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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05] 경남 진주의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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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걸인들까지 참여한 전 민족적 독립만세운동


논개 정신 이어 ‘기생독립단’ 태극기 휘날리니


글 | 전혜빈(국가보훈처 연구원) 


예로부터 ‘조선 조정의 반은 경상도 사람이고, 그 반은 진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진주는 풍부한 물산과 인재로 전국적인 위상을 가진 곳이었다. 외적이 침략했을 때는 웅장한 지리산을 닮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사상, 김시민 장군과 기생 논개의 호국정신이 빛났다. 조선후기 ‘삼정문란’이라는 총체적 집권층 부패에 대해서는 임술(1862) 진주농민항쟁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진주의 역사와 정신은 거대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고종의 인산(因山)에서 목격한 
3·1운동과 독립의 희망

진주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이곳의 청년 김재화(金在華, 28세)·이강우(李康雨, 30세)·권채근(權采根, 30세)·강달영(姜達永, 32세)·박진환(朴進煥, 32세)·박용근(朴龍根, 35세)·심두섭(沈斗燮, 26세)·정용길(鄭鎔吉, 32세)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 가운데 이강우는 일본대학 법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고, 심두섭은 부산상업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진주에서 미곡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박진환은 의병활동을 펼친 경험이 있었으며 그외의 인물들은 광산업을 경영하거나 진주경찰서에서 순사부장에 재직하는 등 진주 지역에서 이름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초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3월 11일 진주로 돌아와 독립의 희망을 이루고자 했다. 

“우리 민족은 미국 대통령이 외친 민족자결의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우리가 앞장서서 진주 지역에서도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자!”

“좋소. 지금은 헌병대가 비상령을 선포하고 검문검색을 엄중하게 하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진행하도록 합시다.”

당시 일제는 독립만세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을 막기 위해 진주로 들어오는 길목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청년들은 검문을 피해 이동하면서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들어왔으며, 교유문(敎諭文)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만들어 1919년 3월 16일 진주면 천전리(川前里) 산중에서 몰래 인쇄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18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진주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만세운동을 하루 앞둔 3월 17일 저녁 이들 청년들은 진주면 대안동(大安洞)의 한 음식점에서 비밀리에 모여 산중에서 몰래 등사한 출판물 약 1천 매를 배분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종소리를 신호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8일 정오 진주의 비봉산(飛鳳山)에 자리한 진주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시 일제 고등경찰의 보고서인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에는 “박진환, 이강우 등이 3월 18일 진주 시내 예수교 예배당(현 진주교회)에서 울리는 정오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진주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심두섭은 법원지청 앞, 김재화·강달영 등은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대안동 매립지, 강상호는 공원, 박진환 등은 시장을 담당하여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고유문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강우는 많은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때 사립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樂隊員)으로 있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 24세)·박성오(朴星午, 25세)·이영규(李永圭, 25세) 등이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나팔을 불며 더욱 열기를 불어넣었다.

“우리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앞장을 설 테니 다 같이 경남도청 앞으로 행진합시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오후 4시쯤 경남도청 앞에 모였을 때 군중은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헌병과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행렬을 해산하려고 했으나 군중들은 더욱 거세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이들의 저지가 어렵다고 보고 주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에 잉크를 뿌려 표시를 해 두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검거를 시작하여 관련자 3백여 명을 체포하였다. 

기생과 걸인들의 만세시위

진주의 독립만세 물결은 야간에도 그치지 않았다. 만세시위 군중들은 각대(各隊)로 나누어 곳곳에 웅거하여 봉화를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7시에는 노동독립단이 나타나 만세 행진을 하였고 2시간 뒤에는 다시 ‘걸인독립단(乞人獨立團)’이 나타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게 된 것은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구렁텅이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다!”

 다음 날인 1919년 3월 19일에는 진주 읍내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오전 11시 읍내에서는 다시 약 7천 명의 군중이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도청과 경무부로 몰려들었다. 일제 헌병이 총검으로 위협하고 또 군중을 난타하여 부상자는 늘어갔다. 오후 3시 이러한 광경을 본 청년들이 돌을 던지면서 맞섰고 헌병들이 무력으로 다시 위협하자 군중은 일시 후퇴하였다. 

이때 ‘기생독립단(妓生獨立團)’이 태극기를 선두로 남강 변두리를 둘러 촉석루(矗石樓)를 향하여 행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세워진 촉석루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자축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논개가 왜장(倭將)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던 의암(義巖)은 촉석루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촉석루 옆에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기생독립단이 촉석루로 향한 것은 논개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일제 경찰 10명이 달려들어 칼을 들고 만세운동을 일으킨 기생들을 위협하였으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칼에 베어 죽어도 나라가 독립이 되면 한이 없다!”

진주 기생들의 항일 만세운동은 <매일신보> 1919년 3월 25일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남도 晋州,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진주는 지금도 오히려 진정이 안 되고 자꾸 소요가 일어날 형세가 있는데 19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한국 국기(태극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 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6명의 검속으로 해산됐는데…

 결국, 일제 경찰은 만세운동을 주동한 기생 6명을 붙잡아 체포하였다. 그중 한 명인 한금화(韓錦花)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가 피는구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한다. 이러한 기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은 진주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전국의 기생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진주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에 걸쳐 전개되었고 기생·걸인들까지 단체로 참여할 정도로 전 민족적 성격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물론 이들의 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천대받는 신분이었던 걸인과 기생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1919년 당시 진주 지역은 경남 도청이 있던 곳으로 진주 장날에는 산청, 사천, 하동, 삼천포, 남해 지역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이 때문에 진주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서부 경남 각지의 민중이 함께 했고 경남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따라서 진주 독립만세운동은 서부 경남을 대표하는 운동으로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필자  전혜빈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강대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역사 관련 강의와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도시유적관 특별전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는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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