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항쟁사 [2022/06] 6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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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 현장에 나선 용기와 희생정신
의병과 의병정신, 그 가치 새삼 주목해야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6월 1일은 2010년 5월 정부에서 제정한 법정기념일인 ‘의병의 날’이다. 박은식은 1920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간행한 명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이란 것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에 즉각 의(義)로써 분기하며,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敵愾: 적에 분노하여 싸움)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하였다(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서문당, 2019, 53쪽). 우리는 이러한 투철한 의병 정신과 그 기개, 이상 실현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구국현장에 나선 용기와 희생정신, 그들이 구현하고자 한 참된 가치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6월 1일
의병의 날
6월 3일 조선의용대 윤세주 태항산전투 중 전사, 순국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세주(尹世冑, 호 石正)가 1942년 6월 3일 중국 화북지방의 태항산(太行山)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했으며, 『독립신문』밀양지국을 운영하다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망명했다.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 해 11월 중국 길림(吉林)에서 김원봉(金元鳳)·황상규(黃尙奎)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철저한 무장투쟁을 결의했다. 의열단 방침에 따라 일제 요인 처단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1920년 3월 경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이 해 6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 등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중국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1934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집행위원, 1935년 4월 김원봉이 운영하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교관으로 활약했다. 1936년 8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자 참여하였다. 특히 기관지『朝鮮義勇隊(通訊)』 한문반(韓文班) 주편위원(主編委員)에 임명되어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였다. 또 1939년 3~4월에는 중국 남방의 귀주성(貴州省) 진원(鎭遠)의 국민당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내 한국인 포로 포섭공작을 수행했다(박동환,「조선의용대(통신)의 발간과 주도세력 분석」,『한국근현대사연구』99, 2021). 1942년 5월 중국공산군인 팔로군(八路軍)의 항일근거지 태항산(太行山)의 화옥산에서 조선의용대 제1·3지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이른바 ‘소탕전(掃蕩戰)’에 맞서 싸우다 6월 3일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선배이자 동지인 임시정부 국무위원 장건상이 다음과 같은 추도시를 남겼다. 망해버린 한국의 충만한 인생을 깊이 아파하네(痛切亡韓可厭生) 기러기털이 날리는 것처럼 가벼이 희생을 바쳤네!(鴻毛飛撲供犧牲) 어찌 구구이 남은 목숨을 구걸하며 늙어 가리오(何須殘命區區老) 이야말로 남아의 멋진 투쟁이 아닌가!(此是男兒一鬪爭)(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 공훈록』5, 1988)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보전투 1937년 6월 4일 밤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항일유격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현재 북한의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통 보천보전투라고 부른다. 중국공산당 만주조직 산하의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1937년 3월 식민지 ‘조선’ 진입계획을 세웠는데, 김일성·최현 등 2·4·6사 간부들은 서강회의를 통해 이를 구체화했다. 동북항일연군 2군 6사(師)는 200여명의 병력으로 6월 4일 밤 늦게 보천보를 기습했다. 당시 보천보에는 함경남도 고원지대에서 벌목한 나무를 관리하고 반출하는 기관과 인력이 밀집해 있었다. 2군 6사 대원들은 항일 선전문을 뿌리는 한편, 우체국과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소방서 등 일제의 행정관서에 방화하고,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경관 2명을 사살하였다. 또 기관총과 소총, 탄약 등을 노획하고, 현금과 의류 등을 탈취하였다. 이밖에 산림과 관사·일부 주택 등에도 방화 및 총격을 가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에 경종을 울렸다. 이들은 다음날 새벽 압록강 건너편 중국 장백현 23도구 방면으로 재빨리 퇴각하였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보천보전투 자체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당시에 보기 드문 국내 진입작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아일보가 호외까지 발행하며 대서특필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 등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6월 5일 백정기 의사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옥중 순국 1934년 6월 5일 전북 부안(정읍) 출신의 백정기(白貞基, 호 鷗波) 의사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이사하야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는 주로 백구파(白鷗波)로 불렸다. 그는 주중(駐中)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일본 정객과 일본군 장교, 중국 정치인, 군인 등과 함께 상하이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 요리점에 모여 회담한다는 기밀을 탐지했다. 이에 아리요시를 처단하려고 1933년 3월 17일 부근의 식당에서 대기하던 중 일본 영사관 경찰의 기습으로 동지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육삼정의거’로 알려진 이 사건은 사실 일본인 밀정 오키(沖)와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의 공작에 속은 것이었다. 백정기와 원심창, 이강훈 등은 ‘제2의 윤봉길의거’를 꿈꾸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박찬승,「1933년 상해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공사 암살미수 사건’의 전말」,『한국독립운동사연구』60, 2017) 6월 7일 봉오동전투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등의 주도로 구성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1920년 6월 7일 일본군 월강(越江)추격대대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한 전투이다. 봉오동은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이고 가운데는 약간의 평지가 있는 긴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어 독립군이 매복하기에 알맞은 천연 요새지라고 할 만했다. 골짜기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25리 정도로 아래서부터 하·중·상의 세 마을이 있었다. 한 마을은 대개 30호 내지 60호 정도였다. 봉오동전투는 6월 7일(월요일) 새벽부터 밤까지 대한북로독군부와 신민단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 골짜기로 침입한 300여 명의 일본군 1개 대대 병력과 100여 명의 증원대를 매복·기습하여 섬멸한 일대 장거였다. 야스카와(安川)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 월강(越江)추격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하였다. 일본군은 12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파악된다. 독립군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 일본군은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柔遠鎭)의 건너편 두만강변으로 패퇴하여 야영하다가 사단 사령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 부대와 싸워 이긴 전투로 유명하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알려져 전체 독립군 진영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고, 3·1운동 이후 다소 침체되었던 한국인들도 독립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었다. 중국 연변(북간도) 일대 동포들은 이후 ‘준 전시상태’로 인식하고 더욱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성원하였다. 6월 10일 6·10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순종(융희황제)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 형태로 전개된 학생중심의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실의 속에 살던 순종황제(일제 당국은 이왕[李王]이라고 격하)가 1926년 4월 26일 승하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權五卨) 등 노총계(勞總系) 인사들과 학생층을 중심으로 6월 10일 순종황제의 인산일을 계기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였다. 6·10만세운동은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권오설 등은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통합조직으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고 격문을 인쇄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6월 초 경찰에 발각되어 관계자가 체포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두번째는 전문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의 동향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세검정(洗劍亭)으로 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그 기회를 활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학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키자고 결의하였다.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담당키로 했다. 세 번째는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의 움직임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 등이 순종 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6·10만세운동은 6월 10일을 전후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들은 물론, 일반 시민·군중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재연되었다. 그러나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 당시 서울에서만 500~6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꾸준히 비축된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역량이 총결되어 나타난 항일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사이에서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여 지속적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장석흥,『6·10만세운동 연구』, 국민대 박사학위논문, 1996). 6월 10일 6·10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6월항쟁) 발발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이 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축소된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과정의 부상으로 빈사상태가 되면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폭발적 기세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하는 민주체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국민적 저항운동이 대거 확산되자 시국수습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이른바 ‘6·29선언’이란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이 발표되었다. 이후 정국은 수습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현행 헌법과 정치체제는 6·10민주항쟁 결과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것으로 통상 ‘87년(1987년) 체제’로 불리고 있다. 6·10민주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 획기적인 분수령을 이룬 일대 민주화운동, 역사적 대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16, 441~450쪽) 6월 10일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 서원준, 평안도 황해도 특공작전 1930년대 초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군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은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중국 동북지방)침략 이후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강력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다액의 군자금을 모집코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33년 5월 국내유격대장(국민부 결사대원) 서원준(徐元俊)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활동 자금을 모집하고, 만주 중앙기관과의 연락기관을 설치하라고 지시하였다. 서원준은 평남 중화 출생으로 노동자 출신 독립군이었다. 국내로 침투하여 동지 안영준(安永俊) 등과 함께 평양의 은행을 습격하고 군자금 1,600원을 빼앗은 뒤 황해도 봉산까지 진출했다. 그는 2주일간이나 서북지방 각지에 출몰하며 추격하는 일본인 경찰관을 사살하는 등 용맹을 떨쳤다. 특히 그는 6월 10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사리원경찰서 순사부장 도미다(富田五吉郞)를 사살하였다. 결국 연인원 3만여 명의 많은 경찰이 동원되어 6월 16일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 사법당국의 재판을 거쳐 1935년 4월 30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불과 28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조선일보』1933.6.13·1935.5.1.) 서원준의 국내 유격전쟁은 당시 동아·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에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특히 『동아일보』는 1933년 6월 17일 호외를 발행하여 그의 활동을 단독보도하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또한 서원준의 사진을 포함한 12건의 기사를 실을 만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서원준의 활동은 1933년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진입 독립운동 중 가장 대표적 군자금 모금활동이었다(김빛나,「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 서원준-노동자에서 독립군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91, 2017). 6월 16일 이은찬 의병장,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1909년 6월 16일 이은찬(李殷瓚) 의병장이 경성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은찬은 187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직후(1896년) 경북 김천에서 이기찬·조동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침략이 본격화하자 9월에 원주에서 동지 이구채(李求采, 일명 李九載)와 함께 해산군인 8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13도 전국의병연합부대(13도 창의대진소)를 탄생시킨 유생 출신 의병대장으로 유명하다. 그는 1908~9년 임진강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후 여의치 않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 망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유인한 한국인 밀정의 간계에 빠져 1909년 3월 31일 용산역에서 일경에 잡히고 말았다. 1909년 5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6월 16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의연하게 순국하였다. 다음과 같은 우국(憂國) 시조 한 수가 옥중시로 전한다.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一枝李樹作爲船)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欲濟蒼生泊海邊), 조그만 공도 이루지 못하고 먼저 물에 빠지니(寸功未就身先溺) 누가 동양의 만년을 기약하리오!(誰算東洋樂萬年)”(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1, 1986) 6월 25일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남한과 북한, 중국, 미국을 비롯한 UN(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거의 3년 1개월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6·25전쟁(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쟁으로 엄청난 인적·물적·정신적 피해를 양측에 남겼다. 양 진영의 군인 사상자만 약 240만 명에 달했고, 일반 국민들의 피해는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남북분단의 고착화와 심각한 적대관계 형성, 냉전의 격화 등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하루빨리 남북분단의 폐해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민족의 비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6월 26일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피살 범행 직후 안두희는 형식적 재판을 거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3개월도 안 되어 15년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풀려나서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또 살인죄를 저지른 지 4년도 안 된 1953년에 완전히 복권되는 믿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결국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한 시민의 ‘정의봉’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80세였다. 6월 27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가 이위종, 만국기자협회에서 연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萬國)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고종황제의 밀사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등 세 특사가 파견되었다. 세특사는 우여곡절 끝에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이들은 1905년 11월의 을사5조약(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코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 및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참석이 거부되었다. 이들은 외국 언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폭로했다. 특히 이위종은 6월 27일 만국기자협회에서 일본의 한국 국권 유린과 한국 외교권 탈취 등의 내용을 호소하는 연설을 진행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특사의 한 사람인 이준(副使)은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하여 결국 7월 14일 분사(憤死), 순국하고 말았다(한영우, 『다시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14, 462~463쪽).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잡아 고종황제를 이 해 7월 강제퇴위시키고 황태자(순종)를 새 황제로 즉위시키는 등 침략을 더욱 강화하였다. 6월 28일 러시아 시베리아 자유시사변 (자유시참변, 일명 흑하사변) 발생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소위 ‘간도출병’으로 출동한 수만명 규모(직접 전투한 상대는 5천여 명의 히가시 마사히코 지대[東正彦支隊] 등)의 일본군에 매복 및 기습공격을 가하여 큰 손실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1921년 초 러시아 연해주를 거쳐 같은 해 6월까지는 거의 러시아 자유시(알렉셰프스크)로 집결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李東輝)가 기획하고 홍범도 등 독립군 지도자들이 이에 따랐던 계획, 즉 만주와 연해주지역 한인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단일 독립군단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러시아(소비에트) 혁명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베리아 알렉셰프스크(현재 자유시)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북상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해주지역 니항(尼港) 의용군부대와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자유대대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자유시에 모인 2천 명의 한인 독립군(의용군) 부대는 ‘자유시사변’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극동(원동)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赤軍) 제5군(혹은 제5군단) 직속 한인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자유시사변 당시 홍범도 독립군 부대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의 이동이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와 상해파(대한의용군)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결국 군정의회(코민테른 원동부)의 주도권 장악을 가능케 하였다(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178, 2017, 249~251쪽). 소비에트 적군으로 편입된 한인여단은 이후 러시아 혁명정부의 통제로 본격적 대일항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