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컬럼

[2021/07] “개혁! 개혁!”…그러나 민생이 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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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들 희생으로 독립한 우리나라 

멋지고 빛나는 나라로 만들어야


글 |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  


고종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이 고수해왔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항을 했다.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33년 친정기간 동안 개혁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33년간 왕의 끈질긴 개혁 노력에도 백성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왕은 시대를 새롭게 하는 개명 개혁 군주를 꿈꾸었으나, 개혁은 민생과 괴리되어 겉돌고만 있었다. 개혁을 뒷받침해 줄 측근세력을 구축하는 데 끈질기게 집착했지만, 개혁 주도세력 주변에서 부패의 냄새가 진동했다. 측근 세력 배만 불렸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권력이 도전받을 때마다 외세를 불러들였다. 위기의 국면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안전에 악수에 악수를 거듭했던 것이다. ‘개혁’ 주문이 일상화된 이 시대에, 부동산 문제 해결에 20여 차례나 개혁 조치를 단행했던 것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개혁 노력이 국민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는지, 고종의 개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순국선열의 희생을 생각하며


7년 전 『김상옥 평전』을 쓸 때였다.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말’을 써야 했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서울 종로5가 효제동. 열흘간이나 서울 한복판 종로경찰서 폭파, 삼판통(현 후암동) 일제 포위망을 뚫고 극적 탈출, 일제의 추적과 비상 경계망을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따돌리며 잠적했던 그의 은신처가 탄로났다. 1천 명의 일본 군경이 4중으로 포위했다. 쌍권총을 들고 홀로 상대해야 했던 그 절박하고 처절했던 순간을 생각했다.그는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자신에게 겨누어 “결단코 굴복하지 않겠다”던 결의를 실행하여 생을 마감했다. 김상옥 의사의 순국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했다. 이렇게 글머리를 시작했다.      


겟세마네 동산


예수라는 분이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땀구멍에서 피가 쏟아지는 고통을 

받고 있었을 때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다. 


효제동


감상옥 의사가 1천여 일본 군경에 

4중으로 포위된 가운데

오직 홀로 맞서 3시간여 혈전을 치르던 그때 

경성이라 불렀던 서울 그 도시에

아무도 없었고 오직 김상옥만 

홀로 있었을까?

‘우리’라고 부르는 수많은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어쩌다 그를 홀로 싸우다 

죽게 내버려 놔두었는가?

한국에 사람이 없었던가, 하나도 없었던가.

1천 명의 일본 군경을 포위할

2천 명

3천 명

5천 명

1만 명

10만 명이 없었던가 말이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가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었을까?

내 목숨이 그에게 그만큼 가치 있었을까?


김상옥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우리, 결국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다. 

자유의 피값으로,

생명에 대한 값으로.


그저 주어지는 것은 없으니까

그가 대신 치렀다. 

우리는 그에게 빚졌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위해 값을 해야 한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김상옥 의사는 사업가였다. 그는 가난한 하급 퇴직군인의 아들. 소년 노동자 출신이었다. 8살 때부터 말총으로 체 메우는 일을 했다. 체는 가루나 액체를 걸러내는 얼개미 또는 거름망이다. 그러다 12살 때 대장간 노동자가 되어 무거운 망치를 들고 뜨거운 불 앞에서 일했다. 그 경험을 살려 동대문 앞 신작로에 영덕철물점을 차렸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직공이 50여 명이나 되고, 사업을 확장했다. 말총모자를 개발하여 히트상품을 만들었다.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불행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김상옥 의사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존경받으며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업도, 집도, 가족도, 그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후 가족들은 거리로 나앉다시피 했다. 부인 정진주 여사는 동대문 옆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에서 삯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살았다. 손자녀들은 가난 속에 제대로 공부도 못해 찌든 삶을 살았다. 


왜 이런 순국선열들이 많이 나와야 했던가. 물론 1차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이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 집권층이 제대로 정신 차려 만반의 대비를 했었다면 일본이 우리 국권을 빼앗고 우리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슬픈 고종    


고종은 슬픈 왕이다. 살아 눈앞에서 50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자기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아들 순종이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3년 후 그나마 이어왔던 왕조의 명맥도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도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 10년, 고통의 세월을 지켜보다 마지막에 그의 죽음으로 3·1운동의 불을 지피고 세상을 떠났다. 순국선열의 비극, 한국의 비극은 1차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비난해야 하겠지만, 고종의 부국강병 개혁 실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명군주 고종이 슬픈 것은 


고종은 44년간 제왕의 자리에 있었다. 그중 아버지 대원군이 대리정치를 한 10년을 제외하면 1874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제26대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 기간이 무려 33년이다. 고종이 포부도 없고 의지도 없는 무능한 왕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고종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이 고수해왔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항을 했다. 사람들이 흔히 알듯이 개항은 일본에 의해 강제되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아니었다. 고종은 조선의 방향이 개항과 개혁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재야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추진했다. 또한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동양의 사상과 윤리 바탕 위에 서양의 과학과 기술문명”을 표방하며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방 유생들은 계속 반대했고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등 정권의 배가 뒤집힐 뻔한 정변을 겪었다. 그때마다 왕의 리더십이 타격을 받았다. 세 차례나 아버지 대원군에게 권력을 양보하고 뒷방으로 물러나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권좌에 복귀하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 33년 친정기간 동안 개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의 나라 조선이 부국강병은 고사하고 망국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이 반세기를 불행과 굴욕,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굴욕과 불행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자 김상옥 의사와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서울과 지방, 국내와 해외의 거리에서, 감옥과 처형장, 이름모를 산골짜기에서 수없이 땀을 흘리고, 피를 쏟아야 했다. 그 가운데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무명 순국선열이 또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다.    


고종 비극의 세 가지 문제 


고종의 비극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33년간 왕의 끈질긴 개혁 노력에도 백성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개혁으로 인해 과중한 부담만 떠안고, 피로감만 누적되었다. 왕은 시대를 새롭게 하는 개명 개혁 군주를 꿈꾸었으나, 개혁은 민생과 괴리되어 겉돌고만 있었다. 이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개혁군주 고종에게 개혁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체감되지 못한 것이 최대 약점이었다.   


둘째, 33년 동안 개혁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고종은 개혁을 뒷받침해 줄 측근세력을 구축하는 데 끈질기게 집착했다. 왕후 민씨의 일가친척들을 끌어모았다. 이 측근세력으로 별도의 권력기구를 만들어 의정부라는 공식 정부기구를 무시하고 운영했다. 문제는 이러한 왕의 최측근 개혁추진 세력에게 국가와 국민과 왕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열정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없었다는 데 불행이 있었다. 개혁 주도세력 주변에서 부패의 냄새가 진동했다. 개항 6년 만에 터진 임오군란이 그것이며, 정부 밖에 내무부를 별도로 세워 민씨들로 채운 후 10년간 개혁을 밀어부친 끝무렵에 터진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의 부정부패와 이로 인한 동학농민운동 발발이 그것이었다. 개혁추진 기간 내내 안으로는 썩어서 곪아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의 군주 고종이 오랫동안 끈질기게 추진했던 개혁으로 국민들 삶이 윤택해지지 않았고, 국가가 부강해지지도 않았다. 개혁 주도 측근 세력 배만 불렸다. 


셋째, 민심을 얻지 못하는 권력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고종은 자신의 권력이 도전받을 때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위해서는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다.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것이 청국의 심각한 내정간섭을 불러들였다. 고종과 민비는 청국의 간섭에 진절머리를 앓았다. 그러면서도 2년 뒤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다시 청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3천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온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선의 창고는 비어있고, 국채가 쌓여 그동안의 개화정책은 성과가 없었다”고 혹평하며 “조선은 ‘못쓰게 된 배’라고 단정했다. 그는 왕 위의 왕처럼 안하무인으로 행세하며 고종 위에서 군림했다. 그렇게 굴욕을 당하였던 고종은 10년 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다시 청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결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받으며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이렇게 위기의 국면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안전에 악수에 악수를 거듭했다.


고종 친정 33년간, 고종은 무엇을 개혁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했던 것인가? 손가락은 ‘부국강병’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정작 고종이 했던 것은 손가락만 쳐다보고 손가락, 즉 자신의 권력 강화에 매달리며 민생을 향상시키지 못했다. 


개혁, 개혁의 외침 속에서 민생은 기본 


세상이 급변한다. 기술이 급변하며 산업구조가 급변하고 세계질서, 패권구도가 변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개혁, 개혁, 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좀처럼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못하고 있다. 구조적, 세계적 요인이 겹쳐 더 어려워지고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청년층은 결혼을 기피한다. 자녀를 갖지 않는다. 중년층은 실직 불안에 떤다. 내집 마련의 꿈을 접는다. 노년층은 길어진 수명이 짐이 된다. 삶의 압박 속에서 가정은 해체되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며, 자살율은 세계 최고이다. 불안의 그림자가 국민들 가슴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다. 어디에도 안정감을 가지고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개혁’ 주문이 일상화된 이 시대에, 부동산 문제 해결에 20여 차례나 개혁 조치를 단행했던 것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개혁 노력이 국민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는지, 고종의 개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개혁을 외치며 노력하더라도 그것이 국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안정감과 윤택함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전망을 주지 못할 때 나라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고종 33년 개혁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민생은 기본, 기본으로 돌아가자


순국선열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계신다. 이웃 강도에게 빼앗긴 나라. 어떻게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되찾아 세운 나라인데, 이 나라가 잘못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들에게 빚진 자로서 이 나라를 잘 지키고 발전시켜 후손에게 안전하고 번영하는 나라로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선열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독립하여 우리 손으로 나라를 운영하니 우리나라가 이렇게 멋지고 빛나는 나라가 되지 않았니?” 이렇게 우리 후손들에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종처럼 ‘개혁, 개혁’을 외치면서도 정작 권력을 잃을까봐 유능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으며 오직 권력의 불빛만 따를 뿐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겠다는 정신이 부족한 인물들로 측근세력을 형성하고 권력의 공고화에만 매달리다 끝나는 세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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