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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6] 학도병, 책 대신 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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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붓는 포탄 속에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


풍전등화 조국 앞에 나선 어린 전사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6·25전쟁은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 기틀을 채 갖추기도 전에 졸지에 당한 황당함이었다. 그 당시 나라의 사정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16, 17세의 학생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손에서 책을 놓고 총을 잡았다. 이들은 정식 군번도 받지 못한 채 1주일 안팎의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낙동강 전투, 다부동 전투, 안강 전투 등 포탄이 퍼붓는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퍼붓는 포탄 속을 헤치며 북한과 싸웠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이는 미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한 

45일간의 피 말리는 대혈전, 다부동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된 6·25전쟁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3년 1개월 동안 전 국토를 초토화하고 온 산야를 피로 물들였다. 


우리 국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점령 당하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포성에 놀라 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시민들은 짐을 꾸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정처없이 그저 남으로 남으로 피란길이 이어졌다.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총탄에 상처를 입고 피흘리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짐보따리를 잃어버린 아낙네의 넋나간 모습, 칭얼대는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린 젊은 어머니의 수심에 찬 모습들이 뒤엉킨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


정부는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겨갔다. 이 무렵, 우리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미군 제1기갑사단과 함께 대구를 사수하기 위한 연합작전을 펴고 있었다. 이것이 6·25전쟁사에 유명한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다. 다부동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22km 거리에 있는 곳으로, 대구 방어에 있어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요,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따라서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구가 북한군의 포격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는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전투를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우리 국군은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었다. 8월 1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미군 제1기갑사단이 마산(馬山)-왜관(倭館)-의성(義城)-안동(安東)-영덕(盈德)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몰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에 맞섰다. 그런데 북한군은 새로운 병력과 탱크부대를 쉴 새 없이 낙동강 전선에 내려보내면서, “8월 15일까지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제1사단은 야간을 이용하여 다부동 전선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였다. 백선엽 사단장은 부대장병들을 향해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그리고 백 사단장은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는 비장한 돌격명령을 내리고, 부대의 최선두에서 적진을 향하여 앞으로 진격해나갔다.

다부동전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피아간(彼我間) 밀고 밀리는 45일간의 피를 말리는 대혈전이었다. 백선엽 제1사단장은 다부동전투의 승리를 위해 병력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와 미군 제25사단 제27연대가 증원되었으며, 8월 16일 정오를 기하여 낙동강 방어선에 융단폭격을 가함으로써 우리 국군의 사기가 한층 올라갔다. 미군 B-29 전투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북한군 진지를 향해 3,234개의 폭탄을 퍼부었다. 


강원도 태백중학교 학생들 127명 

학도중대 편성되어 전쟁터에 배치


6·25전쟁은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 기틀을 채 갖추기도 전에 졸지에 당한 황당함이었다. 그 당시 나라의 사정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16, 17세의 학생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손에서 책을 놓고 총을 잡았다. 이들은 정식 군번도 받지 못한 채 1주일 안팎의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낙동강 전투, 다부동 전투, 안강 전투 등 포탄이 퍼붓는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퍼붓는 포탄 속을 헤치며 북한과 싸웠다. 그런데 이들 중 많은 이는 미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학도병들의 참전은 헛되지 않았다. 이 무렵,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R.) UN군 총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수립하고, 그 사실을 워싱턴(Washington)에 보고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작전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한·미 해병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에 상륙하였다. 이어진 제2단계 작전에서 한국 해병 4개 대대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이 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함으로써 진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우리 국군과 UN군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이어갔으며, 26일 한국의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15일 만에 38선을 탈환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0월 25일, 산 허리에 매복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이 북한을 도우기 위한 참전이었다. 이날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은 11월 5일 밤까지 계속되었다. ‘중공군 제1차 공세’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중공군 60만 대군이 투입된 제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세는 나날이 강화되어 남하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 무렵, 강원도 태백중학교 학생들 127명이 육군 제3사단 제23연대 학도중대로 편성되어 전쟁터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북한군과 중공군에 포위된 국군 제3군단 병력을 구출하기 위하여 투입되어 13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제3군단 병력과 함께 적진을 뚫고 정선·강릉·양양·속초까지 이동하였다. 그 후 화천군 백암산전투(白巖山戰鬪)에 투입되었는데, 이곳에서 휴전을 맞았다. 


그런데 우리 국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밀려 1951년 1월 2일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하여 참담한 ‘1·4 후퇴’로 이어졌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한강 방어선마저 무너지고, 평택(平澤)-안성(安城)-장호원(長湖院)-제천(堤川)-삼척(三陟)을 잇는  방어로 전략을 바꾸었다. 우리 국군은 방어선을 정비하고, UN군과 손을 맞잡고 국운이 걸린 전투를 다시 시작하였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6·25전쟁

어린 학도병들의 희생 기억해야


이 무렵, 중공군도 피로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UN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1951년 1월 15일 새벽, 우리 국군과 UN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리의 공격목표는 김포·영등포로, UN군은 이천·여주로 진격하였다. 이것이 ‘선더볼트(Thunderbolt) 작전’이었다. 이에 중공군은 전투력을 상실하고 반격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하였다. 


우리 국군과 UN군의 공격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1월 16일에는 수원, 2월 7일에는 안양을 탈환하였다. 이렇게 6·25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면서 피아간 많은 희생을 남겼다. 1950년, 포항전투(浦項戰鬪)에서 학도병 이우근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를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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