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Theme.2 대의를 향한 맹렬한 의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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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항일운동단체
죽음 두려워하지 않는 불나방 같은 대담성으로
피어린 폭탄공격 감행
글 | 김명섭(단국대학교 연구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와 재무총장 이시영의 후원을 받은 의열단 단원들은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해 1920년 1월 서울과 부산·마산 등으로 잠입했다. ‘밀양폭탄사건’이라 불리는 제1차 국내 총공격 작전은 불행히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20명이 체포되었지만, 일제를 놀라게 했다. 1922년 7월에는 김시현을 책임자로 한 제2차 국내 거사계획을 추진했다. 영화 <밀정>의 배경이기도 한 의열단의 제2차 계획은 폭탄 성능이나 조직의 규모, 실행의 대담성만으로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중국과 국내에서 펼쳐진 항일의열투쟁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의 길림 성내에 모여 조선의열단을 결성한 13명의 한인 청년들은 22세의 청년 김원봉을 ‘의백(義伯, 의형제의 맏형)’으로 추대하고 공약 10개 조와 암살·파괴 대상을 결정한 후 곧 행동에 돌입했다. 의열투쟁 노선을 지지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와 재무총장 이시영의 후원을 받은 의열단 단원들은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해 이듬해 1월 서울과 부산·밀양 등지로 잠입하였다. 제1차 국내 총공격 계획(일명 ‘밀양 폭탄사건’)이라 불리는 이 작전은 불행히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20명이 체포되었지만, 일제를 놀라게 하였다.
의열단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20년 9월 14일 부산으로 박재혁(朴載赫)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지게 하였고, 그해 12월 27일에는 단원 최수봉(崔壽鳳)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결행하였다.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긴 김원봉과 의열단은 서울 한복판에서의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921년 9월 12일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가진 단원 김익상(金益相)이 서울 남산의 왜성대(倭城臺)에 자리한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건물을 파괴했다. 거사 이후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온 김익상은 6개월 후인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해의 황포탄에서 일본 군부의 거물이며 간도 한인 대학살을 자행한 경신참변의 주역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려는 이종암(李鍾岩)·오성륜(吳成崙)과 함께 의거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1922년 6월 김원봉 단장은 제1차 국내 총공격 계획의 실패를 거울삼아 폭탄을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투탄요원에게 전달해줄 국내의 적임자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 비서국장 출신으로 서울청년회를 맡고 있던 김한(金翰)을 선정하여 단원 남정각(南廷珏)과 류자명(柳子明)을 서울로 파견, 협조 승낙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의열단은 다량의 폭탄을 안동(단동)현까지 옮겨 놓았고, 국내로 들여보낼 시점을 엿보았다. 폭탄을 기다리며 은신 중이던 김상옥(金相玉)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아 수배를 받다가 총격전 끝에 자결하였다.
의열단은 1922년 7월경 고려공산당원인 김시현(金始顯)을 책임자로 한 제2차 국내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서울로 잠입한 김시현은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인 황옥(黃鈺)에게 거사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였다. 김시현과 황옥은 중국 천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폭탄반입 방책 등을 숙의한 후 3월 중으로 거사일을 잡아 결행키로 하였다. 3월 초 천진에서 무기와 선언문 등을 인수받은 김시현·황옥 등은 안동역을 거쳐 신의주~서울로 반입시켜 효자동 비밀장소에 보관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황옥과 밀정들의 밀고로 관련자 25명 중 18명 전원이 체포되었고, 폭탄과 총기도 압수되었다. 황옥은 의거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했음에도 10년형에 처해졌지만, 수감 후 1년 만에 가출옥하였다. 영화 <밀정>의 배경이기도 한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계획은 폭탄 성능이나 조직의 규모, 실행의 대담성만으로도 일제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일본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 추진한 거사계획

의열단의 거사계획은 중국과 국내에서만 국한한 게 아니라 제국주의 심장부인 도쿄 한복판에서도 추진되었다. 서울과 도쿄 한복판에서 동시에 대대적인 폭탄공격을 감행하기로 한 2차 거사계획은 중국 단동을 통해 유입되는 폭탄이 서울의 책임자 김한에게, 곧 도쿄의 박열에게 나눠져 1923년 10월경 추진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비밀리에 단원 20여 명을 도쿄 등지에 파견하는 한편, 50여 개의 폭탄 이송을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김한이 일경에 매수되어 주구 노릇을 한다”는 정보가 들어옴에 따라 중단되고 말았다.
박열은 김한으로부터의 폭탄 유입과 별도로 중국 상해의 의열단체인 ‘다물단’(의열단의 착오)으로부터 폭탄구입을 추진했다. 박열은 폭탄운반 책임을 최영환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무사히 상해로 가 폭탄을 인계받은 후 도쿄 모처로 가져와 숨겼다고 회고하였다. 도쿄에서의 폭탄투척 계획은 그러나 갑작스럽게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조선인대학살이 자행되는 와중에 박열과 불령사 회원 전원이 붙잡힘에 따라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상해에서의 폭탄유입 사실은 들추어지지 않았다. 영화 <박열>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해 10월에 예정대로 일본 황태자 성혼식 때 폭탄을 투척했을 것”이라는 의열단과 박열의 투쟁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 박열 등의 체포는 다수의 의열단원이 희생당하고 폭탄마저 압수당하는 등 의열단에게도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의열단 간부진의 대일 거사계획은 계속 추진되었다. 특히 관동대지진 때 저지른 조선인대학살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일본 정부의 만행에 대해 보복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이로 인해 전개된 대일 공격이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 이중교 투탄의거이며, 북경의 의열단원 11명이 도쿄 공격을 목표로 폭탄구입 자금모집을 위해 국내로 밀파되었다가 체포된 경북 의열단사건이다.
친일 밀정제거와 동양척식회사 폭파사건

죽음을 두려워 않는 불나방 같은 의열단원들의 피어린 투쟁 상황에 대해 젊은 단원 김산(장지락)은 “1924년까지 300명에 가까운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의열단원들이 왜놈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큰 성과 없이 희생만 늘어가자, 김원봉 단장과 대다수 의열단 간부들은 암살·파괴운동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이에 김원봉과 간부진 19명은 중국국민당 간부인 진과부(陳果夫)의 추천을 받아 1925년 8월 남중국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또 장지락(張志樂: 일명 김산) 등 단원 7명도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혁명사상과 군사훈련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류자명은 중앙집권적인 정치·군사조직이 필요하다고 본 다른 간부들과 달리, 의열투쟁 노선을 고집했다. 그는 홀로 상해에 남아 단원들 간의 연락사무와 신입단원 교육 등을 맡았다. 류자명의 지도 아래 북경의 다물단과 연합해 행한 거사로는 김달하(金達河) 암살사건을 꼽을 수 있다. 중국 단기서 총리의 부관으로 정계의 유력자가 된 김달하는 1924년 김창숙에 의해 일제의 고급밀정이란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류자명이 김창숙·이회영과 협의해 1925년 3월 30일 자택에서 교살, 응징하였다.
또한 류자명은 서울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羅錫疇)의 의거를 후원하였다. 나석주는 조선총독부가 1910년부터 8년 동안 조선 전역에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자작농의 토지를 수탈하고 소작농의 쟁의를 진압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서울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하고자 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하던 김창숙이 무기를 구입해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실행자를 의뢰하자, 김구는 제자로서 천진에서 중국군 장교로 복무 중이던 나석주를 추천하였다. 이에 류자명 등이 나석주를 찾아가 거사를 의논하였고, 무기와 자금을 건네받은 나석주는 1926년 12월 단독으로 국내에 잠행하여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돌입해 폭탄을 던지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후 자결하였다.
한편, 김원봉 등이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한 1926년 10월 무렵 의열단 지도부는 더 이상의 암살·파괴 위주의 비밀결사로는 대중을 일깨워 혁명운동으로 이끌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조직체제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의열단 지도부는 1926년 겨울 광주(廣州)에서 개조회의를 열었다. 류자명과 김성숙 등이 토론과 숙의 끝에 참석자들은 “종래 전문적으로 폭력운동을 진행하던 편향을 개정”하기로 하였다.
1926년 12월 의열단은 간부회의를 통해 20개 조에 걸친 강령을 제정해 항일투쟁이념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이때 발표된 의열단 강령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의한 민족독립과 반봉건 민주정책에 의한 사회변혁이라는 두 가지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즉, ‘봉건제도 및 일제 반혁명세력의 삭제’를 기초로 인민의 자유권·평등권·참정권·복리권이 두루 폭넓게 보장되는 ‘진정한 민주국’ 건설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또 1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비롯해 사회복지기관의 설치와 노동자·빈농층에 대한 주거공급, 일체의 잡세 폐지까지 규정하여 매우 진보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에서 밝힌 ‘신조선 건설’ 이념을 구체화한 이 강령은 의열단이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 절망하며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같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폭압에 저항하는 2천만 민족의 분노를 대변하고 자유·평등의 민주적 독립국가를 만들려는 민족의 강렬한 염원을 실현하려 했음을 증명해준다.

필자 김명섭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 2001년 동 대학원에서 「재일한인 아나키즘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의 연구교수, 협동조합 위례역사문화연구소의 연구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한국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일본에서의 투쟁』,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등이 있으며, 「의열단의 對日 거사계획과 박열의 의열투쟁」, 「1920년대 한인 의열투쟁과 여성」 등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발표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