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0/09] 위당 정인보의 삶과 한국학
페이지 정보
본문
한국학 연구 몰두…민족사관 확립에 큰 업적
칼보다 강한 붓으로 일제와 맞서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1893년(高宗 30년) 6월 19일(음력 5월 6일)에 명종(明宗 : 재위 1546~67)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 1515~1588)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 1950년 9월 7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 그의 나이 57세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유년시절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는데, 이 때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기(才氣)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는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 1861~1939)의 문하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위당의 정신세계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 스승과 제자로서 돈독한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는데, 이 사제관계는 1939년 난곡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간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난곡은 양명학에 심취해있는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위당이 난곡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로부터 양명학의 본질과 발달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통해서, 위당은 그 연구결과인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1933년 9월 8일부터 60회에 걸쳐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하였으며, 이것은 뒷날 삼성문화문고(三星文化文庫)로 간행되어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한편, 위당은 1910년(純宗 4년) 8월 나라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병탄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회영(李會榮) 형제들과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의 건설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13년에는 상해(上海)로 건너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신규식(申圭植)‧조소앙(趙素昻)‧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조국광복운동(祖國光復運動)에 정열을 바쳤다. 이 때, 동제사의 회원은 무려 300명에 이르렀으며, 중국의 혁명지도자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신규식을 중심으로 하여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위당은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 그의 부인 성씨(成氏)가 첫딸을 출산한 후 산고(産苦)로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부득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그의 항일독립운동은 국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는 망국(亡國)의 쓰라림을 가슴에 안고, 언제나 검은 색 한복(韓服)과 검은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하면서 한 시도 조국광복의 꿈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1922년 4월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교수로 초빙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일제(日帝)에 의하여 우리의 고대사(古代史)가 왜곡되고 있을 때여서, 그는 역사학 강의시간에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위당은 이 과정에서 1931년 세부적인 고증을 거쳐 작성한 ‘조선고전해제’(朝鮮古典解題)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는데, 이러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통해서 한국학(韓國學)의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위당은 동아일보와 시대일보(時代日報)의 논설위원으로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이로써 민족사관(民族史觀)의 확립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 때, 신채호‧문일평‧안재홍(安在鴻) ‧ 손진태(孫晉泰) 등과 교유하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한국학의 연구에 몰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 얼’을 강조하다 『조선사연구』는 단군(檀君) 이래 5,000년 간의 우리나라 고대사(古代史)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위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위당은 이 책에서 ‘역사가 곧 민족의 얼’이라고 정의하면서, 역사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 위당은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역사학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전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를 위해서, 위당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교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써, 위당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은 모름지기 민족사학(民族史學)에 눈을 뜨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홍이섭(洪以燮)은 “식민지시대에 내 것을 찾아보자는 정신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면, 또 그 때의 물정을 알고 지내온 사람이라면 이심전심으로 알 바이다”라고, 학생시절을 회고한 바 있다. 그런데, 위당이 연희전문학교에서 계속 강의를 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인(朝鮮人)들로 하여금 우리의 말과 글을 쓸 수 없게 하더니, 성(姓)마저 빼앗아갔다. 1939년 11월, 「조선인의 씨명(氏名)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우리 고유의 성(姓)을 폐지하고, 일본의 씨(氏)를 따르게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에는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미국의 해군기지가 있는 하와이(Hawaii) 진주만을 폭격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에 대한 강도를 더해갔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더 이상 한국학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당은 병을 구실로 하여 학교를 떠나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북도 익산(益山)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것이 194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은거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으면서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감으로써 위당은 다시 교육에 종사하면서 한국학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 11월,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한국학의 부흥을 목적으로 국학대학(國學大學)이 설립되면서, 위당은 학장으로 초빙되어 다시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로써, 그는 한국학을 강의하고, 또 ‘우리 민족의 얼’을 학생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삶은 한국학으로 값진 열매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