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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03] 충남 청양의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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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항거해 치열하게 항일투쟁 벌인 기호유림 본고장

운구 행렬에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글 | 전혜빈(국가보훈처 연구원) 

청양(靑陽)은 기호유림의 본고장으로 옳고 그름, 의와 불의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지닌 선비의 고장이었다. 1906년 국내 최고 최대의 의병투쟁이었던 홍주 의병의 의병장 민종식이 이곳 사람이며, 홍주 의병 운동에서 청양 지역민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청양 일대는 다른 지역보다 늦게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했지만, 인구가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을 포함한 각 면의 마을 주민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특징이 있다. 청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곳으로, 현재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이 되었다.  

청양(靑陽)은 “콩밭 매~는 아~낙~네야” 노래의 ‘칠갑산’과 청양고추 등이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충청남도 서남부 두메산골 청정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치열한 항일 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이다. 

이곳은 기호유림의 본고장으로 옳고 그름, 의와 불의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지닌 선비의 고장이었다. 또한 구한 말 정부군이 동학교도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청양 일대에서는 폭정에 저항하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1904년 지계(地契) 사업에 대한 농민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1906년 국내 최고 최대의 의병투쟁이었던 홍주 의병의 의병장 민종식이 이곳 사람이며, 홍주 의병 운동에서 청양 지역민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홍주 의병 정신은 1910년대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의 활동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항일의 지역성은 이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독립선언문 가져온 홍범섭(洪梵燮)

청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정산면(定山面) 백곡리(白谷里)에 사는 당시 스무 살 청년 홍범섭(洪梵燮)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홍범섭은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백곡리로 이주하였고 한문을 배우다 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일본식 교육이 맞지 않다고 여겨 학교를 그만둘 만큼 민족정신이 강한 청년이었다. 홍범섭은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를 듣고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돌아왔다. 그리고 같은 마을의 임희재(任毅宰, 38세), 윤석희(尹錫禧, 29세), 홍세표(洪世杓, 33세), 박상종(朴商鍾, 39세) 등과 만나 선언문의 내용을 살펴보고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우리도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더 많은 청년들이 홍범섭과 합세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이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정산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오후 3시경 시장에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그 속에서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시장에 있던 100여 명의 장꾼도 동조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함께 만세를 고창하였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정산헌병분견소 헌병들은 곧 정산면 장터로 출동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30여 명의 인사들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필현(金弼鉉, 32세)은 헌병에게 총탄을 맞았고 윤구학(尹龜學, 31세)은 칼날을 맨손으로 막다가 손가락이 끊어지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권흥규(權興圭)의 순국 

독립만세를 주도한 인사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모습을 지켜 본 군중들은 일제 헌병에게 그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중에서도 정산향교 직원(直員)인 권흥규(權興圭, 60세)는 가장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주도한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권흥규는 이날 아침 쌀 1말을 가족에게 구해주고 15리 길을 달려 정산 장터로 갔다가 시장에 나온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그리고 홍범섭, 임희재, 윤석희, 홍세표 등의 주도자가 체포되자 그들을 따라서 정산 파견대로 달려갔다.

“우리나라는 독립하여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니 어서 빨리 물러가라.”

강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사람은 700여 명으로 늘어나고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이처럼 군중들의 연행자 석방 요구가 더욱 격렬해지자, 헌병들은 만세 군중들을 향하여 두 차례 총격을 가해 무력으로 위협하였다. 이에 격분한 권흥규는 자신의 앞가슴을 풀어 헤치며 나아갔다.

“나를 쏠 테면 쏴라. 이놈들!”

그러자 헌병들은 모두 권흥규의 가슴을 향해 사격하였고 결국 그는 가슴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운구 행렬 시위와 독립만세운동 확산

다음날인 1919년 4월 6일, 마을 사람들은 전날 순국한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故人)의 집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운구하였다. 권흥규의 친척인 권영진(權寧鎭)은 명정(銘旌)에 “배일사 권흥규지구(排日士權興圭之柩)”라고 크게 쓰고 군중들이 열을 지어 뒤따랐다. 약 300명 군중들은 안심리로 가는 길목마다 노제(路祭)를 지냈다. 운구 행렬이 지곡리(池谷里)에 도착했을 때 전성순(田聖淳)과 권영진은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또다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에 맞서다 돌아가신 권흥규 공(公)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독립만세를 외칩시다!”

이때 전날의 만세운동을 보고받은 공주 헌병수비대와 청양 헌병분대는 보병과 함께 목면 면사무소로 가는 언덕에 매복하고 있었다. 운구 행렬이 곡소리가 아닌 독립만세를 외치며 언덕을 오르자 헌병들은 운구 행렬에 무자비하게 총탄을 쐈다.

“저들이 만세 시위를 못하도록 전부 사격하라.”

헌병대의 무차별 공격으로 고인인 권흥규의 조카딸과 상여꾼 최윤안(崔胤安), 유행길(柳行吉) 장응렬(張應烈), 윤광원(尹光遠), 김국삼(金國三), 권영진 6명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그리고 권흥규의 어
린 딸은 헌병대의 칼날을 손으로 막다가 손가락 4개가 절단되고 볼에 총탄이 관통하였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러한 일본 헌병의 공격으로 군중들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런데 전날 밤, 비가 많이 온 탓에 군중의 옷에는 흙탕물이 마구 튀었다.

 “옷에 황토가 묻은 사람은 헌병들이 체포한대. 어서 옷을 갈아입자.” 

그런데 헌병들은 옷을 갈아입은 사람을 오히려 수상하게 여겼다. 

“너는 옷이 왜 이렇게 깨끗하지? 방금 운구 행렬을 따라 만세를 불렀지? 따라와!”

헌병들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운구 행렬은 권흥규의 본가에 무사히 도착했고 이때 참여자와 문상객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홍범섭을 중심으로 시작된 정산면과 목면의 독립만세운동 결과 10여 명의 피살자와 부상자가 나왔으며 징역 및 태형을 받은 사람이 약 200명 가까이 발생했다.

 같은 날 정산 광생리(光生里) 및 그 외 두 개의 리(里)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 측 문서에는 당시 500명의 일반민이 시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독립만세운동의 확산은 권흥규 운구 행렬을 통한 독립만세운동에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정산면을 비롯한 운곡면(雲谷面), 청남면(靑南面), 남양면(南陽面), 비봉면(飛鳳面) 등 청양의 다른 면에서도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등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해졌다. 

청양 일대는 다른 지역보다 늦게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했지만, 4월 초 집중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인구가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을 포함한 각 면의 마을 주민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특징이 있다. 

청양은 일제강점기 충남에서도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청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역사를 통해 당시 지역민들이 일제에 맞서 싸웠던 정신을 기릴 수 있다.  

필자  전혜빈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강대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역사 관련 강의와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도시유적관 특별전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는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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