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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 Theme.4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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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할 수 없는 최종 목표는 ‘조국독립’


대일투쟁 국한하지 않고 

해방 후 민족·민주국가 건설 건국방략의 청사진 제시


식민지 시대에서 현재까지 갈등과 대결의 족쇄처럼 되고 있는 좌우의 이데올로기는 따지고 보면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상수의 하위변수에 불과하였다. 마치 말의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려는 격이었다. 개인이나 단체에서 ‘이념’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국익이나 민족에 우선할 수 없는 노릇이다. 1935년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방점이 찍히는 최대 규모의 좌우연합 정당인 민족혁명당 창립이 이루어졌다. 조국독립과 민족·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헌신했던 통합의 대가들은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무지개 색깔의 이념과 정책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진영)들은 가히 무지개 색깔의 이념과 정책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봉건왕조에서 곧바로 일제 식민지배로 전락하면서 그리고 서구의 공화주의와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이념과 정책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으로는 전통유학과 개신유학, 위정척사와 신진개화, 기독교의 전래와 동학·대종교 등 민족종교, 의병과 보황주의 등에서 파생된 현상이었다. 출신이 다양함으로 이념이 다양한 것은 당연한 이치에 속한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독립운동 진영은 크게 두 갈래로 분류되었다. 민족주의와 사회(공산)주의 진영이 그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만만치 않았고, 이들은 대부분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투쟁하였다. 보황주의와 자치론은 그 반시대성과 투항주의로 인식되면서 점차 소멸되거나 배척당하였다. 


항일독립운동의 주류는 민족주의 세력이다. 조국독립이라는 목표에 가장 충실한 집단이다. 임시정부가 그 중심축이었다. 여기에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집권한 레닌 정부가 노동자·농민해방과 피압박 민족자결주의를 내걸면서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이를 수용한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최종 목표 역시 조국독립이었음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조국독립’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가치를 사회주의(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이 땅에서 홀대를 받거나 배척 또는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분단사의 비극이고 이데올로기 싸움의 희생자들이다. 어느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하고도 독립된 조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홀대당한 것은 누군가의 지적대로 “한국현대사는 역사가 아닌 정신분석학의 영역”이기 때문일까. 


식민지 시대에서 현재까지 갈등과 대결의 족쇄처럼 되고 있는 좌우의 이데올로기는 따지고 보면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상수의 하위변수에 불과하였다. 마치 말의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려는 격이었다. 개인이나 단체에서 ‘이념’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국익이나 민족에 우선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100여 년의 우리 역사에서 독립을 위하여 두 차례, 좌우통합과 좌우연합이 이루어지고, 해방 후 분단을 막고자 남북협상이 한 차례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성공사례를 살펴본다.

 

좌우통합 이룬 민족혁명당의 면면  


날로 광폭해져가는 일제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민족운동진영의 통합으로 혁명역량을 강화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해외의 민족진영은 이념·지역·인맥·항일전의 방법론 등으로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각 조직과 단체들의 결성시기와 지역, 인적구성과 긴박하게 돌아가는 대륙의 정세 등 여러 가지 상황의 복합적인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적(大敵)을 상대로 하는 전선에서 분산된 조직으로는 성과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도 일부 보수우파 세력의 집단일 뿐 좌파나 중도계 인사들을 불러 모으지 못한 상태였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그나마 많이 달라졌지만 임시정부에는 여전히 우파 진영의 일부만이 참여하고 있었다. 


김규식을 비롯하여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 후반기부터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1929년 12월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동년 7월 북만주에서 독립당이 각각 결성되었다.


이러한 지역별 당 조직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김규식·안창호·이동녕·최동오 등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에서 독립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중국침략이 급속도로 진전되자 1932년 10월 상하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통일동맹’은 1934년 3월 동당 제2차 대표대회에서 ‘단일대당(單一大黨)’ 결성안이 의결되면서 좌우 진영 통합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34년 3월 1일 열린 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는 일단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신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4월 12일 통일동맹 중앙상무위원인 김규식, 한국독립당 대표 김두봉·이광제, 조선의열단 대표 김원봉·윤세주·이춘암,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김학규, 만주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한 신한독립당 대표 윤기섭·이청천·신익희 등 11명이 통일동맹 3차 대회를 열고 민족혁명당의 창당을 결의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방점이 찍히는 최대 규모의 좌우연합 정당인 민족혁명당은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중국 난징시 금릉대학 대례당에서 창당대회를 열어 독립운동 진영의 오랜 숙원을 현실화시켰다. 


김규식이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다양한 계파가 참여한 민족혁명당 창당의 주역들이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포용력 있고 의회주의자인 그를 대표로 선임한 것이다. 실권자는 당세가 강한 의열단의 김원봉이었으나 당대표는 김규식이 맡았다.  


민족혁명당은 「당의(黨義)」에서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서 구적(仇敵) 일본의 침탈세력을 박멸하고 5천년 독립 자주해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국민 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선언했다. 조소앙의 3균주의 원칙을 수용하였다.


민족혁명당은 창당이념을 민족혁명과 민주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여 ‘조선혁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어서 민족혁명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전복과 민족자주 정권의 건립’을, 민주주의혁명은 ‘봉건유제의 완전 숙청과 인민자유정권의 건립’을 내세웠다. 또한 ‘혁명원칙’은 “민족의 자주독립 완성, 봉건제도 및 반혁명세력의 숙청과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건설,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과 민족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 건립”이었다. 


민족혁명당은 대일투쟁과 독립에만 국한하지 않고, 해방 후의 민족·민주국가 건설을 내다보면서 건국방략의 청사진을 내걸었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일제 패망 직전에 제시했던 「건국방략」의 모태 역할을 하게 된다.


김규식이 민족혁명당을 떠나면서 당은 심각한 내분으로 진통을 겪었다. 1936년 2월 조소앙이 탈퇴하고, 1937년에는 최동오·홍진·이청천 등 조선혁명당 계열이, 1938년에는 최창익 계열이 이탈하면서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 계열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로써 당초의 좌우연합체는 다시 깨어지고 분열로 나타났다.


임정 좌우연합정부 수립에 성공  


임시정부는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싸울 수 있는 전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광복군은 중국 측의 ‘한국광복군 9개준승’에 묶여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조선의용대와 양분된 상태였다. 


긍정적인 조짐도 보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2월 10일 좌파 진영인 민족혁명당이 제6차 대표자대회에서 내외 정세의 변화 이유를 들어 임시정부에 참여할 뜻을 천명하였다. 민족혁명당은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폴란드·네덜란드·프랑스 등의 반파시스트 망명정부가 수립되고 연합국이 그들을 원조하면서 한국의 임시정부도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동안 일관되게 임시정부를 부정해온 조선민족해방동맹도 정세의 변화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이 제고되면서 임시정부 옹호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동안 이념·노선의 차이로 분열되었던 좌우 독립운동 진영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속하게 된 것이다. 


1942년에 실현된 독립군 진영의 군사통일은 황하 이남의 군사력이 모두 광복군으로 통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사통합은 곧 정치통합으로 이어지고, 정치통합은 강력한 대일항전의 전력증강으로 발전해야 했다. 하지만 전시체제의 임시정부에서는 노선과 사소한 문제로 여전히 갈등 양상을 빚고 있었다. 


11월 27일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는 최초의 선언으로, 전후문제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중·미·영 삼국 수뇌의 선언이 전해지면서 임시정부는 이를 즉각 환하였다. 카이로선언은 그동안 분열과 대립을 거듭해온 독립운동계에 자극제가 되었다. 공전을 거듭하던 임시정부 의정원회의가 정파 간에 타협의 분위기로 돌아선 것도 정세의 변화에 힘입은 바 컸다. 


각 정파는 1944년 4월 의정원회의를 열어 ‘임시헌장(헌법)’을 개정하여 통과시켰다.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여 비상시국에 대처하도록 하면서 김구를 주석에 연임시켰다. 행정부는 국무위원회와 행정연락회로 이원화하였다. 국무위원회에는 독립운동의 영수들과 각 정당의 대표자들을 안배하여 정책결정의 기능을 갖도록 하고, 정책집행과 행정사무는 주석이 임면하는 각 부장들이 맡도록 하였다. 정쟁을 완화하기 위해 마련한 타협의 소산이었다. 


또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외교 분야에 능력을 갖춘 민족혁명당위원장 김규식을 뽑고 역시 같은 당 핵심인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선임하였다. 좌우파의 안배가 크게 작용한 인선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좌우 정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망라하여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독립당, 민족혁명당, 해방동맹, 아나키스트들까지 참여한 것이다. 좌우합작 정부수립에 성공한 임시정부는 4월 24일 4대 정당 연명으로 ‘각 정당 옹호 제36차 회의선언’이란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첫째, 우리 4당은 이번 개정한 임시헌장을 전 민족 행동의 최고준승을 위하여 솔선하여 준수, 봉행할 것을 확인한다. 

둘째, 우리 4당은 신임 정부주석 김구 선생 및 전체 국무위원은 우리 민족의 최고 영도자로서 우리는 당연히 솔선하여 성심 옹호할 것을 확신한다.


셋째, 우리 4당은 임시정부 기치 하에 전체 민족을 단결·동원하여 일본제국주의자에게 대항하여 최후의 결전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넷째, 우리 4당은 중·영·미·소 등 동맹국 및 전 세계 일체의 정의인사들의 동정과 원조를 얻고 더욱 최단시간 내에 임시정부의 승인과 유력한 국제원조를 얻기 위하여 적극 노력한다. (후략)

 

임시정부의 강화는 내외 동포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재미 동포들이 앞 다투어 축전을 보내고 각지에서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중국정부와 조야에서도 우정 어린 축하의사를 표시하였다.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주가화는 임시정부 주석·부주석과 국무위원, 각 부장들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베풀고, 입법원 원장 손과도 임시정부의 신임 요원들에게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또 중국공산당 대표 동필우와 임조항이 축하연을 베푼 데 이어 중국 국민당의 오철성·진과부·양한조 등 지도자들도 축하연을 열고 임시정부의 대동단합을 축하하였다.  


필자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 제주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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