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Theme.1 의열단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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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주의의 이념적 지평 확장
민족의 절대독립과
민주적 사회변혁 동시 추구한 ‘민족혁명’
글 | 김영범(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의열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부분적·일면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 격렬한 ‘피의 항쟁’이나 영웅적 투쟁의 이미지로만 의열단을 바라본다. 그러나 의열단운동의 전체 발자취는 혈투의 드라마 훨씬 이상의 것이었다. 1925년까지의 전기 활동에서 의열단은 암살파괴운동의 선두주자요 항일 작탄투쟁의 전범처럼 되었다. 하지만 중·후기 활동은 조국광복만 아니라 신국가 건설까지 전망하는 민족혁명운동의 조타수 역할 수행에 중점을 두었다. 의열단의 혁명운동 노선과 조직계보는 민족혁명당이라는 확대조직 속에서 더 탄탄한 기반을 얻으며 해방 때까지 발전해 갔다. 25년 이상 이어진 하나의 ‘장정(長征)’ 행로였다.

의열단과 그 수장 김원봉은 ‘천만 관객’ 영화 〈암살〉(2015)과 〈밀정〉(2016)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이름이 각인되었다. 그렇지만 의열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부분적·일면적인 것으로 그치고 있다. ‘의열단’이 종종 ‘의혈단’으로 잘못 적히거나 발음되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격렬한 ‘피의 항쟁’이나 영웅적 투쟁의 이미지로만 의열단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의열단운동의 전체 발자취는 그런 혈투의 드라마 훨씬 이상의 것이었다. 다양한 내용과 의미들을 그 안에 품고 있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지린에서 황상규(黃尙奎)의 지도 아래 20대 청년지사 10인의 합심 동참으로 창립되었다.- ‘창립단원 13명’ 설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10명으로 보아야 함과 그 명단이 근래에 논증, 정리된 바 있다. 「의열단 창립단원 문제와 제1차 국내거사 기획의 실패 전말」(2019) 참조 - 그해 음력 2월에 39인 국외 독립운동가 연명으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는 외침에 대한 적극 호응으로였다. 그리고 1935년 7월 중국 난징에서 ‘단일 대당’으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될 때 그리로 ‘해소’됨을 선언하며 스스로 존립을 마감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1945년 광복 때까지 그 이름 그대로 유지하며 존립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어져갔던 16년간 의열단운동의 노선과 조직특질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환경·정세 변화에 따라 수차 바뀌었다. 발현되는 행보의 특성도 당연히 달라져 갔다. 그래서 의열단운동사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 전기(1920~1925), 중기(1926~1931), 후기(1932~1935)로 구분해보는 것이다.
1920년대 무장독립운동의 본격화
1919년의 3·1운동에서 민족독립의 열망과 혁명적 에너지의 거족적 분출이 있었지만 독립이 성취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많은 독립지사와 애국대중은 평화적 시위운동이 갖는 한계를 깨달았다. 무력과 폭력까지도 동원되는 지속적인 싸움을 통해서만 일제를 내쫓고 독립을 얻을 수 있음을 자각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승전국 열강이 내보인 태도와 실망스런 결과로부터는 국제관계를 냉정히 조망하면서 최적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자는 마음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노선도 외교책 일변도에서 전투적인 방향으로 급선회했고, 독립전쟁론을 정립하여 그 전략을 세워갔다.

그렇다고 독립전쟁이 무조건의 ‘즉시 결전’으로 치러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족역량 증강의 ‘준비’와 대일결전의 ‘기회’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전략체계 안에 전쟁준비의 의미를 띠는 각종 전술이 복합적으로 배치되었다. 주요 전술은 국내 대중의 일상적 저항, 만주·노령 중심의 군사운동, 그리고 국내외에서의 작탄투쟁이었다. 이 3대 전술은 독립적으로 수행되지만 서로 부추기며 받쳐줄 관계였다. 독립군 병력을 모아 조직하고 조련시킬 자금 조달을 위해서도 국내 작탄투쟁이 필요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1920년 초의 임시정부 〈시정방침〉에서 제시된 12종의 대일항쟁 방법에도 ‘필요시 작탄 사용’과 ‘청년 결사대 편성’이 포함되었다.
위와 같은 계기들에 의해 1920년대의 무장독립운동 본격화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그 두 축은 군사운동과 작탄투쟁이었는데, 후자의 선도적 행동대이면서 결사대가 된 것이 의열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의열단 창립이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전략 정립보다 앞선 일이었지만, 크게 보면 맥락과 정황을 같이 해서였다.
‘반(反)폭력’으로 나아가는 ‘의로운 폭력’
창단 공약에서 의열단은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면서 ‘암살파괴운동’에 나설 것임을 예고했다. 일곱 부류의 암살 대상과 다섯 가지 파괴 대상도 정해놓았다. 통틀어 전자는 총독정치의 사령탑과 주요 수족들이었고, 그 세목을 합해 ‘7가살’이라 부를 수 있었다. 후자는 일제의 조선지배 중심기관이 되는 정치기관, 수탈기구, 선전기관, 폭압기구들이었는데, ‘7가살’에 대비시켜 ‘5당파(當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마땅히 파괴함’이라는 뜻으로이다.
1925년까지의 전기 활동에서 의열단은 암살파괴운동의 선두주자요 항일 작탄투쟁의 전범처럼 되었다. 거기에 불가불 폭력수단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 폭력은 남의 것을 빼앗거나 피해를 입히면서 나의 것을 키우고 넓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로, 침략과 강점, 억압과 수탈의 원천폭력에 순종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것이었다. 명백히 도의에 반하는 상황을 조성했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원흉과, 그에 빌붙어 사리사익을 도모하며 심지어 찬양까지 하는 자들을 단호히 응징하려는 것이었다. 불의한 현실체제 유지의 기구들을 하나씩 깨부수어 민족독립의 길을 뚫어내려 함이었다. 궁극에는 구조적 폭력과 체제폭력의 뿌리를 뽑아내어 자유와 독립과 평화를 이 땅에서 구현해내려고 불가피하게 행사되는 폭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反)폭력’으로 나아가는 ‘의로운 폭력’이었다. 그래서 ‘의열투쟁’이라는 용어와 그 개념도 성립하는 것이다.

의열단의 암살파괴운동이 기대했던 대로 대중적 총봉기를 촉발해내지는 못했음이 사실이다. 그래도 국내 민중의 민족혼 고취와 항일정서 전파에 기여한 바 적지 않았고 국외 독립운동의 전투성 제고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 가운데도 독립운동의 주·객관적 조건과 내외 형세가 크게 변해갔고, 그에 따라 의열단의 암살파괴운동은 사실상 종결지어졌다.
중국 국민혁명운동의 급속 고조기이던 1926~ 1927년에 의열단원들은 북벌전에 직접 참가하고 정치적 지원도 하였다. 동아시아 혁명운동의 국제연대 가능성을 타진해본 셈이기도 했다. 그 경험에 더하여 의열단은 1931년의 만주사변 발발 후에 대일공동전선 결성을 중국국민당에 제안하여 전폭적인 호응과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거기서 양성, 배출된 120여 명의 청년투사 중 다수가 몇 년 후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조직 자원으로 충당되고 중견 간부로 성장해갔다. 그것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의 국외 독립운동 역량 증강에 대한 특출한 기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듯 의열단의 중·후기 활동은 조국광복만 아니라 신국가 건설까지 전망하는 민족혁명운동의 조타수 역할 수행에 중점이 주어지고 있었다. 1923년에 단재 신채호가 교시해주었던 ‘조선혁명’의 이상과 정신을 견지하고 되새기면서 군사운동과 정치운동을 혁명방법론의 양축으로 삼되 민중주체화 전략도 가미해서였다. 그런 때문에도 의열단이 폭탄과 권총을 갖고 암살·파괴를 일삼는 직접행동의 폭력투쟁 단체였다고만 보는 것은 아주 협소하고도 편벽된 인식이다. 의열단운동사 전체를 시야에 넣고 보면, 암살파괴운동·의열투쟁 못지않게 그 혁명노선 및 혁명운동과 그 공적들에 비추어서도 재조명되고 평가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25년 이상 이어진 ‘장정(長征)’ 행로

돌아보면 의열단의 창단 공약 속의 ‘정의로운 일’이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같이 추구해감이기도 했다. 후자의 지향점은 “특권계급을 타파하고 지권(地權)을 고루 나눔”이라는 ‘최고 이상’으로 구체화되면서 반(反)봉건 사회변혁의 이념을 낳았고, 〈조선혁명선언〉에서 ‘이상적 조선’ 건설론으로 재확인되었다. 그러니까 민족의 절대독립과 민주적 사회변혁을 추구함과 동시에 만민자유·만인평등이 구현되는 민중사회로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것이 의열단의 ‘조선혁명’ 이념이었고, 그 내포를 집약한 용어가 ‘민족혁명’이었다.
그런 배경과 맥락에서 의열단은 공화주의를 기본 입각점으로 삼되 1923년 전후에는 아나키즘 사상과 그 행동철학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직도 철저한 비밀결사에서 자유연합체와 같은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중기 국면부터는 사회주의 이념 및 운동전략을 대폭 수용하여, 혁명기의 러시아사회민주당이나 중국국민당과 같은 혁명정당으로의 조직전환을 꾀하고 대중적 기반도 넓혀 가려 했다. 그런 중에도 의열단의 이념노선은 크게 보아 ‘혁명적 민족주의’ 범주에 속하면서 그 내부에서 민중적 민족주의가 활착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민족전선통일운동에도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1930년대 전반기에 좌익민족주의 정파를 대표하면서 앞 시기의 민족유일당운동의 흐름을 잇는 통일대당결성운동에 진력하고 그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 결과로 1935년에 5당 통합체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민족혁명당은 의열단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민족전선 좌익진영의 새 구심축이 되었다.
그렇게 의열단의 혁명운동 노선과 조직계보는 민족혁명당이라는 확대조직 속에서 더 탄탄한 기반을 얻으며 유지되어 8·15해방 때까지 발전해 갔다. 그러므로 의열단의 민족운동은 임시정부의 그것과 똑같이 25년 이상의 시간지속으로 이어진 하나의 ‘장정(長征)’ 행로였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민족독립과 사회변혁 과제의 완수를 동시에 추구해간 민족혁명운동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 의열단은 한국 민족주의의 이념적 지평 확장과 실천지형 다지기에 중요한 밑거름도 된 것이었다.

필자 김영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의열투쟁 Ⅰ―1920년대』, 『혁명과 의열―한국독립운동의 내면』, 『민중의 귀환, 기억의 호출』,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등의 저서와 「의열투쟁과 테러 및 테러리즘의 의미연관 문제」 외 역사사회학 논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