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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 Theme.4 의열단원의 불꽃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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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청년이 꿈꾼 조선혁명


빼앗긴 조국 연이은 불운

가혹한 실패 속에서도 가슴은 늘 뜨겁게 타올라


글 |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22세 청년 홍가륵은 1934년 11월 14일 본가가 있던 온양에서 체포됐다. 그는 그날 밤 수원경찰서로 끌려갔다가 곧바로 경기도 경찰부로 호송됐다.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경찰이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격문사건 아니면 상해 방면에서 중대 사명을 가지고 비밀리에 들어왔다가 검거된 것 같다며, 사건의 확대를 예상했다. 기자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 관계 사건이었다. 그것도 의열단이 중국 난징(남경)에서 비밀요원들을 교육시켜 조선과 만주국에 수십 명을 밀파했다고 하여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남경군관학교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 경찰에 맞선 심문 투쟁


“나는 조선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난징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는 조선혁명간부학교로 약칭)를 졸업한 후, 단의 사명을 띠고 조선에 들어왔소.” 


체포된 날 밤 시작된 경찰 조사에서 피의 사실을 묻는 경찰의 첫 번째 질문에 홍가륵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의열단에 가입한 사실도, 의열단이 난징에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사실도, 그리고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조선에 들어온 사실도 모두 순순히 인정했다. 피의 사실이 가볍지 않은 만큼, 혐의를 부인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첫 질문과 첫 진술 사이에 있었을 엄청난 고문과 구타이다. 그렇다. 일제의 경찰은 이쪽으로 너무 유능했다. 그들은 치사사건도 별로 겁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경찰의 고문과 구타로 숨진 조선인들이 어디 한두 명이던가. 


두 번째 이유는 경찰이 이미 사건에 대해 상당한 내용을 알고 있어 애초부터 혐의를 부인하기가 어려웠을 가능성이다. 조선혁명간부학교와 관련하여 최초의 체포자는 1933년 12월에 검거된 안병철이다. 그는 이육사의 처남으로, 이육사와 함께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으로 훈련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활동하다 심경의 변화를 느껴 경찰에 자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자수로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존재를 알게 된 경찰은 관련자들을 속속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육사도 검거를 피하지 못하고 1934년 3월 체포되었는데, 처남의 자수 사실을 뒤늦게 알고 몇 년 동안 자신의 아내까지 멀리할 정도로 원망했다고 한다. 


2기생의 경우에는 1934년 6월 김찬서의 자수로 전국적으로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면서 관련자 대다수가 체포됐다. 그로부터 약 5개월 후에 체포된 홍가륵은 2기생 중에서도 비교적 뒤늦게 체포된 경우에 해당한다. 그만큼 홍가륵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찰에 맞서 심문 투쟁을 벌여야 했다. 경찰은 그의 진술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지체없이 앞서 체포된 그의 동지들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홍가륵은 쉽사리 심문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11회까지 이어진 경찰 조사가 이를 방증한다. 동일한 사건, 다른 이들의 조사 횟수와 비교하면 배 이상 많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유


홍가륵은 어떻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됐을까. 경찰이 이를 추궁하자 홍가륵은 독립을 희망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단호히 말한다. 조선인이 일본인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사이에서 차별을 느끼는 순간, 그리고 그 차별이 매 순간, 대부분의 공적인 공간에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독립을 희망하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것은 막연한 희망이었다.


홍가륵은 말한다. 철이 들 무렵, 내 자신이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은 윤택한 생활을 하는데, 우리 조선민족은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극히 불우한 처지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선민족이 이렇게 불리한 지위에 있는 것은 온전히 나라를 빼앗긴 탓임을 알게 되었단다. 그때부터 언제나 그의 곁에 있던 성서는 단순히 신의 말씀이 담겨 있는 책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성서 속에서 자신이 갈 길을 발견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구절이었다.


홍가륵은 1913년 10월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에서 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기독교 감리교의 목사였고 어머니는 전도부인, 누나는 교회당에 부속된 유치원에서 일했다. 온 가족이 교회의 우산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가륵 역시 교회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이 정도라면 부유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홍가륵 집안의 경제 사정은 힘들었다. 홍가륵은 감리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학비가 나올 데가 거의 없었으므로 고학을 하다시피 하며 힘들게 졸업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홍가륵은 학비 전액과 생활비 지급,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조건이 좋은 만큼 경쟁률은 높았고, 그나마 조선인은 얼마 뽑지도 않았다.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던 홍가륵도 이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연이은 불운 끝에 그는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32년 11월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연히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먼 친척이 경영하는 봉천의 한 요리점에서 일하며 독립운동의 연결선을 찾는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을까. 조선을 떠난 지 8개월이 넘어가던 1933년 7월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요리점 손님으로 온 한 남자를 만난다. 그가 묻는다. 상해에 가면 조선인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는데 학비 없이 공부할 수 있으니 진학할 뜻이 있냐고. 홍가륵은 은밀히 묻는 그의 질문에 그것이 정확히 어떤 학교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찾고 있던 길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던 것 같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가륵은 그렇게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와 연결됐다. 


그가 꿈꾼 조선혁명의 방법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의열단이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난징에 설립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1932년부터 1935년까지 3년 동안 3기 120여 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항일독립투쟁의 전위투사가 되어 조선과 만주, 그 외 그들을 필요로 하는 각지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다. 


홍가륵은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생으로 1933년 9월 입학했다. 그는 석정이란 교관 앞에 불려 나가 의열단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홍가륵은 이때서야 확실히 자신이 의열단과 연결되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는 평소 동경하던 의열단에 입단하게 되어 안도했다고 말한다. 홍가륵은 경찰 앞에서 석정이 누구인지 본명을 모른다고 했지만, 석정은 김원봉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윤세주였다.


2기생들은 1934년 4월까지 7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7시 1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유물사관과 변증법, 각국의 혁명사와 의열단사, 당조직문제 등을 배우는 학과 시간과 전술학, 사격교범, 폭파교범 등 군사이론과 실습을 배우는 술과 시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원봉은 직접 조선의 정세에 대해 강의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에는 백범 김구도 만났다. 김구는 김원봉과 합의하여 졸업을 앞둔 2기생 가운데 15명을 뽑아 김구가 운영하는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으로 입학시켰다. 


홍가륵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개별적으로 진행된 김원봉과 윤세주의 지시를 받고 1934년 5월 초 본가가 있는 온양으로 돌아왔다. 그의 임무는 노농 대중 속에 들어가 동지를 획득하여 공고한 조직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등 조선혁명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온양에서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그가 무단으로 집을 떠난 사이 아버지가 실종신고를 했고, 그 결과 난징의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 같다는 경찰의 회답이 있어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다.


홍가륵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평양으로 향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의 몇몇 인맥을 이용해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한 후 조선혁명운동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는 평양숭실전문학교에 다니는 친구 정삼현을 만나 취직을 부탁하는 한편, 평양의 공장지대를 돌며 직접 구직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취업은 되지 않았다. 결국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이후 홍가륵은 전술을 바꿨다. 공안당국과 주변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노동자로 취업하기보다 안정된 직장에 취업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철도회사에 다니는 동창생의 소개를 받아 철도종업원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학력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시험에서 떨어졌다. 철도회사는 좋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을 원하지 않았다. 실패가 계속됐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홍가륵은 아산군에서 면서기 채용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서와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서기가 된다면 당국의 의심을 피할 뿐만 아니라 농민층에 접근하기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찰이 물었다. “황옥과 같은 행동을 취할 작정이었는가?” 홍가륵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옥은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로, 의열단이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원들과 함께 대규모 폭탄을 경성에 들여올 때 큰 도움을 줬던 경찰이었다. 황옥이 독립운동가였는지 밀정이었는지는 현재도 논란이 많다. 하지만 홍가륵이 꿈꾼 것은 밀정이 아니라 면서기의 신분으로 자신을 은폐하고 조선혁명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었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조선혁명을 위한 홍가륵의 활동은 여기서 멈췄다. 면서기의 채용 결과를 알기도 전에, 공부를 끝내고 경찰시험에 응시하기도 전에, 그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냈을지도 모른다.


22세 청년 홍가륵의 조선혁명운동은 이렇게 실패했다. 하지만 의열단은 실패하지 않았다. 의열단은 조선으로 파견된 1기와 2기 생도들의 체포가 계속되자 생도의 조선 파견을 대폭 축소했다. 실패 속에서 교훈을 얻고 새로운 투쟁방법으로 일제와 싸웠다. 1935년 민족혁명당이 창당되면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과 인적 자원은 조선의용대로 연결되었다. 


1935년 2월에 열린 재판에서 검사는 홍가륵에게 2년 6개월형을 구형했고, 판사는 구형량보다 많은 3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홍가륵의 활동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가슴은 결코 차갑게 식지 않았던 것 같다. 해방 후 그가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여운형이 조직한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는 모습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느 진보적인 지식인이 그러했듯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1948년 말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소요, 상해치사, 상해죄’로 4년형을 선고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정권의 좌익사범과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에 대한 불법적인 처형에 걸려 피살되고 말았다. 


필자 조한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에 참여했으며, 2006년부터 3년 반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다. 2014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레지스탕스』, 『해방 후 3년』,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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