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 끝나지 않은 전쟁, 지역감정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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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 우리의 역사 바로 세우기
2-3.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 바로 세우기, 어디부터 출발해야 하나?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이 정답이다
글 | 김순은(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서 영호남 갈등으로 상징된 지역감정은 해묵은 화두인가? 매번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지역감정의 프레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우리나라 정치 근현대사 속에서 지역감정을 악용하며 우리 공동체를 분열시킨 과거 정치사와 리더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건강한 지역 공동체의 힘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을 탐구할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 스스로에도 지역감정의 역사와 지역 이기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지역감정,
정치·역사적 차별이 낳은 문제아
종교와 종족 간의 차이가 아님에도 특정 지역에 대한 역사적 차별이 낳은 지역감정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관동과 관서,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 간 지역감정을 들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603년까지는 주로 권력의 핵심부는 관서지방이었다. 나라, 교토, 오사카 등 관서지방이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이었다. 천황은 1868년 동경으로 천도하기까지 나라와 교토에 거주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권력이 그의 아들로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넘어갈 때까지 오사카가 중심이었다.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은 오사카에서 동경(당시 지명 에도)으로 넘어갔다. 관서와 관동지방 간의 지역감정은 이러한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역감정은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의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은 1811년 대흉년을 계기로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세조 때 김종서의 심복이었던 이징옥과 이시애 등이 일으킨 반란을 계기로 함경도 지역에 차별이 시작되었다. 중앙에 대한 반감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함경도에서는 의병이 출현하지 않았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연상되는 지역은 호남지역에 대한 차별로서 영남과 호남 사이에 야기되는 정서적 갈등을 의미한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감정의 해소를 위한 선거구 개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호남지역에 대한 차별은 고려 왕건의 훈요10조로부터 연유한다. 고려왕조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후백제의 강력한 저항이 그 지역에 대한 악감정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호남지역에 대한 지역차별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19세기 말 대원군의 대일항쟁 요청에 호응하였던 동학군이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근저의 지역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 감점기에 함경도를 중심으로 독립군이 다수 구성된 것도 지역 간 차별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영・호남 간 지역감정은 주로 1970년대 현대 정치과정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를 둘러싸고 후보자 간 대립이 지역감정으로 표출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지역감정에 의존하였다. 1991년 이후 개시된 지방선거에서도 특정지역에서 특정정당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 지역감정이 지방선거에도 나타났다.
1987년 6‧10 항쟁을 통하여 획득한 대통령 직선제 헌법이 1987년 10월 29일 공포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결과에서도 지역감정이 그대로 투표에 반영되었다. 영남과 호남지역에서 지지 후보가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지역감정 완화하는 기장 효율적인 방안은
바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연방제 수준의 전통을 가졌던 일본은 19세기 말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단체자치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군국주의 하에서 중앙집권은 더욱 강화되어 태평양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제2차 대전 이후에는 기관위임사무, 지방사무관제도, 필치규제를 통하여 민주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1960년 산업화 과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동경권과 비동경권, 특히 관동과 관서의 격차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동경시의 인구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동안 오사카시는 1965년 316만을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왔다. 관서지방의 상공인과 언론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지방분권을 주장하였다. 특히 일본 주요 일간지 중의 하나인 아사히신문은 오사카 거점 신문사답게 지방분권과 관련된 이슈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1999년 이루어진 제1차 지방분권일괄법의 성과에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 운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영국도 지역감정을 지방분권으로 대처한 국가 중의 하나이다. 영국은 역사적으로 웨일즈, 스코트랜드, 잉글랜드 지역 간 종족 및 문화의 차이로 갈등이 빈번하였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 통합 이후에 갈등이 더욱 커졌다. 1960년 대 이후 갈등이 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 대안이 스코트랜드 지역에 연방제 수준의 스코트랜드 정부를 수립하여 완전한 자치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1979년 실시된 주민투표는 스코트랜드 정부의 수립을 부정하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치권 확대 및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다. 1997년 총선거에서 스코트랜드 지역의 자치권 확대를 공약한 노동당이 집권함으로써 주민투표를 거쳐 2000년 스코트랜드 지역에 연방제 수준의 자치권이 확대된 스코틀랜드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도 자치분권을 통하여 지역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미합중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미국은 건국 당시에도 인구의 규모, 종교, 경제적 특색 등 주 사이에 차이점이 컸다. 이러한 차이와 특징은 연방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인구가 많은 주와 인구가 적은 주 사이에 정부의 거버넌스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인구가 많은 주는 인구 비례에 의한 대의 민주제를 옹호한 반면 인구의 수가 적은 주는 주의 주권을 강조하여 자칫 다수의 독립국가로 분리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주주권(州主權)에 기초한 분권적인 연방헌법이 갈등의 해결책이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인구 4,000만의 캘러포니아나 인구 57만의 와이오밍이 동일하게 상원의원 2명씩 선출하고 있다. 주주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주민주권에 기초한 주민자치 강조
우리 민주주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 가능
우리나라도 1991년 지방자치의 부활, 1999년 이후 지방분권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991년 재개된 지방자치는 관권선거를 방지함으로써 여‧야간의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였다. 1999년 이후 시작된 지방분권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지역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였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제도적인 관점의 지방분권에 관한 논의가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앙의 권한이 축소되고 가용재원이 지방으로 크게 이양되면 자연스럽게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지역 간의 갈등은 크게 축소될 것이다. 항상 중앙정부 및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인식하는 지역에 권한과 자원이 확대된다면 갈등의 접점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어 종전의 지역 간 갈등이나 지역감정은 크게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무엇보다 주민주권에 기초한 주민자치를 강조하고 있다. 1991년 재개된 지방자치는 주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단체자치였다. 대표자들 통한 간접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주민의 참여와 숙의는 크게 주목을 받지 되었다. 이제는 주민들이 지역의 주인으로서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는 훈련을 거듭하게 되면 성숙된 민주의식으로 지역감정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주민주권에 기초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강화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나아가 지역감정이 들어설 공간을 크게 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