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 Theme.3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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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통치 사상 가장 참혹했던 제노사이드
사과가 폭탄으로 둔갑
유언비어로 살해 지시 군관민 합동 집단학살
글 | 김인덕(청암대학교 교수)
1923년 9월 1일 정오 2분 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관동 일대에 2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 사망자와 1백억 원 이상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엄연한 자연재해였지만, 관동대지진은 조선인 학살로 이어졌다. 최소한 6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했다. 악의적 유언비어가 주원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보도하며 조선인 학살을 부추겼고 군과 경찰, 도쿄 내무성까지 합세해 기름을 부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 통치 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관이 주도하고 언론이 동조하며 일반 민중이 합세해 무고한 조선인을 살해한 제노사이드(대량학살)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발생
당시를 회고하는 여러 기록이 있는데 일본 유학길에 나섰던 함석헌은 관동대지진 당일을 경험하고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함석헌 전집6, 255~296쪽)이란 글을 남긴다. 당시 함석헌은 세이소쿠(正則)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유시마에 있는 함덕일(咸德一) 형제를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지진을 경험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오가 거의 다 됐습니다. … 순간 갑자기 우르르 하고 진동이 왔습니다. …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또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점점 심하게 오는데 보통이 아닙니다. … 황급히 층계를 달려 내려와 현관을 썩 나서니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이 비오듯 합니다. … 전신주를 바라보니 노대(태풍) 만난 뱃대처럼 누웠다 일어났다 합니다. … 조금 뜸해지는 것을 타서 사방을 바라보니 사람마다 집 앞에 서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오 가미사마(神樣), 오 가미사마’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 후에 들으니 지진이 심하면 반드시 화재가 난답니다. …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때가 바로 정오 직전 모든 집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므로 불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 거의 전 시가 다 타버렸습니다.” (함석헌 전집6, 268~270쪽)
여기에서 필자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지진에서 끝났던 것이 아니라 날조된 유언비어와 조직적, 집단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조선인은 여기에서 가장 직접적인 희생의 대상이 되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피해 상황
일본 정부와 사회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조선인을 살해했다. 전술했듯이 문제는 일본의 관동지역, 특히 도쿄도(東京都), 지바현(千葉縣),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바라키현(茨城縣), 도치키현(栃木縣), 군마현(群馬縣),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을 중심으로 일본 민중과 군·경찰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학살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조선인학살의 원인 제공자가 일본 정부와 사회였다. 때문에 조선인학살 사건 발생 이후에도 일본 내에서의 관련 조사는 자유롭지 못했고, 지금도 그 영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사건 자체를 은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山田昭次, 『關東大震災時と朝鮮人虐殺とその後 -虐殺の國家責任と民衆責任』, 創史社, 2011, 98-102쪽).

당시 1923년 9월 최소한 6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당하게 된 요인으로 주목되는 것이 유언비어이다. 조선인을 학살한 유언비어의 내용은 주로 조선 사람들이 관동대지진의 혼란을 틈타서 폭행·약탈·방화·부인능욕·폭탄투척·집단습격·우물에 독극물 투약 등을 했다는 것이다.
왜곡된 유언비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인들이 분필로 표식을 하여 폭탄을 던지도록 했다. 사실은 청소회사 인부들이 작업할 집의 표식이다. 2) 조선인들이 폭탄을 가지고 다닌다. 그 내용은 폭탄이 아니라 사과였다. 3) 흰 셔츠에 통 좁은 바지를 입은 남자와 조선 옷을 입은 여자가 독약을 우물에 넣고 있다. 정확하게는 여자 3명이 쌀을 씻고 있었다. 4) 폭탄과 독약을 가지고 다니는 조선 사람이 있다. 여기에서 폭탄이라고 생각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고 독약은 설탕이었다. 5) 각 처에 조선인이 폭행, 습격, 방화 등의 계획을 암호로 기록했다. 이것은 분뇨수집인, 신문, 우유 배달부들이 단골집을 분필로 표시한 것이다. 6) 조선인이 폭발물을 소유하고 있다(였다). 폭발물이 아니라 고춧가루였다. 이런 유언비어는 일본 사회에 먹혔다.
1923년 9월 1일 관동 일대에서는 오후 3시경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의 방화가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특히 일본 언론들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보도하여 조선인들의 학살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다. -도쿄니치니치신붕(東京日日新聞)-은 9월 1일자로 일본에서 최초로 지진에 관한 뉴스를 호외로 발간하였다. 9월 3일에는 ‘불령선인’이라고 하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인 용어도 최초로 사용하여 1면 톱으로 보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김인덕, 「한국 역사교육 속의 재일조선인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강덕상 외 지음,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동북아역사재단, 2013).
유언비어는 군이 주도한 경우, 권력 말단의 경찰관 등이 퍼뜨린 것, 그리고 도쿄의 내무성이 인근 현에 퍼뜨린 것, 나아가 더욱 광범위하게 전국적인 차원에서 확산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진이나 화재 등의 직접적 피해가 적었던 사이타마현 등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은 내무성이 지방행정 조직을 통해서 자경단을 조직토록 하여 조선인에 대한 경계를 호소하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살해를 포함한 대응을 내무성이 일본 민중에게 지시한 것이었다(姜徳相·琴秉洞 編,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みすず書房, 1963).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가 사실인 것처럼 퍼뜨리고, ‘불령의 목적’에 대하여 계엄령을 취해 대응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1923년 조선인 학살을 통한 기억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독립신문』에서는 1923년 조선인학살과 관련된 기사들이 실렸다. 주요한 기사를 보면,
•1923.9.19: 천재지변의 화를 조선인에게 전가, 군경(軍警)에 수금된 한인 1만 5천 명이 조선인 참살(慘殺) 등 항의, 1만 5천 조선인 석방
•1923.10.13: 군에서 동포 1만 3천인 별도 수용 후 기관총으로 사살. 조선인 사망자 6, 7천인
•1923.12.5: 본사 피학살교일(僑日) 동포 특파조사원 제1신 ‘1만의 희생자’, 각 지역의 희생자 통계를 적시하고 합계 6,661명이 피살

한편 지진과 학살의 위험을 넘어 살아남은 재일조선인은 소실을 면한 유일한 조선인 단체였던 천도교청년회 사무실에 모였다. 1921년 1월 10일 방정환,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박달성은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를 설립할 것을 발기했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이후 사후 처리에 일정하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조직과 기독교 조직에 연계된 재일조선인은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에 주목했다. 재일조선인들은 도쿄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를 결성하고 조사사업에 착수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때 일본에는 보통 사람의 피해도 컸다. 자경단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양심적인 그리고 진보적인 사람의 모습도 존재했다. 실제로 당시의 정황을 주도한 것은 일본 정부였다. 일본 정부는 학살 진상을 모호하게 은폐했다. 그리고 유언비어 발설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진상을 조사하려는 자유법조단 등의 단체 활동을 방해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11월 15일 현재 피살자 233명, 중상 15명, 경상 27명으로 발표했다. 무엇을 근거로 한 통계인지 모르겠다. 실로 의심스럽다. 반면에 조선인학살 사건의 진상조사를 일본 정부에 강력히 요구한 당시 대표적인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등이 존재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식민지 통치 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기억의 통로를 통해서 어떤 명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관이 주도하고 언론이 동조하며 일반 민중이 합세하는 이른바 군관민이 합동으로 무고한 조선인을 살해한 제노사이드였다.

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재일조선인사, 근현대한일관계사를 전공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청암대학교 조교수, 재일코리안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극일에서 분단을 넘은 박애주의자 박열』, 『재일조선인 역사교육』, 『재일조선인 민족교육 연구』,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일상』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