에서 김준연, 백남운, 안광천, 홍명희는 당시의 자치운동을 “일본의 정치낭인과 조선의 협정배가 꾸민 합작품”이라고 비판하고, 신간회는 “민족운동의 표면운동단체”로서 장기적으로 지속되어야 할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어 2월 15일 조선일보의 이상재를 회장으로 권동진과 신석우를 부회장으로, 그리고 안재홍과 이승복 등 여러 인사들이 실무간사를 맡으면서 신간회가 발족되었던 것이다(김인식, 2012: 75-108 ; 성주현, 2012: 109-148). 1919년 기미독립혁명 이후 한국민족운동의 핵심 고리였던 신간회 운동은 다음과 같은 성격의 정치적 결사로 조직되고 추진되었다.


첫째, 신간회는 당시 국내외 한민족 구성원 각 개인들이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유롭게 참여하여 조직된 자발적인 결사체였다. 창립 당시 신간회 강령은 “조선인 된 자가 누구나 진지한 고려를 요할 시대의식을 대표한 자이다”라고 공포했으며, 강령의 첫머리를 “우리는”이라고 함으로써 자유의지로 나선 개인들의 총의를 묶었다(이문원, 2012: 201). 그리고 신간회가 발족한지 열 달쯤 지나 국내 각처에 약 104개의 지부가 결성되었을 때, 안재홍은 「조선일보」에 ‘신간회의 급속한 발전: 지회설치 일백돌파’란 제목의 사설(1927.12.13)을 통해 신간회는 한가한 지식인의 철학이나 종교적 계시에서가 아니라, “오직 대중과 그 선구자들이 각자의 피 끓는 투쟁”을 각오하고 “존귀한 생존의식”에서 “뼈아픈 체험”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단정했다(선집 1: 248-250). 


지방지회와 회원은 계속 늘어 1931년 당시 지부가 경남에 19곳을 비롯해 경북 18, 전남 14, 함북과 함남 각각 10, 경기 9, 전북 8, 강원과 평북 각각 7, 황해도와 충남 각각 6, 충북 5, 평남 3 등 전국에 모두 122개가 설치되었다. 일본의 도쿄, 나고야, 쿄토, 오사카에도 지회가 있었다. 지회가 많을 때는 전국에 140여 개 회원이 약 4만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그 대중적 기반이 충실했다(水野直樹, 1987:86, 108). 해외에서는 최초로 1927년 4월 28일 만주 용정(龍井)에 간도지회가 세워졌고(신용하, 2007: 134-136), 상해에서는 조소앙, 이동녕, 안창호, 홍진, 이시영, 김구, 조완구, 구연흠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국내의 신간회운동에 호응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조소앙을 상임위원으로 선임했다(삼균학회, 1989: 10).


한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참여


둘째, 신간회운동에는 한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직업, 성별, 신분, 종교, 이념 등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이 평등하게 참여했다. 먼저 직업별 분포를 보면, 농어업과 목축이 54.19%(2만 2천여 명), 노동자·직공이 23.8%(6천여 명), 상업 10.8%(4천 3백여 명), 공업 1.7%, 회사원과 은행 1.19%, 도시 인텔리(기자, 의사, 간호사, 저술가, 교원, 교육자, 대서 등) 5.0%, 여관·이발소·사진 등 서비스업 6.05%였다. 이리하여 당시 신간회는 “전 조선의 지식계급, 농민, 심지어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아직 버리지 않은 양반층까지 포괄하여 거대한 세력을 형성(동아일보, 1930.1.10)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간회 운동에는 조선일보계 인사들, 기독교계, 불교계, 천도교 구파계, 재야유림계, 학계, 사회주의계의 화요회, 북풍회, 서울청년회 등의 지도자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유영준, 김활란, 최은희, 주세죽 등 여성 엘리트들은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여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셋째, 당시 신간회의 창립과 운영에 적극 참여했던 민족지도자들은 노선과 성향이 다양했지만 일제의 속박과 차별에 대해 공유했던 비판적 문제의식에 따라 ‘민족유일당’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호 절제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공감과 포용의 폭을 넓혔다. 즉, 그들은 반제국주의적 비타협적 항일노선에서 신간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던 자치론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포용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에 따라 그 투쟁대상이 우선은 조선총독부였기 때문에 신간회에 참여했으며, 그러면서 굳이 자신들의 소속이나 신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신간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 좌우 구별보다 “반제국주의적 항일 여부에 입각한 좌우구별을 더 우선시(안대홍, 1925: 천관우, 1981.10)”하면서 민족구성원 내의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미리부터 지적하거나 표명하여 어리석은 불협화음을 조성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간회운동은 민족진영, 특히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좌익’의 주도적인 리더십에 의해 추진되었고 공산당 및 사회주의 진영이 전략적으로 합세함으로써 ‘민족단일당’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성사되었다(김인식, 2012: 75-108 ; 성주현, 2012: 109-149). 그리고 허헌은 당시 대표적인 ‘민족변호사’로 신간회 후기 회장을 맡았었고 주변의 민족지도자들과 자연스럽고 격의 없이 지내던 사회주의계열의 지도자였다(허근욱, 2001: 279-295).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신간회가 소부르주아의 집단이 아니고, 당시 노농대중을 적절하게 대표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해소보다는 오히려 조직적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김기승, 2018: 263-290). 


민족주의 차원의 공동목적 위해 소통·협력


넷째, 당시 항일 차원의 여러 가지 ‘민족적 현안(national issues)’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으며, 민족운동과 관련 있는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소식을 적극 전파했다. 신간회 중앙본부에서는 파업 등 노동운동 지원, 광주학생운동 등 학생운동 지원, 미국 기독교 지도자 등 내외 저명인사 초청 강연회 개최, 재만동포 실태 등 각종 진상보고회 개최, 언론·출판·집회·결사 탄압 규탄, 청년동맹과의 연합활동 지원, 산림조합 사건 지원, 전국노동운동 지원, 조선인 본위 교육운동 지원 등을 실천했다. 또 지방의 지회들은 서로 소통하며 지회의 운동방침 제정,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과 연락, 철산·익산 지회 사건 지원, 조선총독부 폭압정치 반대운동, 일본 수상에게 재일 한인노동자의 국내송환 항의 전문 발송, 인권변호사에게 격려 전화하기 캠페인, 동양척식회사의 일본인 이민 반대운동, 소작쟁의 지원, 일제의 지방행정 규탄 등의 활동을 펼쳤다(신용하, 2007: 173-252).

다섯째, 일본제국주의의 비민주적 인권유린과 억압정책을 비판하고, 근대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즉, 신간회의 지도자들은 전국을 다니며 동척과 같은 조선인 착취기관 철폐,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사상연구의 자유 요구, 조선인 중심의 교육정책 등을 요구하고 소작쟁의와 동맹휴학 등을 지도했다(서중석, 1991: 115). 그리고 일제에 대한 비타협노선으로 민족독립을 변함없이 추구함과 동시에 비폭력적 방법으로 자유기본권 허용과 민주적 제도 도입, 일제에 기생하는 봉건지주 타파, 형평사 사원과 노복 및 여성의 신분해방, 인신매매와 공창제 및 강제결혼 폐지, 미신타파, 허례허식 타파, 풍속개량 등을 요구하고 추진했다(김운태, 2002: 279). 

 요컨대, 신간회운동은 존경받는 민족진영 인사들이 주도하고 이에 동조했던 공산진영의 활동가들이 동참하는 이른바, ‘민·공 협동’을 성사시켜 ‘민족유일당’의 조직을 향해 대동단결했던 대중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각기 정치 이데올로기적 구별이나 대립보다는 각자 반제국주의 항일 독립투쟁이라는 민족주의 차원의 공동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소통하고 협력했다. 

따라서 신간회운동을 ‘좌우합작’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민족진영 인사들이 주도하며 공산당 및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가들을 포용했던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 신간회운동은 한민족사상 최초의 자유주의적 시민혁명이었던 기미혁명의 정신과 역사를 주도적으로 그리고 포용적인 자세로 이어가며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주의적 개혁의 길을 부단히 추구했던 한국근대사의 주요 분기점이었다.


필자 정윤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로 있다가 2019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정치학회, 현대사상연구회,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다사리국가론: 민세 안재홍의 사상과 행동』를 비롯해 『정치리더십과 한국민주주의』, 『한국정치리더십론』, 『한국정치사상의 비교연구』(공저), 『세종의 국가경영』(공저), 『유교리더십과 한국정치』(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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