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컬럼

[2021/08] 광복절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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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논쟁에 ‘의’는 없고 ‘논’만 있어… 

국민통합 위해 ‘대화합의 역사관’ 확립해야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논의(論議)와 의논(議論)!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조금만 더 파고들면 ‘논’과 ‘의’는 한참 다르다. ‘논’이 혼자서 하는 것이라면, ‘의’는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다. ‘논’이 결론에 가까운 의미라면, ‘의’는 그 과정에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논’을 강조하다 보면 ‘시비’의 문제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 반면, ‘의’는 여럿이 함께한 사안을 따져보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조선의 역사는 대부분 시비선악(是非善惡)이라는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의 ‘참’ 지식인들은 이성계와 정몽주, 사육신과 세조의 문제를 놓고서, 양자 모두가 옳다는 입장을 정립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정몽주를 문묘에 모시고 그의 후손들을 우대하였다. 사육신을 복권시켰다. 이분법적 역사관을 뛰어넘는 ‘대화합의 역사관’을 확립한 것이다. 나는 이 대화합의 역사관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저력이라 생각한다. 


오십 년도 더 된 듯하다.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었다. 어느 해에는 중앙청 광장의 뜨거운 햇볕이 어린아이가 서 있기에는 좀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또 다른 해에는 시민회관 실내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시민회관에 간 날은 아마도 비가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식이 끝난 후에 점심으로 제공된 비빔밥을 상당히 맛있게 먹었던 듯하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내 기억을 자신할 수는 없다.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에 관여를 하게 되면서 지난 2016년에 나는 다시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냉방이 잘된 세종문화회관에서 어린 시절 중앙청 광장의 무더웠던 기억을 잠시 떠올렸던 나는 내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광복의 의미를 새기고자 하였다.


먼저 시각적으로 태극기를 향하여 경례를 올리고, 청각적으로 애국가를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불렀다. 이어서 정신적으로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님들께 정성어린 묵념을 올리며 독립운동, 순국선열, 애국지사, 조국광복 등의 단어를 되새기고 있던 나는 대통령의 기념사를 듣는 과정에서 그만 불편함을 느끼고 말았다.


나를 불편하게 만든 말은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는 표현이었다. 그즈음 박근혜 정부는 국정역사교과서에 1948년 건국절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은 그 다음해인 2017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며 ‘1919년 건국’을 규정하였다. 이른바 건국절 논란이 본격화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의 민낯


건국절 논란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08년에 이명박 정부는 1948년을 기준으로 건국 60주년 사업을 진행했었다. 그해 8·15 행사의 명칭이 ‘63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0주년’으로 정해지면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인 1998년의 ‘정부수립 50주년’ 기념행사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심지어 2008년 1월 열린우리당 출신 임채정 국회의장이 “금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자 국회 개원 60주년”이라고 했을 때만 해도 전혀 논란이 없었다.


무슨 문제일까? 1948년 건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산업화 세력을 긍정 평가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추앙했다. 이에 비해 1919년을 건국 기점으로 삼는 이들은 임정 시절부터 항일독립운동의 맥을 이어 온 백범 김구를 중심에 놓는다. 결국 이승만과 김구라는 인물을 자기편으로 하려는 편가르기가 바로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의 민낯이다.


주지하듯이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있는 두 축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다.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그리고 최단기간에 이루어낸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이다. 건국논리로 이전투구를 반복한다는 것은 현대사가 아직도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산업화와 민주화, 이승만과 김구 등등의 이분법적 역사관의 논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역사관의 피해자는 바로 국민들이다. 가장 큰 수혜자는 이분법으로 표를 얻고 세를 불리는 데 활용하는 일부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다양한 의견들을 조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 결론만을 추구하면 의논의 공간이 사라지면서 죽은 정치가 되고 만다. 여기서 나는 의논(議論)이란 말이 의(議)와 논(論)의 합성어란 점을 주목한다.


논의(論議)와 의논(議論)!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조금만 더 파고들면 ‘논’과 ‘의’는 한참 다르다. ‘논’이 혼자서 하는 것이라면, ‘의’는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다. ‘논’이 결론에 가까운 의미라면, ‘의’는 그 과정에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논’은 가치 판단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논’을 강조하다 보면 ‘시비’의 문제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 반면, ‘의’는 여럿이 함께한 사안을 따져보는 의미가 있다. 당연히 정치의 장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논’이 아닌 ‘의’를 살려내야 한다. 2016년 광복적 기념사에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1948년 건국을 말한 것은 ‘의’는 생략한 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2017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1919년 건국을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 시대의 다양한 의견들을 모아서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단위가 국가라는 공적 차원이 될 때, 오늘날 우리는 그 단위를 국회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 국회의 구성원들을 우리는 국회‘의원(議員)’이라 부르고 있다.


국회, ‘논’이 아닌 ‘의’를 위한 기구


그렇다! 국회는 바로 ‘논’이 아닌 ‘의’를 하기 위해 우리가 만든 기구(機構)이다. 그런데 그동안 여야 간의 건국논쟁은 ‘의’는 없고 ‘논’ 일변도로 진행되어 오고 있는 듯하다. ‘건국’ 논쟁을 벌이고 있는 오늘의 국회의원들의 행태에서는 ‘의원’의 모습은 찾기 어렵고, ‘국회논원(國會論員)’의 모습만 보인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이 될까? 


건국논쟁을 보면서 나는 조선조 지식인들의 고민을 상상해 보았다. 조선조의 ‘참’지식인이 해결해야 할 주제는 무엇보다도 이성계와 정몽주와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이성계가 옳고 정몽주가 틀렸다고 주장을 해버리면, 충과 효로 대표되는 조선의 국시(國是)는 그 존립근거를 상실해 버린다. 반대로 정몽주가 옳고 태조가 틀렸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것은 자신의 태생을 부정해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같은 고민은 계속된다. ‘세조가 옳으냐? 아니면 사육신이 옳으냐?’라는 고민은 이성계와 정몽주 가운데 누가 옳고 그른지를 놓고 고민하는 내용과 똑같은 상황이다. 세조를 부정해버리면 왕조국가에서 국가 자체를 부정해 버리게 되고, 사육신을 부정하면 국왕과 국가에  충성을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조선의 역사는 대부분이 시비선악(是非善惡)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는 모습이었다. 만약 어느 한쪽이 옳다면 다른 한쪽은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래서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숯불은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란 인식만을 조선의 지식인들은 가지고 있었다는 사고가 나의 학창시절에 형성되었었다.


대화합의 역사관이 곧 우리 민족의 저력


 하지만 뒤늦게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의 역사는 이분법적 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조선의 정치 전통 속에는 합의에 이르는 다양한 방식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순간, 위에서 말한 이성계와 정몽주, 그리고 사육신과 세조의 문제를 풀기 위한 조선의 ‘참’지식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참’지식인들은 이성계와 정몽주, 사육신과 세조의 문제를 놓고서, 양자 모두가 옳다는 입장을 정립하였다. 정몽주를 문묘에 모시고 그의 후손들을 우대하였다. 사육신을 복권시켰다. 이분법적 역사관을 뛰어넘는 ‘대화합의 역사관’을 확립한 것이다. 나는 이 대화합의 역사관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저력이라 생각한다. 이 대화합의 역사관을 통해 우리는 오늘의 건국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온 단어를 떠올려본다. 내가 20대였던 80년대의 키워드는 ‘민주’였다. 당시 모든 선거유세장에서 가장 많이 외쳐졌던 단어가 바로 민주주의 아니었던가! 이후로 ‘평화’, ‘복지’, ‘정의’, ‘공정’ 등이 화두로 등장했다가 근래에 특히 내년 선거를 앞두고는 ‘통합’이라는 용어가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가 된 듯하다.


하지만 국민통합이란 선거전단지에 쓰여진 후보자의 공약과 구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가능하다.

  보수가 진보를 ‘빨갱이’라고 공격하고, 진보가 보수를 ‘친일파’로 매도하면서 국민통합을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가며 국민통합을 해가는 길이 그리 어렵단 말인가. 국민통합을 ‘안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귀 밝고 눈 밝은 자는 정령 이 시대엔 없단 말인가. 

이상 불초한 자가 광복절을 맞아 떠오른 단상(斷想)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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