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 Theme.4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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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항쟁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 보복
치밀하게 진행된 군사작전
조작과 은폐로 일관한 일제의 민낯 그 자체
글 | 전병무(강릉원주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제암리 학살사건은 3·1운동 시기 다른 어떤 사건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대장은 화근을 뿌리째 뽑을 것과 함께 군대의 신중함이 지나치면 도리어 만세운동이 확대될 우려가 있으니 강압 수단을 써서라도 ‘복종시켜 종식’하도록 지시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개인의 일탈 행위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다. 주동자 검거와 관련자 색출, 그리고 항쟁이 일어난 주요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라는 일련의 시나리오 속에서 치밀하게 진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주동자를 색출하여 검거하기보다는 주도 세력 근거지에 대한 보복과 박멸이 목표였기에 잔인한 학살과 방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만행이 발생했음에도 일제는 철저히 조작과 은폐로 일관하였다. 결국 제암리 학살사건은 바로 일제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조작과 은폐의 전통을 보여주는 일제의 민낯 그 자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배경
3월 28일 송산면 사강시장 근처 송산면사무소 주변에서는 인근 주민 1,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사강리경찰관주재소 순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수원경찰서에서 온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은 시위를 끝낼 것을 종용하였다. 이때 시위 주도자 홍면옥은 군중을 향해 더 크게 ‘만세’를 외치자 총격을 가하였다. 홍면옥이 어깨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격분한 군중들은 달아나던 노구치를 붙잡아 처단하였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장에서는 시위대가 일본인 가옥과 일본인 소학교를 파괴하는 등 무력 항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5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사망하였다. 4월 1일에 발안장 주변 산 위 80여 군데에서 횃불 시위가 일어났다.
4월 3일 일어난 장안·우정면의 만세운동은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2,000여 명 주민들은 장안·우정면의 각 마을을 돌며 시위행진을 하였고,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 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고 방화 전소시켰다. 특히 화수리에서는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와 격전하다가 시위대 3명이 총격으로 사망하자 격분한 시위대가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이렇듯 화성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를 척살하는 등 조직적이고 공세적이었다. 일본 측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시기 전국에서 완전 파괴된 면사무소 19곳 중에 2곳, 주재소 16곳 중에 1곳이 화성 지역에 해당한다. 또한 사망한 관헌 8명 중 일본인 순사는 2명인데 모두 화성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결국 일제는 화성 지역의 격렬한 3·1운동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제암리 학살사건 발생과 일제의 사후 처리

4월 9일 일제는 경성헌병대 부관 헌병특무조장 츠무라(津村) 이하 헌병 6명과 보병 15명, 수원경찰서장 후루야(古屋) 이하 순사 11명 등 모두 32명으로 구성된 2차 검거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3개 반으로 편성되어 대규모 검거를 실시하였는데, 일본인 순사가 살해되었거나 일본인 가옥이 습격받은 지역이 집중 대상이었다. 1차 검거보다 강력한 진압을 실시하여 처음부터 주동자 체포보다는 보복 진압 작전을 펼쳤다. 검거된 주민만 800명이 넘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을을 포위 공격해 방화와 살해를 서슴지 않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였다.
4월 13일에 아리타 토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79연대 보병 11명이 발안 일대의 경비를 명목으로 천안에서 발안으로 들어왔다. 실질적인 목적은 1~2차 진압 부대의 검거망이 미치지 않았던 향남과 팔탄에 대한 진압에 있었다.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사카 도시키치(左坂利吉)의 안내를 받아 우정면 화산리로 가서 김연방과 그의 일가 김태현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태웠다.
아리타 부대는 4월 15일 향남면 제암리로 이동하였다. 당시 순사보 조희창과 일본인 사사카를 앞세워 제암리에 도착한 아리타와 일본 군인들은 마을의 성인 남자 약 30명을 교회로 불러 모았다. 제암리 주민들이 제암교회에 모두 모이자 일본 군인들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이때 간신히 탈출해 도망쳐 나오는 사람은 뒤쫓아 가서 끝내 사살하였으며, 마을 전체에는 불을 질러 가옥 30여 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심지어 이 광경을 보고 남편을 찾으러 달려오던 부인 두 명도 살해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4월 16일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는 일본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전보를 보내 “발안장에서 15일 오후 2시 내지 3시 사이에 약 400명이 군집 소동해 일단 해산시켰으나 다시 예수교도가 폭행하려는 차에 군경 협동으로 진압해 폭민 사망자 32명, 부상자 약간, 그때 불이 나 가옥 28동이 불탔다”고 보고하였다.
이렇게 우쓰노미야가 거짓으로 보고한 이유는 학살 방화를 인정하면 상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우쓰노미야의 1919년 4월 18일 일기에 의하면 “사실을 사실로 처분하면 아주 간단하겠지만,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필(毒筆)을 휘두르는 외국인들에게 학살 방화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제국의 입장은 심히 불이익이 된다. 한편으로는 조선 안에 폭민(暴民)을 증가 조장시키고 또 진압에 종사하는 장졸(將卒)이 의혹의 생각을 갖는 불합리함이 있으므로 ‘저항하므로 죽였다’고 하여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하였다. 즉 일제의 군부는 제암리 학살을 조작하고 은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서양인의 방문 그리고 진실 전파
제암리 학살사건이 발생한 후 마을이 방화되고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서울까지 전해졌다. 서울 주재 미국총영사인 베르그홀쯔는 커티스 부영사에게 화성 일대의 상황을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4월 16일 최초로 커티스 미국 부영사와 언더우드 선교사, 테일러 특파원 등이 제암리 학살 현장을 방문, 조사하였다. 이들은 소실된 마을을 탐문하고 주민들을 면담한 후 그 조사결과를 4월 21일 베르그홀쯔에게 보고서로 제출했다. 4월 23일 베르그홀쯔는 미국 국무장관에게 「일본군이 교회 안에서 한국인 37명 학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5월 12일에는 이를 수정, 보완하여 「제암리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한국인 37명 학살과 촌락 파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베르그홀쯔는 여기서 제암리 학살사건이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에 대한 학살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을 최초로 소개한 해외 영자신문 보도는 일본 고베에서 발행되던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 4월 20일자 “수원에서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간략한 기사였다. 이어서 4월 23일 서울발 AP통신을 인용 보도한 1919년 4월 24일자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와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4월 24일자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가 보도하였다.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 5월 3일자에는 “팔탄면 대학살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언더우드의 주민면담 보고서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한편 스코필드의 보고서는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 5월 27일자에 “수원 제암리 대학살”과 “수촌의 연소”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여론이 계속해서 악화되자 조선군사령부는 7월 아리타 중위를 군법 회의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이 된 발안리·수촌리·화수리 지역의 검거 작전을 기획한 시오자와 헌병대장은 견책, 현장에서 총괄 지휘한 하세베 경시는 중근신 15일, 수촌리 방화 책임자인 츠무라는 중근신 5일이라는 형식적인 징계를 내렸다. 게다가 군법 회의에 회부된 아리타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결국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일제가 이를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아리타와 지휘관들을 문책하는 형식만을 취한 기만책이었으며, 학살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통해 본 일제의 민낯
제암리 학살사건은 3·1운동 시기 다른 어떤 사건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대장은 화근을 뿌리째 뽑을 것과 함께 군대의 신중함이 지나치면 도리어 만세운동이 확대될 우려가 있으니 강압 수단을 써서라도 ‘복종시켜 종식’하도록 지시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개인의 일탈 행위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다. 주동자 검거와 관련자 색출, 그리고 항쟁이 일어난 주요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라는 일련의 시나리오 속에서 치밀하게 진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주동자를 색출하여 검거하기보다는 주도 세력 근거지에 대한 보복과 박멸이 목표였기에 잔인한 학살과 방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만행이 발생했음에도 일제는 철저히 조작과 은폐로 일관하였다. 결국 제암리 학살사건은 바로 일제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조작과 은폐의 전통을 보여주는 일제의 민낯 그 자체이다.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 강릉원주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중이며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 근대법제사를 전공하였고, 최근 한국의 사형제도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 『조선총독부 조선인 사법관』,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공저), 『항일변호사의 선봉 김병로』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사형 제도의 운영과 실태」, 「『소화4년 사형관계 서류』를 통해 본 항일운동가의 사형집행」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