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 독립항쟁의 교훈과 순국선열 예우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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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겨레 위한 숭고한 정신으로 광복 쟁취
유공자 찾아 포상하고, 예우 베풀어야
글 | 윤우(월간 순국 편집위원)
일본이 임진왜란 침략에 이어, 19세기 후반 근세 재침략을 자행했을 때 우리 겨레는 좌시하지 않았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16년간의 ‘국권수호항쟁’(1894~1910)을 펼쳤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35년간의 ‘국권회복항쟁’(1910~1945)을 강행했다. 그 두 기간을 합친 51년간의 항일투쟁을 ‘독립항쟁(운동)’이라 이른다. 이같은 독립항쟁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만도 15만여 명에 이른다. 물론, 선열님들께서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공헌과 희생으로 되찾아 세운 나라,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모름지기 독립유공자를 찾아내어 포상해야 하고, 합당한 예우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건국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의 독립항쟁(운동)은 일본의 임진왜란 침략(1592~1598)에 이은 근대 재침략이 본격화된 1894년, 일본군이 우리 왕궁인 경복궁을 점령(7. 23)한 데 격분해서 그 직후 일어난 의병항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애국계몽운동, 만주와 연해주 후방기지 구축, 3·1운동, 임시정부의 총괄 항쟁, 의열투쟁,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 등 여러 방략으로 이어져서 1945년 8·15광복을 쟁취할 때까지 무려 5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라는 왜 소중한가?
인류사회는 세계화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나라 즉 국민국가는 여전히 국제 사회의 구성단위요, 지구촌 식구의 자격 요건 단위로서 그 지위에 변함이 없다. 지금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193개 회원국 모두가 크든 작든 저마다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나라’의 의미와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한편, 세계화 추세와 유럽연합(EU)의 발전 현상에서 보듯, 국경이 낮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단위 권능이나 역할에는 달라진 게 별로 없고, 각 민족의 전통과 언어 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나라의 소중함은, 오늘날 나라가 없어서 고통과 차별을 당하고 있는 중동의 쿠르드족과 유럽의 집시족, 중동·아프리카 난민 등의 처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는 일제의 침략-식민지배로 반세기 동안(1894~1945)이나 ‘나라 없는’ 고통과 설움을 겪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더구나 우리는 그 고통에 더하여, 광복 후 국토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란까지 겪었기 때문에, 어느 민족보다도 나라가 소중함을 잊을 수 없는 당사자들이다.
선열님들의 거룩한 나라사랑 정신과 희생

우리 겨레는 유사 이래 930여 차례의 외침을 당했다. 그때마다 백성이 스스로 일어나 무장을 갖추고 ‘의병’이 되어, 관군과 함께 외적을 물리쳐 왔다. 근세 의병의 정신은 ‘사생취의정신(捨生取義精神)’ 즉, “의(義·옳음)를 위해서는 생명을 돌보지 않는 정신”과 ‘성패불수 정신(成敗不須精神)’ 즉, “나라 위해 옳은 일을 하는 데는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실 등을 따지지 않고 해내는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위험하고, 불리하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신은 물론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기약할 수도 없는 독립을 향해서 항쟁을 계속했고 마침내 광복을 쟁취한 것이다. 1945년 8·15광복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겨레가 ‘쟁취한 것’이다.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이 앞당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독립항쟁이 없었다면, 열강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1943) 등이 없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강의 전후처리는 냉혹하기 짝이 없다.
일본이 임진왜란 침략(1592~1598)에 이어, 19세기 후반 근세 재침략을 자행했을 때 우리 겨레는 좌시하지 않았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16년간의 ‘국권수호항쟁’(1894~1910)을 펼쳤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35년간의 ‘국권회복항쟁’(1910~1945)을 강행했다. 그 두 기간을 합친 51년간의 항일투쟁을 ‘독립항쟁(운동)’이라 이르는 것이다.
이같은 독립항쟁에는 많은 겨레의 희생이 따랐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목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만도 15만여 명에 이른다. 계열별로는 의병이 10만여 명으로 가장 많고, 만주지역 등의 무장항쟁 4만여 명, 그 외 3·1운동과 의열투쟁 등 국내 항일로 1만여 명 등이다. 1919년의 3·1운동과 대한민국 건국도 실은 그 이전(1894~1918)에 10만여 의병 등이 이미 피 흘린 토대 위에 이룩된 것이다. 또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온갖 고초를 함께 겪은 애국지사도 수십만 명이었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겨레의 총수는 2백만 명이 넘는다.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가 합당한가
다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보훈정책은 6·25전란 등으로 늦어져서 1962년에야 시작되었다. 1894년 초기 의병이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때로부터 치면 68년 만이다. 두 세대가 지난 연후 시작된 셈이다. 광복 17년 후이다. 그것도 당시 군사정권이, 사회적 과제였던 6·25전상자 문제 등에 대한 군사원호 방책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군사원호를 중심으로 한 정책이다 보니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도 군사원호의 잣대에 맞추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거기에 이른바 ‘형평성’ 논리도 가미되었다.
그 결과 독립항쟁의 특성에 합당한 보 훈정책이라기보다, 군사원호 시책과 비슷하게 엮어지기도 했다. 나라의 보호가 미치지 않는 조건에서 의병으로 ‘자발헌신’하여 온갖 고초를 오래 겪다 전사한 분과 나라의 보호 아래 국방의무 이행 중 전사한 분이 같은 ‘전사’ 개념으로 예우되는 수도 생겼다. 물론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은 같다. 그러나 ‘전사와 사고사’, ‘의로운 죽음과 실연자살’의 가치가 다르듯이, ‘죽음’의 가치는 다양한 것이다.
또 보훈이 대일청구권 타결을 계기로 본격화된 것이었는데도, 정작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순국선열에 대한 보상(사망보상금 등)이 없었다. 어느 나라든지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분의 생명과 관련한 ‘사망보상’을 최우선시하는 관례와도 다르다. 그런 기초적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광복 후 가장 먼저 마련했어야 하는 ‘순국선열 추모관’이 아직도 지연되고 있다.
“독립운동자는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을 반영한 듯, 초기 입법과정에 독립유공자의 경우 순국선열은 3대(손자), 애국지사는 2대(아들)까지 보상하다가 1967년 각각 1대를 추가했었다(기금법 지원). 그러나 1973년 유신 때 각각의 +1대를 삭제해 버렸다. 그런데 최초의 순국선열 3대(손자)까지 규정에도 허점은 많았다. 순국선열의 경우 손자까지라 하면, 얼핏 3대로 생각하게 되지만, 실제는 2대(아들, 손자)에 그치는 것이다. 선열 본인은 이미 안 계시기 때문이다. 또 초기 의병 같이 공적 수립이 60여 년 전인 경우, 유족은 이미 손자 또는 증손자 이하대로 이어져서 보훈대상자는 손자 1대-1인으로 그치거나, 아예 대상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보훈대상이 말로는 3대지만 실제로는 한 대-한 사람 또는 한 명도 없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한 허점을 보완해서 지금은 해당 유족이 없는 경우, 유공자와 가장 가까운 비속 1인에게 보상토록 되어 있다(2012.7. 법개정). 그러니까 증빙이 늦어 늦게 서훈받는 독립유공자는 유족 1인으로 보훈이 끝나고 마는 형편이다. “3대 아닌 1대”인 것이다. 또 서훈만 있고 보훈은 없는 경우도 많다.
물론, 선열님들께서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공헌과 희생으로 되찾아 세운 나라,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모름지기 독립유공자를 찾아내어 포상해야 하고, 합당한 예우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건국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보훈기본법 제18조는 “희생과 공헌에 상응하는 예우와 지원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법의 취지를 살린다면 독립유공자에게는 ‘형평성’ 아닌 ‘차별성’ 예우를 적용함이 타당한 것이다. 그래야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발 헌신’ 정신이 살아난다. 보훈이 불공정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라사랑’ 정신이 희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