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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 Theme.1 일본군의 간도 대학살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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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간 지속된 ‘불령선인 초토계획’


항일 근거지 지목된 마을·학교·교회 불태우고

천인공노할 학살 자행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지속되고,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패한 후 일본군 수뇌부는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일대 탄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혼춘(琿春)사건’을 조작하여 ‘간도출병’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독립군의 ‘청산리 독립전쟁’이 10월 말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서 전개되었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1921년 5월까지 8개월에 걸쳐 북간도(중국 연변) 및 남만주의 서간도 지방에서 대대적 한인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간도 대학살’이다.  

일제의 한인 학살 진상규명 필요성

1910년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의 패망 전후 시기, 즉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나 일본 경찰, 일본 민간인 등에 의해 자행된 한국인 학살 사례는 부지기수일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참혹한 피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았고, 제대로 가르쳐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왜곡되거나 무시되기도 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해 이러한 피해의 진상규명과 피해 보상·배상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86년 미국에서 출판되고, 2005년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던 『요코 이야기』는 일본인들이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묘사되어 큰 문제가 되었다. 또 2019년 『반일종족주의』라는 문제의 책 편찬을 주도했던 이영훈(전 서울대 교수)은 일제가 한국인을 거의 광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이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은 조작이라고 단정하고, 식민지시대에 관한 한국의 역사학 자체가 ‘반일종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국내외 각지에서 일본 군경이나 민간인들이 인종적 편견이나 헛소문, 과도한 군국주의적 사고방식과 천황에 대한 맹목적 충성의식 등으로 한국인(조선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근래 확인된 대표적 사례만 보아도 1945년 8월에 중국 해남도(하이난섬)에서의 한인 1,200여 명 대학살,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학살, 사할린 미즈호마을과 가미시스카 경찰서에서의 일본 군경, 민간인들의 학살 사례 등이 확인되었다. 물론 국내에서도 의병 탄압과 3·1운동 탄압과정에서 많은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3,5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한인들이 학살된 1920년 말의 ‘간도 대학살(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 1920년 4월 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지의 일본군에 의한 4월참변, 1923년 9월 초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의 한인 6,600여 명 학살, 그리고 1919년 3·1운동 탄압 시 자행된 수원 제암리사건(4.15)과 평안남도 맹산 3·1운동 탄압사건(3.10) 등은 일본 군경이 저지른 대표적 학살 사건이었다. 특히 제암리 학살보다 한 달가량 먼저 발생한 맹산 학살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3·1운동사에서 단일 시간·장소 기준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3월 10일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맹산군 시위현장에서 무려 51명이 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근 일본 정부와 다수 일본 국민들의 우경화 추세,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의 그릇된 역사인식을 목도하면서 과거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그 의의와 시사점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일본군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저지른 ‘간도 대학살’ 만행을 검토하고자 한다.      

일본군의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지속되고,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패한 후 일본군 수뇌부는 만주 독립군의 실력을 재평가하고,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일대 탄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일본 당국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침입하기 위해 1920년 5월부터 꾸준히 동북군벌(봉천군벌)의 우두머리인 장작림(張作霖)을 회유하여 동의를 받는 등 나름대로 ‘출병’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 중앙(북경)정부의 승인은 받지 못했다. 따라서 1920년 10월 2일 중국 마적의 제2차 일본영사관 습격사건인 ‘혼춘(琿春)사건’을 이용하여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고자 했다.

일본군은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혼춘(琿春)사건’을 조작하여 출동의 명분을 만들었다. 혼춘사건 직후인 10월 7일 일본 정부의 공식적 ‘출병’ 승인을 받고 소위 ‘간도출병’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독립군의 ‘청산리 독립전쟁’이 10월 말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서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독립군 추격에 실패하면서, 1921년 5월까지 북간도(중국 연변) 및 남만주의 서간도 지방에서 대대적 한인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저지른 ‘간도 대학살(종래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으로 불림)’은 1920년 10월 2일부터 1921년 5월 9일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약 8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은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1단계는 10월 14일부터 11월 20일까지였는데, 주로 독립운동 단체들과 항일근거지로 지목된 마을과 학교, 교회 등에 대한 대규모 ‘소탕’작전을 감행했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때 독립군 등 항일세력뿐만 아니라, 배후에서 독립군을 후원하는 한인사회까지도 철저히 섬멸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 때문에 한인들의 피해는 매우 심했고 참혹했다. 2단계는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 일본군 주력부대의 철수까지로, ‘잔당숙청’이란 명분으로 촌락 부근 산림의 반복적 수색, 비행기와 국경수비대를 동원한 무력시위와 산발적 전투 등을 벌였다. 3단계는 12월 17일부터 1921년 5월 9일 일본군의 완전한 철수시기까지이다. 이때는 간도파견대를 기반으로 경찰분서 증설과 조선총독부 경찰 증원, 친일세력 육성과 확대 등 소위 ‘새로운 질서’ 확립에 주력하였다. ‘간도 대학살’은 주로 1920년 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저질러졌다.

1920년 12월까지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 출동한 일본군 제28여단은 이 지역에서 조선인 522명을 죽이고, 조선인 가옥 534채를 불태웠는데, 재산 피해액은 66,850엔(원)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겼다(姜德相·梶村秀樹 編, 『現代史資料』28(朝鮮 4), 東京: みすず書房, 1972, 543-570쪽).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하에서는 ‘간도 대학살’의 일부 사례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중국 연변 ‘장암동 참변’ 

장암동은 현재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성용향(東盛勇鄕)에 속한다. 용정에서 동남쪽으로 약 6km가량 떨어져 있는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은 1909년부터 한인 개간민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부근 골짜기에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도였고 간도국민회나 의군단(義軍團)과 같은 독립운동 조직의 관련자들이거나 후원자들이었다. 특히 이곳의 영신학교(永新學校)는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온상이었고, 1919년 용정의 ‘3·13운동’ 때도 영신학교 교직원들은 장암동 주민들과 함께 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특히 1920년 10월에는 남양평과 팔도하자 등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20년 10월 30일 새벽 0시 30분경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4사단의 스즈키(鈴木) 대위가 거느리는 보병 72명과 헌병 3명, 경찰 2명은 장암동을 목표로 하여 출발하였다. 새벽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 30분경 장암동을 포위하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협박하여 교회 마당에 집결시킨 후 청장년 33명을 독립군 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도 교회당 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결국 이들은 모두 학살되고 말았다. 짐승 같은 일본군들은 며칠 뒤 유가족들의 울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찾아와 무덤을 파헤쳐 시체들을 한데 모은 다음 석유를 붓고 시체가 재가 되도록 불태워버렸다.

당시 중국 연변(북간도) 일대에서 이러한 참변을 직접 목격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마틴(S.H. Martin, 馬丁)은 다음과 같이 참혹한 내용을 적은 기록을 남겼다.
   
“10월 31일, 우리들은 찬랍파위촌(瓚拉巴威村: 장암동―필자)에 사실을 알아보러 갔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10월 29일 새벽에 무장한 (일본군) 보병 한 부대는 이 예수교촌을 포위하고 산적한 밀짚 위에 방화하며, 남자라면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집 밖으로 끌어내어 다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자는 불 속에 집어넣고, 집 안에서 울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는 사자(死者)의 어머니와 처자의 가옥을 또 불질러 전 마을이 불타고 말았다. 그들은 이와 같이 여러 마을을 모두 없애버린 다음 주둔지 병영에 돌아가 천황탄생일을 축하하였다.

우리 일행이 부근 각 촌에 이르렀을 때 조선식 큰 집을 보았는데, 아직도 불타고 있었고…… 3년간 보관하였던 식량도 불타버렸다. (중략) 잿더미 속에는 시체가 즐비하여서 우리들은 이 잿더미를 고 있는 한노인의 시신을 보았는데, 몸에는 총탄 자국이 여러 군데 있고 몸은 벌써 다 타버리고 간신히 목만 붙어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른 데로 갔는데,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체 타는 악취가 나고 지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부인 넷을 만났는데, 각각 어린아이를 업고 새로 쌓은 무덤 옆에 앉아 우는 소리가 극히 비참하였다. (중략)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40명이었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 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90-91쪽)

이 사건 직후 일본 군부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참상 폭로와 국내외 각지 전파를 우려하여, 중국 지방 관헌이나 연변의 용정 지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일본군의 학살을 변명하는 각서를 보내거나 무마하는 후안무치한 조치를 단행하는 등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기에 급급한 추태를 보였다. (「사이토 대좌에게 보내는 吉林督軍公署 公函 제288호」 및 「미즈마치[水町] 대좌가 용정촌 외국인 선교사에게 보내는 각서」, 『조선군사령부 간도출병사』, 김연옥 옮김, 경인문화사, 2019, 334~350쪽 참조)  

일본군이 기록한 한인 학살

1920년 10월 말 전후 시기에 일본군이 소위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 침입하여 독립군 관계자 및 후원자들을 무차별로 색출하여 탄압, 학살한 일부 사례를 공개하고, 희생된 ‘의인’들을 뒤늦게나마 소환해보고자 한다. 당시 기록, 보고된 일본군 문서(일본군 보병 73·74·75·76연대 보고 사례)를 토대로 대표적 몇 사례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 김문순(金文順, 목재상, 나이 불명) 청산리 방면으로부터 도주 중에 사로잡았으나, 옥석동에서 총살(화룡현 숭화사 대옥석동, 1920.10.28)
- 서인봉(徐寅鳳, 농업, 44세) 숨긴 무기를 수색하는데 저항하므로 참살[斬殺-목을 벰](연길현 흥신동, 1920.12.16)  
- 황하구(黃河龜, 41세) 1920년 8월 10일경 차대인구(車大人溝) 박태권(朴泰權)의 권유로 한국독립운동에 종사하여 불온문서 등의 배포에 노력하고, 끝까지 독립을 감행하고 단념할 의지가 없다고 인정하여 자살(刺殺: 찔러 죽임)(혼춘현 東島, 1920.10.25)
- 장홍극(蔣洪極, 재봉업, 24세) (독립운동 단체인) 군무부의 피복 제조에 종사하고, 또 러시아령 각지의 불령단과의 연락을 맡고 있으므로 참살[斬殺](혼춘현 사도구[四道溝], 1920.10.16)                                                    
- 정길순(鄭吉順, 농업, 65세) 오가자(五家子) 부근으로 일본군 출동, ‘토벌’시 체포되어 귀환 도중 구사평(九沙坪) 대안에 이르렀을 때 야음과 눈발을 틈타 도주하였으나, 추적하여 사살(혼춘현 장족등[獐足登], 1920.11.4)

이 밖에 일본군경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의한 참혹한 탄압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극히 잔인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는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중국 동북의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서 피살 3,469명(이 중 북간도가 2,626명, 유하·흥경·관전현 등 서간도가 843명), 피체 170명, 강간 71명, 민가 전소 3,209건, 학교 전소 36건, 교회당 전소 36건, 곡물 전소 5만 4,045석의 피해가 있었다고 집계하여 발표하였다(『독립신문』 87호, 1920.12.18). 그러나 일본군은 사살 494명, 체포 707명으로 축소 보고했다. 한편 중국 당국은 피살 324명, 재산피해 100만 원가량으로 조사하였다.

결국 일본 군경은 이러한 만행으로 한인사회를 초토화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없애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한 듯했다. ‘간도 대학살’ 후 일제의 무력탄압이 강화되면서 친일세력이 확산되고 일제 측의 한인 지배정책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인들의 저항과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지속되어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괴롭혔다. 

‘간도 대학살’의 반향과 그 영향

간도침략 일본군의 한인 학살은 중국 동북 지방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혔다. 길림성장(吉林督軍) 포귀경(鮑貴卿)은 일본군이 이주 한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학살하고 있으니, 심각한 약속위반이라는 의견을 11월 4일 봉천총영사 아카즈카[赤塚]에게 보내 항의하였다. 

간도침략 일본군은 자신들의 학살행위가 이주 한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연길현 지인향 와룡동 등 한인 마을에서는 “국자가(局子街-현재 연길) 병참(兵站)을 축하드립니다. 사령부 만세”라는 현수막을 내걸 정도였다. 이에 대해서 일본군은 “우리 군대가 각지에서 토벌수사를 위해 방화, 살상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재해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애원적 의지로부터 나온 것으로, 해당 지방 작금에 있어 민심의 이면을 살핌에 만족한 것이라고 인정한다(『朝鮮統治史料』2, 407쪽)”라고 자평하기까지 했다.

또 일본 군부 안에서 장암동 학살사건이 이른바 제2의 ‘제암리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다각적 대책을 논의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소장자료,「間島方面出兵に関する件」(1920년 10월 31일 작성, 11월 2일 전보 접수), 1230-1233쪽). 이후 장암동사건은 수원의 제암리사건처럼 일제의 한인 학살만행을 폭로하는 중요한 이슈로 중국 등 외국 언론에 보도되는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책임 당위성

독립군 ‘토벌’을 빙자하여 사실상 불법으로 북간도 지역에 침입한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만행과 방화·약탈·폭행·강간 등의 온갖 비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심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망각한 채 ‘한·일 우호’나 선린관계를 말하곤 한다. 물론 이웃 우방국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혜는 당연히 소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친일세력에 대한 단죄와 심판은 물론, 수많은 일본인 전쟁범죄자들에 대하여 재판과 같은 합법적 심판절차를 거쳐 처벌하지 못했다. 각종 학살만행과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자행한 일본 군경과 관계자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해방 이후 역대 정권, 특히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에도 한국 측 대표는 일본 군경이나 관헌 등 전쟁범죄자의 처벌에 관해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동학군, 의병, 3·1운동 참가자, 연해주 4월참변 및 1920년 간도참변 희생자, 일본의 관동대지진 희생자, 강제징용과 징병, 일본군 ‘위안부’ 등 동원 희생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진상규명과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일본 측의 자발적인 협조와 사과, 배상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 흩어져 있는 각종 기록과 자료, 증언들을 취합하여 1920년 말과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간도 대학살’의 진상을 체계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및 그 전후 시기에 자행된 일본 군경 및 기관, 단체, 일본인 민간차원에서의 다양한 한인(조선인) 학살 관련 자료 발굴 및 증언 채록, 한국 정부 및 민간차원에서의 적극적 조사·연구·교육, 한·중·일·러·미 등 여러 나라들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 학계의 공동연구 및 협력 네트워크 구축, 희생자 추모 및 기념사업 추진 등의 다양한 대책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중국 동북 지역 독립운동사』,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關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 (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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