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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항쟁사 [2022/07] 7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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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민족 독립은 물론, 개인 독립 이루어야 진정한 독립


스스로 개척한 건전한 독립의 길로 걸어가야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역할을 담당했던 중국 상하이(上海) 발간 『독립신문(獨立新聞)』은  134호(1925.7.20) 사설 「개인독립의 양 방면」에서 ‘개인 독립’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건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그 국가사회를 조직한 각 분자(分子) 개체의 건전한 독립을 요구함이 당연한 순서라. 한 개인의 독립은 첫째로 정신독립, 곧 사상독립이오, 둘째로 물질독립, 곧 생활독립이라. 개인은 구각(軀殼, 몸과 겉껍질)의 존재뿐으로, 존재가 아니오, 두 방면의 독립으로부터 비로소 존재라 할지라. 그러므로 개인으로 이 양방의 독립이 없으면 그 개인의 존재는 아무 값없는 존재인 동시에 이러한 개체로 집합된 사회도 그 존재가 값없는 존재라 할지라. 이제 우리의 운명을 과거시대와 같이 우상(偶像)식 영웅의 손에 방임하고 좌하든 우하든 맹종이나 할 작정이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각 개체의 절실한 판단으로 이해(利害)의 공동(共同)을 적확(的確)히 각오한 위에서 만사를 진행치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사상독립과 생활독립이 없이는 국가와 사회의 독립도 불가능하다는 독립운동 방법론이다. 국민 각 개인의 독립이야말로 국가독립의 절대조건이라는 것이다. 특정 영웅이나 뛰어난 인물에 기대지 않고, 개인 즉 독립운동가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한다는 주장이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공감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7월 1일 

중국동북(만주) 한국독립당 결성

1930년 7월 1일 북만주의 중동선(中東線) 철도 연변 위하현(葦河縣)에서 홍진(洪震)·이청천(李靑天)·민무(閔武)·안훈(安勳, 본명 조경한)·황학수(黃學秀)·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정신(鄭信) 등이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유력한 근거지였던 중국동북의 한인 사회는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에 공산주의 사상이 전파, 확산되어 사상적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공산주의 세력이 늘어나고 남만주 지방에서 국민부(國民府)가 수립되자 북만주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혁신의회-한족총연합회 계열의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에 민족운동 진영을 재정비하여 대일항쟁과 반공투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1930년 1월 김좌진(金佐鎭)이 공산분자에 의해 피살된 뒤 홍진 등은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 등을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한국독립당은 초창기에 ①민본정치의 실현, ②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③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이라는 삼본주의(三本主義) 당강과 당규를 제정한 뒤 중앙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운영방침은 이 위원회에 맡기기로 하였다. 홍진(본명 홍면희)이 집행위원장(당수)을 맡았다.

한국독립당은 1931년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중국동북에 대해 전면적 침략을 개시한 ‘9.18사변(일명 만주사변)’이 폭발하자 그해 10월 당 군사위원장 이청천(본명 지대형)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의 편제를 정비하고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군의 활약 가운데는 대전자령전투(1933년 6월 말~7월 초)가 유명하다. 군수물자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독립군의 3대 대첩이라고 평가되고 있다(장세윤,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7월 2일 

독립협회 결성

 1896년 7월 2일 서울에서 서재필·윤치호·안경수 등 30여 명의 뜻있는 개화파 인사들이 모여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하는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까지 열강의 국권 침탈과 지배층의 부패, 민권 유린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 사상에 입각하여 상당한 수준의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일제의 주권침탈과 식민지 통치과정에서 외세 배격과 독립운동, 국민국가 수립운동 등 한국민족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신용하, 『독립협회 연구』, 일조각, 1976). 그러나 러시아나 중국(청)에 대한 배격이나 비판, 독립, 문명개화 등을 주장했지만, 미국·영국·일본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는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7월 2일 

남만주 독립운동 영웅 신팔균 전사 

1924년 7월 2일 구 한국군 정위 출신 독립운동가 동천(東天, 東川) 신팔균(申八均)이 중국동북(만주) 흥경현(현재 신빈현) 이도구(二道溝)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남만주 통합독립운동 조직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과 의용대 사령관을 맡고 있던 신팔균은 이날 이른 아침부터 흥경현 왕청문(旺淸門)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수백 명 부하 장병들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오후 1시경, 일제의 사주를 받고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몰려온 중국군 300여 명이 공격을 가해왔다. 통의부 군대는 이에 맞서 약 3시간 동안 응전했지만, 탄약이 고갈되어 앞장서 싸우던 지휘관 신팔균과 유창열이 전사하고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로 중국군도 8명이 살상되었는데, 현지 독립운동가와 교민들은 이를 ‘흥경사변(興京事變)’ 또는 ‘이도구사변(二道溝事變)’이라 했다.

신팔균은 충북 진천 출신의 무반 명문가 후예였다. 김경천·이청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으로 호칭되며 명성을 떨쳤고, 대한제국 군대와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흐름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부인 임수명(任壽命)은 남편의 전사를 모르는 채 주변의 강권에 의해 귀국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남편의 죽음을 알고, 11월 2일 유복녀와 함께 음독 자결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7월 2일 

평남 대동·강서군 

3·1운동 주역 고지형 옥사


고지형(高志亨, 1859~1927)은 교회 장로로서 1919년 3월 초 평남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조진탁(曺振鐸)과 함께 군중 5천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이웃 강서군 반석면 사천장터에서 사천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헌병 1명과 조선인 헌병보조원 2명을 살해하고 주재소를 방화하는데 앞장섰다가 도주하였다. 

사천장터(沙川場, 모락장) 투쟁에서 헌병의 발포로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중경상자도 4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일본 경찰과 군대가 대거 출동하여 사천 등지의 남자 400여 명을 무차별 검거하고 고문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지형은 결국 1921년 8월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경성(마포)형무소에서 68세의 고령으로 옥고를 치르다 1927년 7월 2일 병사, 순국하고 말았다.

주목되는 사실은 고지형이 옥사한 것을 안 동료 투옥 죄수들이 그의 죽음을 조상하고, 일제 당국에 항의하는 의미로 7월 5일부터 단식동맹 투쟁을 단행한 것이었다. 또 7월 10일 평양의 서문 밖 교회에서 고지형의 죽음을 추도하는 추도예배를 가졌는데, 평양경찰서에서 이를 알고 그래서는 안 된다며 시말서를 요구하고 탄압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7월 8일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최수봉 사형 순국 


경남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崔壽鳳, 이명 崔敬鶴)이 1921년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1894년 밀양 출생인 최수봉은 1910년부터 1916년 사이에 밀양ㆍ부산ㆍ평양의 4개 학교를 다니면서 고향 선배 고인덕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항일의지를 다지며 조국독립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8년경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던 그는 1919~1920년 사이에 귀향했다가 의열단원 김상윤과 이종암의 제의를 받아들여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후 고인덕의 협력으로 폭탄 2개를 받아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단행하였다. 경찰서장 이하 19명이 모여 있는 자리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매우 대담한 사건이었다. 

최수봉은 일경이 추격해오자 자결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최수봉은 법정에서도 시종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며 의열단원의 기개를 잘 보여주었다. 결국 1921년 7월 8일 순국했다. 두달 전 박재혁의 경우처럼 한인들이 몰려나와 다른 소요사태를 일으킬까 두려워한 일제 당국은 시신조차 유가족에게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집행하고자 한 밀양청년회원들을 기소하는 등 장례까지 방해하였다. 최수봉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격동했고, 향후 전투적 독립운동을 더욱 고무하였다(김영범. 「1920년 밀양 항일폭탄의거의 배경과 전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5집, 2015 및 전성현, 「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38집, 2011).


7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연통제 실시 공포


1919년 7월 10일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臨時聯通制) 실시를 공포했다. 국내 각 도에는 독판(督辦, 道長官), 각 군에는 군감(郡監, 군수), 각 면에는 사감(司監, 면장)을 두었다. 각 도의 독판은 평북 안병찬(安秉讚), 평남 윤성운(尹聖運), 황해도 최석호(崔錫浩), 함남 오상근(吳相根), 함북 오상묵(吳相黙), 전남 기동연(奇東衍), 전북 이덕환(李德煥), 경기도 민철훈(閔哲勳), 충청도 이기상(李起祥) 등이었다(이만열, 『한국독립운동사 연표』, 독립기념관, 2009).

임시연통제 실시로 임시정부는 1920년대 초 상당기간 국내와 연계를 유지하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7월 10일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


1942년 7월 10일 김두봉(金枓奉)·최창익(崔昌益) 등이 중국 화북지방의 연안(延安)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개편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였다. 화북지역 한인들의 통일전선 조직이자 사회주의 단체였다. 

조선독립동맹은 1945년 8월 해방 직전까지는 중국 연안·태항산 등 중국공산당과 그 산하 군대인 팔로군(八路軍) 활동지역에서 이들과 연계하여 활동한 정치조직이자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공산)주의자들이 결합된 형태였지만, 1943년 이후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의 사상적·정치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산하에 조선의용군 독립운동 조직을 두었는데, 해방 이후 확대 개편되면서 일부는 중국의 국공내전에도 참가하였다.

창립 초기에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최창익(崔昌益), 한빈(韓斌)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조직으로 나아갔는데, 해방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귀국당시 조선독립동맹 산하 무력인 조선의용군 총사령은 무정(武亭), 부사령은 박효삼(朴孝三)·박일우(朴一禹)였다. 1946년 2월 16일 ‘조선신민당’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발표된 선언과 강령은 조선독립동맹 당시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7월 14일 

김하락 의병장 순국


1896년 7월 14일(음력 6월 4일) 경북 의성 출신 김하락(金河洛) 의병장이 영덕 오십천(五十川)에 투신, 순국했다.

그는 1895년 양력 12월 30일 단발령이 발표된 다음날 이종동생 조성학(趙成學),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경기도 이천으로 가서 의병 봉기를 준비했다. 이듬해 1월 초 이천 수창의소(首倡義所)를 조직하여 창의대장에 민승천(閔承天)을 추대하고 ‘각군도지휘’를 맡았다. 이후 이천을 중심으로 포군(포수)을 확보하고 이천 서쪽 이현(梨峴)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양근·지평·광주·안성·음죽 등 각지로 보내 의병을 모으게 하였다. 1월 중순 경기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를 장악했지만, 2월 중순 일본군 200여 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하다가,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1896년 3월 흩어진 병사를 모아 의병부대를 재편성했다. 대장에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에는 심상희(沈相禧)를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겸 지휘가 되었다. 3월 13일 남한산성을 점령했으나, 4월 3일 관군에게 산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의진을 영남지방으로 옮겨 투쟁하였다. 안동, 의성, 경주 등지에서 싸웠는데, 영덕의 신돌석(申乭石),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등과 함께 싸우기도 했다. 결국 의진을 이끌고 안동 화촌(花村)으로 가려다가 영덕으로 진입하려는 300여 명의 관군과 싸우던 중 총상을 입어 강물에 투신해 순국하였다.

후손들은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1, 1986 ; 권대웅, 『불굴의 의병장 해운당 김하락』, 지식산업사, 2020).



7월 19일 

몽양 여운형 서거


경기도 양평 출신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1947년 7월 19일 서울의 혜화동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당해 서거하였다. 

여운형은 1886년생으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조선건국동맹 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당수 등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자 다방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명망가였다. 특히 일제의 패망 이후 해방 정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고, 이듬해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6년 9월 북한을 방문했다. 11월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남조선노동당과 합동을 제의했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이 해 5월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규식·김창숙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정병준,『몽양 여운형평전』, 한울, 1995).


7월 24일 

일본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제2차 한일협약) 늑결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았다.

이 조약은 1907년(丁未年)에 맺은, 7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뜻에서 흔히 ‘정미 7조약’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5조약을 강요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당시 황제였던 고종은 이 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계기로 오히려 헤이그특사 파견을 추진한 고종을 위협하여 1907년 7월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 뒤 고종(高宗)의 아들 순종(純宗)을 제2대 황제로 추대한 뒤,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을 앞세워 한일신협약을 체결케 하였다.

이완용과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맺어진 이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중요한 정책을 시행하거나 관리를 임명할 때 일본 당국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관리를 임명할 때 통감인 이토의 동의를 받아야 했으며, 각 부서에 임명된 일본인 차관들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장악했다. 또 경찰권을 빼앗기고 군대도 강제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언론을 탄압하는 신문지법, 정치의 자유를 빼앗는 보안법까지 시행되면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일본의 ‘차관(次官)정치’가 시행되었고, 일본의 대한제국 내정 간섭과 침략은 더욱 가속화하였다. 특히 일본은 이 협약 체결 이후 부수각서(附隨覺書)를 체결하여 얼마 되지 않은 한국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해산 조서(詔書)를 내리게 하여 8월 1일 군대해산이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에 항거하는 대한제국 군대의 봉기가 일어나 큰 영향을 끼쳤다.


7월 24일 

경성 부민관(府民館) 폭탄의거


1945년 7월 24일 서울 시내 부민관(府民館) 폭탄의거가 일어나 큰 충격을 주었다.

조문기(趙文紀)·유만수(柳萬秀)·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 대한애국청년당원들이 친일 부역단체인 대의당(大義黨)의 회의장소 부민관에 폭탄을 장치하여 일본 요인 등의 처단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에는 ‘부민관사건’이라 했다,

1945년 5월 일제의 탄압정책과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 20세 안팎의 조문기·유만수·강윤국·우동학·권준 등은 서울 관수동 유만수 집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고 일제의 고위간부나 친일파를 응징하여 민족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의했다.

7월 24일 저녁 부민관에서 주최자인 박춘금(朴春琴)을 비롯해 조선총독·조선군사령관 등 일제 고관과 친일 중국측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만주국 대표 강춘전(康春田), 일본 대표 다카야마(高山虎雄) 및 국내 친일파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진행되었다. 박춘금이 등단하여 일본 침략전쟁을 위한 궤변을 늘어놓는 순간,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장내는 수라장으로 변했다. 

다만 침략자와 그 앞잡이들을 응징하지는 못했지만 회의를 좌절시키고 독립을 열망하던 한국인의 기개를 과시할 수 있었다. 폭음에 놀란 일본 경찰은 황급히 문을 잠그고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조문기 등 애국청년당원들은 이미 도주하여 붙잡히지 않았다. 이 의거는 8·15광복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단행된 쾌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낸 최후단계의 무력항일투쟁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부민관 투탄의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월 28일 

안광조 의병장 사형으로 순국 

 

1920년 7월 28일 1910년대 후반까지 강원·황해·평안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한 안광조(安光祚) 의병장이 순국했다. 안광조는 1907년 후반기부터 황해도·평안도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면서 활동하던 채응언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했다. 1913년 6월 초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군수비대에 불질러 일본군 몇명을 부상케 하였다. 또 오승태(吳承泰)와 합세하여 선암(仙岩)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평남 성천군 옥정리 산기슭에 근거지를 두고 부유한 한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군자금 조달에 협조하도록 설득하였다.

특히 1915년 7월 채응언 의병장은 피체 후에도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계속했으나, 1919년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해 12월 1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7월 28일 평양감옥애서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조선총독부 관보』(1920. 8. 9) 및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14권, 2000).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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