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컬럼

[2020/11] 신(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테스형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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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컬럼 | 작은 소리 큰 울림


11월, 순국선열 그 희생을 기억하며

옷깃을 새롭게 여미자.


글 | 이정은 (월간 순국 편집위원)


지난 추석연휴 첫날, KBS2 TV에서 방영한 ‘대한민국 어게인-나훈아’ 비대면 공연은 코로나19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는 훈훈한 선물이었다. 이날 나훈아는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 부르며, 우리 국민들을 위로하는 ‘테스형’이란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이어 이 나라를 누가 지켰느냐고 질문하며, 바로 유관순 누나, 진주의 논개,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과 같은 보통 국민을 그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사실 나훈아가 든 인물들은 모두 순국선열들이었다. 순국선열들이 나라를 지키고 되찾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며 투쟁했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날이다. 11월에는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우리 옷깃을 다시 여미자.



나훈아 신드롬과 그 말에 담긴 메시지  


  가수 나훈아의 노래 ‘테스형’이 화제다. 열풍이다. 9월 30일 추석연휴 첫날 비대면 공연 TV방영이 기폭제였다. 그날 시청률이 29%. 한 매체는 ‘대기록’이라 했고, ‘나훈아에 취한 대한민국’이라 썼다. 공연 얼마 전 발표되었던 이 곡은 공연 이후 한주 동안 음원사의 스트리밍이 직전 주(9. 21∼27일)보다 3,733% 증가했다 한다. 그리고 언론과 대중들은 이구동성 그를 가황(歌皇)으로 불렀다. 


 이 열풍에는 가수의 소신과 철학에 대한 찬사도 한몫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힘든 국민들에게 “2020 대한민국 어게인!”을 외친다. 15년 만의 공연인데, 출연료 없이 했다. 정부에서 준다는 훈장도 “예술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며 마다했다. 북한에서 불러도 "거기서 하라는 대로 제약을 받으면서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한 소신 말이다. 북한의 지도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허리가 접히는 난장이들을 보아온 국민들은 그를 ‘국격과 국민 자존심’을 지킨 인물로 “엄지 척!”한다.   


무엇이 태스형 열풍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가? 


▪ 아픔이 묻어나는 웃음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첫 소절은 웃음으로 시작한다. 그것도 턱 빠지게 웃는 웃음. 그러나 그 웃음은 어쩌다가 웃는 웃음. 짓눌림 속에 터뜨리는 웃음. 아픔이 묻어나는 웃음이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요즘이다. 코로나사태로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어른들은 직장과 생업에서 내몰리고 있다. 일상의 모든 활동이 이전 같지 않다. 웃을 일은 줄고, 한숨과 고민은 늘어간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 상황이다. 테스형 노래는 그런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 내일에 대한 두려움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어제를 무사히 넘기고 오늘을 맞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내일을 맞는 것이 두렵다. 우리 삶, 우리 마음이 그렇다. 근현대사에 수많은 위기와 굴곡을 겪어 왔던 우리 국민은 웬만한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는 인내심과 낙관성, 무서운 감투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렵다. 가장 어려운 점은, 비 오는 날 밤길 운전처럼 앞날을 전망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기후변화, 인구변화, 기술변화, 산업변화, 가족변화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총체적인 난국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미-중 대립의 세계 패권구도의 변화가 겹쳤다. 이런 격변기에 국민을 결집시키고 총력 대응체제를 이끌어야 할 국내 정치는 대통령 5년 단임제로 인해 잦은 정치변동, 당파와 권력을 위한 정략 차원의 투쟁 만성화에 파묻혀 있는 듯하다. 여기에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쳤다. 한마디로 중첩된 거대한 격변과 고난의 쓰나미 속에 휘말려 떠내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으로서 두려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국민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질식당하고 있다. 국민들이 이 노래에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그런 이유일 것이다.  


▪ 절망적 분열의 심연 

 첫 소절에서 어쩌다 터뜨리는 웃음에 슬픔이 묻어난다고 했듯이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 부르는 천연스러움과 유머에 잠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곧 웃음은 절규가 되어 터져 나온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중략)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태스형 열풍은 “맞아 저게 내 심정이야!“ 하는 대중의 격한 공감이다. 빈곤과 전란 속에 생존에 급급했던 시절에는 사람들 간에 고통의 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공감과 연대감 결여의 단절사회가 되었다. 분단은 남북분단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 내에서 이념으로, 지역으로,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금수저와 흙수저로 갈갈이 찢겨져 있다. 반부격차, 권위주의 타파를 외치며 탄압 속에서 성장한 민주화 세력이 몇 차례 집권을 하면서 “욕하면서 닮는다”고, 그들도 어느새 그들이 비판하던 세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득권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받는다.  

 5년 단임의 정권교체가 반복되면서, 국가의 등뼈 구실을 하던 공무원은 주인의식을 잃었고, 대의정치는 조선시대 사색당쟁과 같이 되었으며, 신문 방송 등 전통 언론은 외면받는 처지가 되었다. 아스팔트 위에는 주말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 이런 현상이 국민 대중에게 주는 의미는 중첩된 위기의 쓰나미 앞에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어도 ‘답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광복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광복이 필요없는 나라를


   수년 전 광복절 특집공연 중에 나훈아는 말했다. “광복절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광복이 필요없는 나라였어야 했다.” 맞는 말이다. 100년 전에는 그렇다 치고 지금 우리는 이 중첩된 난국에 처하여 어떻게 하고 있는가? 광복을 기념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려고 하고 있는가? 여기에 국민의 불안과 의구심이 있다. 


 나훈아는 이번 공연 때도 말했다. “국민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지도자가 없었다.” 그 말은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시점이라는 말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는 말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느냐 국민 여러분이 지켰습니다. 유관순 누나, 진주의 논개,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 모두가 우리의 보통 국민이었습니다." 


 나훈아가 든 인물들은 모두 순국선열들이었다. 순국선열들이 나라를 지키고 되찾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며 투쟁했다. 나훈아의 이 말은 비장한 말이다. 국가가 있고 국권이 있을 때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희생을 국민들이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 고통의 심연을 헤쳐 나오는 데 반세기가 걸렸으며 최소 두세대가 희생했다. 우리 위대한 국민들은 국가가 기대할 수없이 되었을 때 스스로 국가의 주인의식을 갖고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 나섰다. 필자는 그것을 ‘비(非)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희생정신’이라 이름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역사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말 위대한 국민이다. 그러나 나라를 한번 잃고 나면 되찾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얼마나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는지, 그 역사를 생각하면,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총체적 위기상황이다. 국권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의 국토와 인적, 물적 자원을 조직화하여 총력 대처할 정부가 있을 때 상하 합심하여 다시는 국권을 잃고 국민이 세계 각지로 유리방황하며, 고귀한 목숨을 이름 없는 들판, 골짜기에서, 또는 형장에서 숱하게 희생하게 하는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훈아가 말했듯이 다시는 “광복할 필요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었을 때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즉,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논설을 써서 전 국민을 울렸다. 나훈아의 ‘테스형’은 2020년에 부르는 “시일야 방성대곡”이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1월에는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우리 옷깃을 다시 여미자. 다시는 그런 불행을 초래하지 않도록, “다시 광복을 기념하는 일이 없도록” 상하가 한 마음이 되어 우리 사회 각 부문을 크게 변혁하고 강화하여 대비하여야 할 결심을 새롭게 다지는 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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