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테마

[2021/10] Theme.2 러시아 한인사회의 4월참변

페이지 정보

본문

항일 분위기 억누르려 연해주 일대 학살


한·러 공동의 비극

제국주의 폭력문제 함께 기억하고 추모해야


글 | 송영화(역사학연구소 연구원)

4월참변은 일본이 지원하던 러시아 백위파가 수세에 몰리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일본의 군사행동이었다.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기념회 후에 러시아 한인사회에 일어난 항일적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4월참변의 결과로 연해주 군정위원인 세르게이 라조가 사망했고, 5,000명 이상의 빨치산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1명, 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이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러시아 한인사회의 주요 지도자이자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을 역임한 최재형을 어떠한 법적 절차 없이 총살했다. 또한 독립군의 군자금 조달에 힘쓴 김이직과 항일연설을 통해 일본군을 비판한 엄주필도 최재형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일본군은 한민학교를 불태우고 부녀자, 아이, 노인에게 구타를 가하며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다. 

어떠한 이유로 4월참변이 발생했나

1920년 1월 말 백위파의 수장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처형당하며 적위파가 승기를 잡았다. 이로써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혁명의 적위파와 구러시아의 백위파가 치열하게 싸워온 러시아 내전이 점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1920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사회혁명당(SR)의 당수인 메드베데프가 정변을 일으켜 백위파이었던 로자노프 정권을 전복하고 사회혁명당과 볼셰비키의 연합정권인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메드베데프의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는 한인의 항일운동에 우호적이었다.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시 북부에 위치한 최대의 한인마을 신한촌(新韓村)에서 3·1독립선언기념회가 열렸다. 신한촌이란 이름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 중심지 개척리가 1911년 3월 러시아 지방 당국에 의해 ‘위생불량’을 명분으로 철거된 후 새로이 만들어지며 붙여졌다.

독립선언기념회 행사의 주요 내용은 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신한촌 정교회 사원에 모여 국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인들은 러시아 군악대를 선두로 세워 신한촌을 행진했다. 저녁에는 마을 중심에 위치한 민족교육의 중심지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애국적 연극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 여러 국가의 영사들과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 관계자, 그리고 각 신문사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했다. 

3·1독립선언기념회 후 러시아 한인사회에 항일적 분위기가 확대되었다. 일본영사관과 일본군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잦아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파견 일본군 사령관은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에 일본군 협조자에 대한 편의와 보호, 한인들의 항일활동에 대한 견제를 요청했다. 1920년 4월 4일에 러일조정위원회는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교섭을 가장하여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를 방심시켰다. 교섭 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일본군이 젬스트보 임시정부의 주요 행정기관 건물을 향해 공공연히 기관총을 설치하고 전략요충지에 참호를 만드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목격됐다.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은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를 공격하여 4월 5일 아침에 러시아 측의 병영과 관청을 모두 점령하였다. 일본군 사령부는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했기 때문에 일본 측이 이에 대응한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는 연합국 외교관 회의에서 자신들은 먼저 공격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이유로 4월참변이 발생한 것인가? 4월참변은 일본이 지원하던 백위파가 수세에 몰리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일본의 군사행동이었다. 미국 측은 4월참변의 발생 배경을 두고 적위파를 선제공격하여 조선과 만주에서 일본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미국의 언론계는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의 피해 주장을 인정했다. 또한 일본이 침략주의를 발현하여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일제히 비판하였다.

일본이 4월참변을 일으킨 것은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기념회 후에 러시아 한인사회에 일어난 항일적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가 한인의 항일운동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와 한인사회를 동시에 공격하면 항일운동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학살, 방화 그리고 고문

4월참변은 시베리아에서 일본의 세력을 유지하고 한인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이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공격한 침략행위였다. 4월참변의 결과로 연해주 군정위원인 세르게이 라조가 사망했고, 5,000명 이상의 빨치산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61명, 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이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러시아 한인사회의 주요 지도자이자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을 역임한 최재형(崔才亨)을 어떠한 법적 절차 없이 총살했다. 또한 독립군의 군자금 조달에 힘쓴 김이직(金理直)과 항일연설을 통해 일본군을 비판한 엄주필(嚴周弼)도 최재형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는 4월참변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러시아 병사들의 시신을 찾아내고 신한촌을 순찰하며 피해 상황을 조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러시아 주민은 1920년 4월 7일 오전 6시 30분경,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에 위치한 개천 페르바야 레츠카에서 일본군 6명이 러시아 군인들에게 항복을 유도한 후 사살했고 그 주변에서 한인들의 시신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신한촌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은 1920년 4월 5일 오전 4시부터 시작됐다. 일본군은 신한촌을 기관총으로 포위하고 한인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관심을 보인 것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한 한민학교(韓民學校)였다. 한민학교는 항일적 논조를 지닌 『한인신보』사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한민학교를 불태우고 소각된 자리에 그 누구도 접근시키지 않았다.

일본군은 당시 신한촌을 지키던 5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무장해제하고 체포했다. 체포 과정에서 군인들은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당했다.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한 한인 장교는 자신이 일본군에게 받은 고문을 증언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장교는 벽에 달린 갈고리에 자신의 몸을 매달아 놓고 때렸고, 액체를 코와 입에 부었으며, 날카로운 철사로 고문했다. 잔혹한 고문으로 그는 이내 기절했다.

일본군은 신한촌에서 4월 5일 아침 8시까지 약 네 시간 동안 가택수색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한인 20명을 사살했다. 한인 상점도 약탈했다. 부녀자, 아이, 노인에게 구타를 가하며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가택수색 후 잠시 마을을 떠났다 다시 찾아온 일본군은 4월 5일 오후 4시부터 신한촌에서 기병용 칼을 휘둘러 한인 청년 1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4월참변 후 신한촌 한인의 다수는 공포에 질렸다. 자유를 찾아 시베리아 땅에 왔는데 다시 자유를 빼앗겼고,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사는 조선인들을 학대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학대할 것이라고 비관했다. 그러나 비관에 그치지 않고 분노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횡포와 학대는 죽음으로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각국 영사들에게 호소하고 원조를 얻어 일본에 정신적·물질적 손해배상을 청구하고자 했다.
 
일본의 통제에 ‘면종복배’하다

4월참변 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항일운동가들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르주로 향했다. 농촌에서는 한인빨치산 부대들이 백위파와 연합한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한인들은 생업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인해 기존의 거주지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1920년 5월 일본의 통제 아래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라는 친일단체가 설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를 필두로 하여 연해주 우수리스크 및 농촌 각지에 친일적 민회가 설립되었다. 일본은 이 조직들을 이용하여 한인의 생업과 일상을 장악하고, 일본식 교육을 위한 보조금을 지급하여 한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사실상 러시아 거주 한인들을 일본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인거류민회에 가입한 이들 가운데 채성하(蔡成河), 윤능효(尹能孝), 김치보(金致寶)와 같이 암암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4월참변 당시 신한촌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39세의 기독교도 채성하는 1920년 8월 20일 배를 타고 함경남도 홍원으로 향했다. 표면적인 목적은 장로임명을 위해서였으나, 내면의 목적은 항일운동 방안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신한촌 교회에 “독립운동을 끝내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서신을 보냈다. 자료의 부족으로 그가 조선에 가서 구체적으로 어떤 항일운동을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채성하는 원래 ‘온유한 인물’이었지만, 러시아로 돌아온 후에 어투가 매우 확고한 인물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채성하는 “종교와 국가는 분리될 수 없으며, 천국만을 외치는 것이 기독교인의 능사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라며, 기독교도의 항일운동 참여를 암시하는 메시지를 주변 인물들에게 전했다.
채성하와 친분이 있던 61세의 김치보는 신한촌에서 약방을 운영하는 상인이었다. 그는 노인단장으로서 노인단의 자금을 홍범도(洪範圖)에게 군자금으로 보내려 계획했다. 그는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에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구하여 항일운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군의 연해주 주둔은 시한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은밀히 항일운동을 전개할 때는 천도교 세력을 이용했다. 그는 1922년 천도교청년음악단으로 조선에 건너가 1922년 7월에 천도교 세력과 연합해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한편 1920년 당시 37세였던 기독교도 윤능효는 신한촌에서 서점을 운영했다. 4월참변 직후 실시된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윤능효는 항일운동에 참가한 것에 후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나, 기록과는 달리 그는 항일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4월참변 후에도 항일운동 관련 문서를 러시아에 반입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윤능효는 기독교 선교와 조선독립의 여론을 환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友’라는 단체의 입회서를 한인과 러시아인에게 전달했다. 또한 『조선평론』을 러시아 한인사회에 배포하고자 하였다. 이 잡지에는 일본이 만주지역 한인을 학살한 사실이 담겨 있었다. 비록 일본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는 은밀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은 1921년 3월 1일 휴교와 철시를 진행했다. 윤능효와 김치보는 철시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비록 1920년 3월 1일에 비하면 조용하게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통제 속 ‘균열’은 자료 곳곳에서 산견된다. 윤능효와 채성하는 비밀리에 3·1운동 기념 축하연을 벌이고 조선의 역사를 낭독했다. 1921년 5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몇몇 한인들은 연회에서 술에 취해 흥이나 “독립만세”를 돌발적으로 외쳐 일본의 감시망에 포착되기도 했다.

이처럼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들 가운데에는 항일의식을 표출하며 일본의 통제에 ‘면종복배(面從腹背)’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일본의 통제 방식 중 민회를 통해 생업을 장악하려는 회유책은 항일운동을 전개할 틈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조선인 회유정책이 결국 “조선인의 눈에는 도리어 코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체제 선택의 고민 속 항일의 의미

4월참변 후 일본의 통제 아래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던 한인들은 정치체제 선택과 항일이라는 신념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1921년 9월경 김치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본군이 철병하면 정권은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오지(奧地)로부터 한인들이 내려와 나 자신도 바로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시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측에 [안전을] 청원하여 후에 화를 입고 싶지 않다. 원래 조선인은 5·60년 동안 러시아의 은혜를 입고 안전하게 생활해 왔다. 이제 와서 일본에 [신변의 안전을] 부탁한다면 러시아인들의 감정을 해하는 것이다.”

김치보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에 의해 자신의 재산이 어떻게 될지, 또 일본의 통제 속에서 생활해온 자신이 볼셰비키에 의해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 걱정했다. 이와 같은 고민은 당시 연해주에서 일상을 영위하던 여러 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치보의 체념 섞인 말투 가운데 일본에 의탁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눈에 띈다. 

볼셰비키가 연해주를 점령하자 조선인거류민회에서 회장급 임원을 맡았던 이들은 처벌되었다. 반면 볼셰비키를 두려워했던 김치보는 그의 우려와는 달리 1924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천도교의 창조파 신숙(申肅)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작성하는 데에 동참한 것으로 확인된다. 볼셰비키가 점령한 신한촌에서 채성하와 윤능효는 새로이 조직된 자치단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재판업무를 맡았다. 이처럼 볼셰비키와 직접적인 협력을 하지 않았지만, 항일운동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러시아 내전이 종료된 후에도 새로운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함께 기억하기

4월참변은 한인의 역사이면서, 러시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함께 기억해야 한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서는 우수리스크 고려인협회와 우수리스크시가 주최하는 4월참변 추모제가 매년 열린다. 이 행사에는 연해주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와 주 블라디보스토크 대한민국 총영사만이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의 정치인들, 우수리스크시 행정관료들도 참석한다. 2015년 4월에는 95주년을 맞아 고려인들이 대규모로 참여하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이 “1920년 연해주 4월참변-한국과 러시아”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러시아인, 고려인, 그리고 한국인들이 4월참변을 ‘함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행사에서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저명한 지도자였던 최재형과 과거 연해주 젬스트보 임시정부의 군정위원이었던 세르게이 라조를 함께 추모한다. 두 인물의 초상을 나란히 놓고 당시의 비극을 함께 기억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4월참변 추모제는 제국주의 폭력 문제에 대해 러시아와 한국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볼 수 있는 장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필자 송영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 근대사 및 러시아 한인이주사 전공이며 주요 연구로 「복류하는 정체성: 한일강제병합 전후 한인의 러시아 국적 취득」, 『역사문화연구』79(2021),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철거와 신한촌의 건설」, 『슬라브학보』35(2020), 「1920년 ‘4월참변’ 후 일본의 통제와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 『역사연구』37(2019) 등이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