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컬럼

[2021/06] 유월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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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망각과 무관심의 시간이 흘러  

기억과 섬김의 유월은 오는가


글 | 강한필(월간 순국 편집위원)


유월은 보훈과 기억의 달이다. 그 중심에 6일 현충의 날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보훈의 유월은 오고 있는가. 지난 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순국선열들의 후손은 못 배우고 가난하다.” 이 말은 진실이다.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어투만 빼면 그렇다. 그들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셨고, 그들은 가난과 싸우며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 가슴엔 긍지와 꿈이 있다. 그들이 당면한 가장 크고 절박한 꿈은, 반듯하고 자랑스러운 추념관을 세우는 것이다. ‘세사(世事)를 잊고 후사(後事)를 겨레에게 맡기노라’ 했던 순국선열의 마지막 절규에 국가와 국민 모두가 답할 차례다.


우리들이 헤쳐 온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피와 눈물로 얼룩지지 않은 달, 않은 날, 어디 있으랴. 그 자국과 흔적들은 어느 날 어느 달에도 무수히 얼룩져 있다. 특히 유월 청산의 얼룩은 더 깊고 더 짙게 깔려 있다. 


유월이 오면 지난 20세기가 겪은 가장 짙은 흔적, 6·25전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젊은이들의 푸른 피가 유월의 푸른 산하를 적셨다.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죽거나 다쳤고 나라는 폐허가 됐다. 의병의 날 6월 1일은 아득히 먼 날, 임진왜란의 슬픈 역사로 소환한다. 6·10만세, 6월 항쟁, 연평해전, 월드컵 경기. 유월엔 분노의 함성도 있었고 열광의 환호도 있었다. 이제는 전설이 된 보릿고개의 슬픈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계절적으로는 푸르름이 절정에 이르고 태양은 정열적인 열기를 쏟아내기 시작하는 유월은 보훈과 기억의 달이다. 그 중심에 6일 현충의 날이 있다. 


이날이 오면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그 나라를 지키려고 산화한 호국영령에게 오전 10시, 1분 동안 묵념을 올린다. 같은 순간 온 국민이 머리 숙여 기억과 존경의 마음을 모으는 행사는 유일하다. 그들의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자유와 풍요를 누린다.


예의없고 낯뜨거운 독립관 풍경

거룩한 순국선열 모신 곳인가


  2021년 6월, 독립관 앞에 다시 섰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분노가 끓어오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여기가 어떤 곳이고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 안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정자 같은 한옥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열의 영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독립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지 않다면 엄숙하고 소중한 추모 공간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좁고 초라하다.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慕華館) 건물을 1897년 독립관으로 개축하였고 그 자리에 1997년 현재의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지하 1층 178㎡, 지상 1층 377㎡, 정면 6간, 측면 4간 팔작 지붕 형태다. 1층이 추모관이다. 


8~9열로 되어있는 봉안대에는 수첩 크기의 영패 2,835위(位)가 빼곡히 모셔져 있다. 800여 위의 영패는 그나마 모셔질 자리조차 없다. 뒷줄에 봉안된 영패의 경우 순국 날짜, 장소, 순국 형태(사형, 전사, 옥사, 분사, 절사 등) 등의 작은 글씨로 쓰여진 부분은 읽을 수 없다. 옷깃을 여밀 분위기는 접어두더라도 여기가 나라 위해 거룩한 희생을 하신 순국선열을 모신 곳인가, 나라는 왜 존재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독립관 풍경이다. 예의없고 낯뜨겁다. 나라가 가난해서가 아니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한 거대한 기념관, 동상과 상징물, 공원 등을 국가나 지방 정부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 세웠거나 지금도 세우고 있는 국가가 이 나라다. 일부 지방 단체는 최근 몇 년 사이 시민단체 등에 수백 수천 억을 지원했다. 이런 자금의 지극히 일부라도 할애했더라면 선열의 희생에 상응하는 추모관은 세워졌을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문명 국가들은 그들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리기 위해, 그 나라 수도 가장 좋은 자리에 장엄한 추모관을 세워 그들을 모시고 추모한다. 이런 추모 공간은 대만에도 있고 공산국가인 중국에도 있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추모 대상이 방대하여 성(省)별로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전범국가인 일본도 도쿄 황궁 북쪽 9,300여㎡의 넓은 땅에 세워진 야스쿠니신사가 버티고 있다. 노일전쟁에서부터 2차대전까지의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이나 민간인 250만 명의 위패가 진열되어 있다. 더러는 영정과 유물도 함께 있다. 이들 중에는 2차대전의 1급 전범도 있고 그들로서는 치욕적이라 할 수 있는 청산리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의 위패도 있다. 봄, 가을, 이들을 위한 대규모 추모 제사도 지낸다. 일본 국민은 이곳을 정신의 고향이라고 높이 받든다. 


혹독한 핍박과 감시 당한 후예들 

교육과 생업의 기회 빼앗겨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계기로 번지기 시작한 의병 활동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의 반세기 동안 순국하신 선열은 15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신원이 확인돼 유공자로 인정된 순국 선열은 2%인 3,500여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자손 없는 무후(無後)요, 목숨과 함께 이름까지 사라진 무명(無名)이다. 이들은 ‘세사(世事)를 잊고 후사(後事)를 겨레에게 맡기노라’라고 했다. 국가와 국민 모두가 이들을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이유다. 그리고 그 후손들을 돌보고 지켜주어야 할 책무도 갖고 있다. 


‘독립운동 하면 삼대가 망한다’고 했다. 그 후예들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인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혹독한 핍박과 감시를 당했고 교육과 생업의 기회를 빼앗겼다. 


당면한 가장 크고 절박한 꿈은

자랑스러운 추념관 세우는 것


진정한 보훈의 유월은 오고 있는가. 지난 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순국선열들의 후손은 못 배우고 가난하다.” 이 말은 진실이다.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어투만 빼면 그렇다. 그들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셨고, 그들은 가난과 싸우며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 가슴엔 긍지와 꿈이 있다. 그들이 당면한 가장 크고 절박한 꿈은, 반듯하고 자랑스러운 추념관을 세우는 것이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독립운동 하듯” 모든 것을 쏟고 있다. 이들의 첫 번째 목표는 바닥면적 1,650㎡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추념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연면적 6,600㎡의 건물을 짓고 기본적인 기자재를 갖추는 데는 500억 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 이것을 마련하기 위한 이들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세사(世事)를 잊고 후사(後事)를 겨레에게 맡기노라.’ 순국선열의 마지막 절규에 답할 차례다. 지극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정의의 파도가

솟구칠 수 있다면

역사와 희망은 함께 노래하리.”

-세이머스 히니 <트로이의 치유> 중

Seamus Heaney <The cure at T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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