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 나날이 새로워지는 아름다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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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정토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
조국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 되뇌이다
글 | 김중위(월간 순국 편집고문)
독립과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 만에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무역대국이 되었지만 나라사랑하는 국민들의 마음은 예전 같지 않다. 백범이 꿈꾸었던 문화대국에로의 꿈은 아직도 요원하고, 우남이 바라던 날로 새로운 나라가 되도록 하자던 다짐도 이제는 박물관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언제 한 번 우리 국민들이 나라사랑하지 않은 적 있으며 나라 위급할 때 앞장서지 않은 적 있었던가 해서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했고 일제의 침탈 시에도 그러했다. 왕족은 뒷걸음을 쳤어도 백성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군주에게 자결하라고까지 외쳤을까!
해방되던 날 동경 시내 언덕길
한 노인과 김소운 선생의 고백
이 얘기를 전해 준 김소운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에 머물며 집필한 자신의 유명한 <목근통신(木槿通信)>에서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조국에 대한 애타는 목마름을 절규하였다.
이름 모를 노인은 해방으로 조선을 되찾은 기쁨을 노래한 것이요, 김소운 선생은 되찾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조국이 비록 헐벗고 굶주리고 반 토막이 난 채로의 더러운 문둥이 같은 조국이지만 자신에게는 “어느 극락정토(極樂淨土)보다도 더 그리운 어머니의 품”이라고 외치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을 때에 조국을 되찾는 데 앞장섰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조국의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백성은 나라사랑에 목말라하고
지도자들은 조국의 미래 모습 그려
백범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자신의 소원을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못 박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보다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 바로 그러한 문화의 힘으로 세계평화의 중심축이 되는 것을 소원하면서 백범은 쓰러졌다.
해방된 조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이상은 또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의 취임사에서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親善)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것이요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도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부패한 정신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나니…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舊習)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년 반석 위에” 세워 나가자고 역설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필자의 머릿속을 섬광처럼 지나가면서 오늘이 있기까지의 숱한 한(恨)들이 한강물보다도 더 짙푸르게 흘러 이루어진 내력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용해 보았다. 필자는 여기서 이름 없는 백성들도 왜정 때에는 얼마나 독립을 갈구하면서 나라사랑에 목말라하였는가를 그리고 지도자들 또한 얼마나 깊은 사상적 통찰력으로 장차 세워질 나라의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가를 다시 한 번 되뇌이고 싶었던 것이다.
독립과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 만에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무역대국이 되었지만 나라사랑하는 국민들의 마음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다. 백범이 꿈꾸었던 문화대국에로의 꿈은 아직도 요원하고 우남이 바라던 날로 새로운 나라가 되도록 하자던 다짐도 이제는 박물관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언제 한 번 우리 국민들이 나라사랑하지 않은 적 있으며 나라 위급할 때 앞장서지 않은 적 있었던가 해서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했고 일제의 침탈 시에도 그러했다. 왕족은 뒷걸음을 쳤어도 백성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죽 했으면 군주에게 자결하라고까지 외쳤을까!
홍주의 의병장 이설(李楔) 선생 같은 이가 바로 그랬다. “즉위하신 지 40여 년 동안에 칭송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고 기록할 만한 정치도 없습니다.…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며 죽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이제 마침내 망국의 군주가 되었으니…명(明)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이 나라가 망했을 때 자결했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나서 본인 또한 숱한 옥고 끝에 순국하였다(김기승).
어디 그분뿐이겠는가!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 선생 또한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1905)되자 을사5적 척결을 주장하면서 고종황제에게는 순국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소로서 말이다. “존경하는 폐하! 지금 정세로 보아서는 을사조약을 반대한다고 해서…국권을 회복할 희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주저치 마시고 폐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라 전원이 사생결단으로 왜적을 무찌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소 뒤에 본인 또한 민영환 선생의 자결 순국 소식을 듣자마자 죽을 각오로 종로거리로 나와 군중 앞에서 “나도 나라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헤이그 밀사의 책임을 물어 조선(순종) 정부가 그를 사형에 처하자 “황제는 망국의 이용물로 전락되고 말았다”고 하면서 “임금이 나라를 보호하고 인민을 구조하는 임무를 게을리하면 처단되거나 축출되어야 한다”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연해주에서 병사하였다.

순국열사와 이름 없는 의병들 생각하면
우리의 앞날 결코 어둡지만은 않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치 많은 순국열사들과 의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의병들과 애국지사가 있어 우리의 오늘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앞날은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고 믿어진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면 ‘담바고 타령’과 금반지 모으기로 그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려는 저력 있는 민족 아니던가!
지금부터라도 그때의 그 열정으로 우남과 백범이 함께 꿈꾼, “나날이 새로워지는 아름다운 나라” 만드는 데에 국민 모두가 힘을 합해 나갈 수는 없을까? 어쩐지 나라의 운명이 밝은 기운을 타고 뻗어가는 기세가 보이지 않아 하는 얘기다.

경북 봉화 출생.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상계> 편집장, 4선 국회의원, 초대 환경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정치와 반정치』, 『눈총도 총이다』, 『노래로 듣는 한국근대사』 등 다수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 PEN클럽 고문, 한국시조협회 고문 등과 함께 월간 <헌정> 편집인, 월간 <순국> 편집 고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칼럼과 수필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