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2022/04] 충남 아산의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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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 학생· 천도교인·기독교인 “대한독립만세!”
역사·문화 달라도 나라사랑은 똑같아
글 | 전혜빈(국가보훈처 연구원)
1914년 아산, 온양, 신창의 3군이 일제의 행정구역 강제 통폐합으로 아산군이 되었다. 세 지역은 역사적 문화적 성격이 달랐다. 구 온양이 전통 유교라면, 서쪽 신창 지역은 동학과 천도교, 북쪽 구 아산 지역은 천주교, 개신교의 영향이 강했다. 독립운동에서도 각각의 성격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선장면 지역 천도교인들은 동학농민운동에, 유림 인사들은 홍주 등지의 의병에 참여하고, 광복회 충청지부를 결성하여 1918년에는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온양 읍내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온양공립보통학교가 만세시위에 큰 역할을 했다.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강대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역사 관련 강의와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도시유적관 특별전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는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
● 3월 11~12일
보통학교 학생들의 온양장터 시위

“교장이 우리를 설득했지만, 독립만세운동을 그만둘 수는 없어. 내일 12일 장날을 이용해서 거사를 진행하자!”
대부분 전국의 보통학교 학생들 시위는 1차로 끝나는데 온양보통학교 학생들의 경우 달랐다. 이튿날인 3월 12일 온양 공립보통학교 3·4학년 학생 30여 명은 등교하지 않고 온양 장터로 나아가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다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온양헌병대에서 반장 이하 13명이 출동하여 주도자 5명이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 3월 14일
천도교인과 온양 보통학교 학생의 3차 온양장터 시위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천도교 도사(道師) 권병덕(權秉悳)의 지시를 받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온 현창규(玄昌奎, 23세)는 3월 14일 서만수(徐萬壽, 32세), 권태원(權泰源, 38세) 등과 함께 온양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권병덕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주시며 만세운동을 펼치라고 하셨어요. 형님들 도와주세요.”
“좋네. 온양보통학교 어린 학생들도 했으니, 우리도 하세!”
이들은 온양 장터에 나아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이때 온양보통학교 학생 100여 명도 참여하여 3번째 만세시위를 벌였다. 학생과 장꾼이 함께 어울려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날은 다행히 발포가 없어 희생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헌병 6명과 수비대 보병 10명을 출동시켜 독립만세 시위를 막았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한 18명이 검거되어 태형을 받았다.
● 3월 31일 백암리, 4월 2일 신창면 만세시위
염치면(鹽峙面) 백암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 옆에 있다. 백암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이화학당 학생이자 백암교회 신자였던 김복희(金福熙, 17세)와 영신학교(永信學校) 여교사 한연순(韓連順, 22세)이었다.
김복희는 1901년 아산 염치읍 백암리에서 부친 김윤필과 모친 박씨 슬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집 근처 백암교회 안에 설립된 영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감리교 여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Hammond Sharp) 부인의 눈에 띄어 서울 이화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 후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졸업반이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녀는 고향에 내려와 평소 친했던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을 만나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우리 백암리 마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 해보자.”

[新韓民報(1919. 9. 25.)]
○ 출옥 후에 발한 어떤 여학생의 편지
[……] 저는 경성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중략) 우리 연약하고 미성한 여자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 당하던 일이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음식은 짐승 먹이는 것과 같이 해서 주는데 기가 막혀서 말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당해보지 못한 별별 고생을 다 당해보았습니다.
4월 2일 밤에는 신창면 박태화 등 200여 명의 면민들은 신창의 학성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산에서 내려와 신창면 사무소로 나아가 돌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박태화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4월 4일 선장면 만세시위

선장면은 동학농민운동 때 적극 참여한 천도교인이 많은 지역이었다. 정수길(丁壽吉, 25세)도 부친 정태영(丁泰榮)과 함께 천도교인이었는데, 천도교주였던 손병희가 조선독립을 선언·발표한 이래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서몽조(徐夢祚), 임천근(林千根), 오상근(吳相根) 등과 함께 선장면(仙掌面) 장터에서 4월 4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수길 등 4인 지도부는 시장 군중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전국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칩시다!”
장터에 모여 있던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수길을 비롯한 4인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면 헌병주재소로 쳐들어가 돌과 몽둥이로 유리 창문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활동을 하였다.
“저기 일본놈들이 있다. 돌을 던지자!”
시위군중은 일본 헌병에 대하여 투석으로 대항했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 헌병과 보병 7명이 발포로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1명이 순국하였고, 7명이 부상당했으며, 6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체포된 정수길, 김천봉,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등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른 인물 외에도 주민 112명이 온천리 헌병분견소에서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태형을 받았다. 이처럼 온양, 신창, 아산의 세 지역이 각각의 지역특성에 따라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강대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역사 관련 강의와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도시유적관 특별전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는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