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관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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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기록에 담긴 일본인의 숨겨진 양심
글 | 김중위(월간 순국 편집고문)
금년 10월 26일은 희대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2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묵은 얘기지만 다시 한 번 한 영웅에 대한 재판 기록을 우리는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 기록을 통해 일본인의 양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1910년 2월 12일에 열린 최종공판 최종변론에서 일본의 관선 변호사 카마타 세이지는 “본 건의 발생지는 청나라의 영토이고 피고는 한국인이다. 한국 신민(臣民)을 재판하는 데 일본 형법을 적용할 수 없고 한국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법의 요건이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죄의 변호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후 공판에서 변론을 맡은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 역시 “법정형에서 가장 가벼운 징역 3년”을 주장했으며 “특별히 관대한 처분을 하는 것이 서거한 이등공작을 경모하는 길”이라고까지 안 의사를 극찬하면서 변론하였다.
재판관할권 문제 들고 나온
일본 관선 변호사 카마타 세이지
이토에 대한 저격사건이 났을 때 일본 정부에서는 이미 안중근 의사를 여순에 있는 관동도독부 법정에 세우기로 하고 또 극형으로 처할 것을 지시하는 메시지를 수도 없이 법원에 전달하였다. 안 의사를 위해 나서는 국제 변호사마저 거부하면서 오직 관선 변호사만을 고집한 것은 속된 표현으로 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자는 일본 측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선임된 관선 변호사들의 변론을 들어 보면 보통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이하 『안중근 사건 공판기』 최홍규 교주(校註), 정음사, 1979 참조).
1910년 2월 12일에 열린 최종공판 최종변론에서 일본의 관선 변호사 카마타 세이지(鎌田政治)라는 사람이 재판관할권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을 보면 자못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는 서론적으로 사법권이 행정권에 의해 훼손되었던 과거사를 들춰가며 이번의 경우에도 결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주문을 먼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본건의 발생지는 청나라의 영토이고 피고는 한국인이다. 한·청조약과 일·한보호조약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의 외교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단지 일본이 대행하고 있을 뿐이므로 한국 신민(臣民)을 재판하는 데 일본 형법을 적용할 수 없고 한국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법의 요건이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죄의 변호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얼마나 명쾌한 변론인가?
카마타 세이지 변호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거사 시점이나 장소로 보면 도저히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에 따라 재판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거사시점은 1909년 10월 26일이요, 거사 장소는 청나라의 하얼빈이며 거사 당사자는 한국인이다. 거사 당시 안 의사는 맨처음 러시아 군인에 의해 포박되어 러시아 법원으로 끌려갔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이었지만 그 역두만큼은 러시아 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담당판사 스트라조프는 안 의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재판할 수 없다고 하자 일본 측이 인계받아 일본 법정에 세운 것이다.
카마타 변호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거사 장소는 청나라이고 거사 장본인은 한국인인데 어떻게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으로 재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부당 불법의 근거는 ‘한·청조약’이었고 또 ‘을사늑약’이었다.
한·청조약과 을사늑약 내용으로 본
부당 불법의 근거
한·청조약이란 무엇인가. 1899년 9월 11일(광무 3년) 대한국과 대청국이 “우호를 돈독히 하고 피차 인민을 돌보려고” 체결한 통상조약이다. 그 조약 제5조에서 분명히 “재(在)한국 중국인민이 범법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중국영사관이 중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 처리하며, 재(在)중국 한국인민이 범법한 일이 있을 때에는 한국영사관이 한국의 법률에 따라 심판 처리한다”로 되어 있다(김태웅의 자료). 이는 청나라 영토 안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범법행위는 한국법으로 다스린다는 조약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안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사건의 재판관할권은 청나라도 일본도 러시아도 아닌 한국 법원에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을사보호조약(을사 늑약)은 또 어떠한가? 1905년 11월 17일에 이등(伊藤)은 일본 군대를 거느리고 경운궁에 들어가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면서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자 일본은 황제의 직인도 없이 외무대신인 박제순의 직인만을 찍고 마치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불법적인 늑약(勒約)이라고 부른다. 국제법적으로도 그 문서는 효력이 없는 가짜 문서다. 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는 가짜 문서이기에 그 문서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이 공란으로 있는 것이다. 이 문서의 제1조에는 “…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의 신민 및 그 이익을 보호함이 가함”이라는 조항이 있을 뿐이었다. 일본정부는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러시아로부터 안 의사 일행을 넘겨받았다. 카마타 변호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안 의사 사건을 한국정부로 이관시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때까지도 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안중근 의사를 극찬하면서 변론한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
카마타 세이지에 이어 오후 공판에서 변론을 맡은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水野 吉太郞)의 형량에 대한 변론을 보면 사뭇 처연함까지 느낄 정도로 세밀하고 안 의사의 거사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는 개구일성(開口一聲)으로 “본 건은 일본 형법이 아니라 한국 형법을 적용해야 하며 앞의 변호사가 말한 것처럼 무죄일 수밖에 없다는 소론을 같이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변론하였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현상은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이 판을 치던 유신전의 일본과 흡사하여 배일당(排日黨) 주장은 일본의 지사와 같다.” 이 한마디만 들어도 미즈노라는 변호사가 안 의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을 일이다. 변호사는 안 의사를 일본의 막부를 쓰러뜨리고 왕권 중심의 명치유신을 일으킨 지사(志士)와 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옹호하고 나섰다. 말하자면 지사이기에 그에 대한 형벌은 가벼워야 한다는 의중을 나타낸 것이다.
“유신 이래의 암살은 사꾸라다(櫻田)문밖의 변, 오쓰(大津)사건, 호시 도루(星亨)사건이 있는데 이들의 피고인과 비교할 때 안중근에게는 동정할 점이 있다.… 이토 공도 청소년시절 시나가와(品川)의 영국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등 안 의사와 비슷한 행위가 많았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현재 한국의 상황이 명치유신 직전의 상황과 같다는 것을 전제로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있었던 많은 지사들의 애국적 행위를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명치유신이란 왕은 있어도 허수아비일 뿐 모든 실권은 막부에 있었기에 막부의 권력을 왕에게 되돌려주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막부의 최고 실력자가 백주 대낮에 암살(1860년 3월, 櫻田 문밖의 변)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중의원 의장을 지낸 호시도루가 암살 당하는 사건 등이 연이어 터졌다.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1891년 5월 일본 방문시에 일본 경비경찰의 습격을 당하는 사건(大津사건)도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은 막부 정권을 해체하고 왕권을 세우기 위한 당시 일본 우국지사들의 행동양상이었다. 미즈노 변호사의 주장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야말로 일본에 빼앗긴 한국의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벌인 정당한 행위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안 의사에게 중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검사의 논고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중죄인을 가볍게 처벌하면 비슷한 사건이 속출하리라 검찰관은 말하지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망론(妄論)”이라고 하면서 오쓰(大津)사건의 주범도 사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예로 들면서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법정형에서 가장 가벼운 징역 3년”을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청원하는 형식으로 “변호인은 피고에 대해 가벼운 징역 3년의 처형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가능하면 더욱 작량감경(酌量減輕)의 여지가 있다”고 하면서 “특별히 관대한 처분을 하는 것이 서거한 이등공작을 경모하는 길”이라고까지 극찬하면서 변론하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들 관선 변호사들의 변론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은 채 선입관만으로 형식적인 변론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었다. 눈물겹도록 우회적으로 재판장의 감정을 거스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극형만은 모면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변론의 전 과정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필자는 일본의 양심은 바로 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일본에는 아베 전총리와 같은 류의 사람만 있는 나라가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양심과 함께 호흡하면서 한·일관계를 이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 전에 작고한 서울대학교의 명예교수인 배성동 박사는 어느 사석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의 목숨과 바꾸기에는 너무나 크고 아까운 인물이었다.” 필자 또한 이에 동감한다. 미즈노 변호사 역시 변론 중에 “만일 피고가 일본이나 다른 문명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경북 봉화 출생.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상계> 편집장, 4선 국회의원, 초대 환경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정치와 반정치』, 『눈총도 총이다』, 『노래로 듣는 한국근대사』 등 다수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 PEN클럽 고문, 한국시조협회 고문 등과 함께 월간 <헌정> 편집인, 월간 <순국> 편집 고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칼럼과 수필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