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 독립운동 기념사업 단체들, 무엇을 위한 다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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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이름에 기대어
산 자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자
글 | 김희곤(월간 순국 편집자문, 안동대 명예교수)
독립운동 기념사업 단체들이 정치세력의 움직임에 맞물려 돌아가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정치세력이 국민을 편 가르니까, 기념사업 단체들도 덩달아 여기에 맞춰 춤춘다. 공적인 단체가 특정 정파를 지지하고 나서는 바람에 중립성을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각한 국민 분란을 일으킬 정도까지라는 말이 들려온다. 이들 단체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권을 장악해야 하는 정치세력의 목표보다는 나라를 구하는 데 목숨 바친 선열의 지향이 훨씬 원대하고 고귀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민족적 양심에 바탕을 두었던 독립운동가의 뜻을 잇겠다면 온 나라가 보수와 진보라거나, 종교, 지역성 등으로 편 가르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이때, 이를 해결하는 길, 통합을 일구어내는 데 앞장서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은가.
싸움판 벌어지고 고소ㆍ고발 이어져
독립운동가의 뜻 잇겠다면 통합 일구어야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 단체는 상당히 많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것을 보면 공법단체 1개, 재단법인 7개, 사단법인이 113개이다. 이것 말고 행정안전부에 등록된 법인도 있으니, 대개 120개를 조금 넘어 보인다. 유일한 공법단체는 광복회인데, 독립유공자 본인이거나 그 유족 가운데 연금을 받는 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들어 생존 유공자는 몇 분뿐인 데다가 고령이니, 실제 활동하는 회원 대다수는 후손인 셈이다.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기념 단체 가운데 인물을 기리는 단체가 70%쯤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의병이나 3·1운동, 6·10만세운동 같은 특정한 사건과 대동단·의열단·신간회와 같은 단체를 기념하는 것, 그리고 특정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묶은 것도 있다.
이를 주도하는 인물은 직계 후손이 다수를 이루지만, 주제에 따라서는 기념사업에 뜻을 함께하는 일반인이 다수를 이룬 경우도 여럿이다.
정치세력 편 가르기에 장단 맞춰
기념하자던 선열들 욕되게 만들어서야

그런데 그토록 당연한 목적이지만, 왠지 들먹이기가 여간 껄끄럽지 않다. 근래 기념사업 단체들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다툼을 보노라면, 여느 골목길 싸움판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기념사업 단체들이 정치세력의 움직임에 맞물려 돌아가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정치세력이 국민을 편 가르니까, 기념사업 단체들도 덩달아 여기에 맞춰 춤춘다. 공적인 단체가 특정 정파를 지지하고 나서는 바람에 중립성을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각한 국민 분란을 일으킬 정도까지라는 말이 들려온다.
이들 단체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권을 장악해야 하는 정치세력의 목표보다는 나라를 구하는 데 목숨 바친 선열의 지향이 훨씬 원대하고 고귀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민족적 양심에 바탕을 두었던 독립운동가의 뜻을 잇겠다면 쉽게 정치적인 편 가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온 나라가 보수와 진보라거나, 종교, 지역성 등으로 편 가르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이때, 이를 해결하는 길, 통합을 일구어내는 데 앞장서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들 단체가 싸움판을 이어간다면, 걱정거리에 지나지 않게 되고, 기념하자던 선열을 오히려 욕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에도 대립과 갈등 있었지만
공통의 목표 잊은 일은 없어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분화와 대립, 갈등이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잊은 일은 없다. 다만 그를 향해 가는 길에서 이념이나 방법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 독립운동 50년 역사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전후반으로 나눠보면 성격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전반부에서 두 가지 굵은 줄기가 보수 유림의 의병전쟁과 진보 신지식인의 구국계몽운동이었다. 무장항쟁을 통해 국권을 지키면서 자주권을 가진 군주국가를 지켜내려던 것이 의병전쟁이고, 열강의 문명을 받아들여 신지식인을 기르고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자주 공화주의 근대국가를 이룩하자던 것이 구국계몽운동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는 같은 목표를 가졌지만, 이들은 등 돌리고 갈라섰을 뿐만 아니라, 서로 격렬하게 공격할 지경이었다. 그것도 나라 망한 뒤까지 그러했다.
이를 통합하고 나선 첫걸음이 1915년 (대한)광복회의 출범이었다. 보수 유림의 무장항쟁과 진보 신지식인의 공화주의가 하나로 합류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 기지 지원 사업에 몰두하였다.
3·1운동 무렵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후반부의 분화 현상이 시작되었다.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면서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또 한 번의 보수·진보 틀이 양립했고, 곧이어 통합 노력도 나타났다. 마침내 1926년 좌우세력이 손잡고 6·10만세운동을 펼쳤고, 중국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과 이듬해 국내외에서 펼쳐진 신간회운동으로 그 맥을 이어갔다.
1930년대에도 꾸준하게 독립운동 세력의 좌우통합이 추진되다가, 1940년대에 들어 충칭시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일구어냈다. 이 결실은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이념이나 방략의 차이를 극복하여 하나로 통합을 달성해낸 교훈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함께 했다면
보수와 진보 모두가 가치 있어
보수와 진보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침입하는 병균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는 면역기능이 보수요,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어 백신을 투여하거나 수술해야 하는 것이 진보다. 보수가 잘못이라면 의병전쟁을 펼친 유림이 틀린 것이고, 진보가 잘못이라면 구국계몽운동을 펼친 인물들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두 노선 모두가 민족적 양심에 맞는 길을 걸었다면,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함께 했다면, 모두가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더구나 분화되자마자 통합을 추구하고 또 이를 일구어낸 것은 더더욱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1920년대 중반 동아시아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이런 빛나는 성과를 가졌는데, 정작 이를 기념하는 단체들 일부가 분열과 투쟁에 몰입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정치판에 기대어 보수와 진보를 내세우며 투쟁의 새 판을 열기도 한다. 통합을 일구느라 애를 쓴 조상의 공적은 내던져두고, 후손은 다시 분열의 극으로 달려간다.
죽은 자의 이름에 기대어 산 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놀랍고 부끄러운 현실은 언제 끝이 날까. 주변 열강의 어깨싸움이 갈수록 격해지고, 일본조차 ‘일제’로 성큼 옮겨가고 있는 현실에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