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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0/09] 3월의 전설(66회) 황해도 옹진군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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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일들 

3.1 만세시위의 문법 스스로 발견


글 | 이정은(3. 1운동기념사업회장) 


황해도 땅끝마을인 옹진군의 만세시위는 목사 부재 중 전도사가 독립선언서를 받아 주변에 전파하며 3월 2일부터 4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교회 집회, 장날 만세시위, 산상 봉화시위, 학생들의 동맹휴교 등으로 독립만세시위의 ‘문법’을 스스로 발견해 갔다. 이른바 3.1운동은 누가 지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많은 군중이 모여 함께 만세를 부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위를 확산해 나가고 있음을 옹진의 사례가 보여 준다. 


옹진군은 황해도 서남의 땅 끝에 있는 군이다. 서해상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가 남한의 옹진군(인천광역시)이고, 북한에도 옹진군이 있는 것은 황해도 옹진군이 6.25전에는 38선 이남에 속하였다가 휴전으로 서해 5도를 제외한 육지 옹진군이 미수복지가 되어 옹진군도 남북분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통영-여수 지역처럼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반도지역으로 해안에 넓은 평야와 대륙붕이 있어 예부터 농업과 더불어 조기 등 생선과 어패류 등 수산업이 발달했다. 고려 시대 베트남 왕국이 망했을 때 왕족 이용상(李龍祥)이 이곳에 정착하여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되고, 고국 베트남을 그리는 망국단을 설치한 곳이 이곳이다. 


목사 부재 중에 전달된 선언서  


“3월 1일 옹진(헌병)분대 관내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체포하여 취조중이다.”

 황해도 땅끝 옹진으로부터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에 날아든 전보이다. 3월 1일 황해도 땅 끝까지도 선언서가 전달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독립선언서는 인접 해주 출신 박희도(朴熙道)가 보낸 것이다. 박희도는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다. 그는 서울 낙원동의 협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던 김명신(金明信)에게 이 일을 맡겼다.   


 2월 28일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선언서 전달을 부탁받은 김명신은 3월 1일 옹진군 마산면 온천리에 도착하여 옹진읍내 마산교회 목사 곽정숭(郭貞崧)을 찾아갔으나 그가 부재중이어서 전도사 이경호(李京鎬)에게 독립선언서 150매를 전달하였다.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 집회가 예정되었던 시각, 목사 부재 중에 민족대표로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 5~60매를 받은 마산교회 전도사 이경호는 그날 오후 2시 온천리 야소교회당에서 김영만(金永萬), 최희승(崔熙昇), 김선수(金善洙), 조충성(曺忠誠) 등 교인 7~8명에게 독립선언의 의미를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읍내 곳곳에 부착해 주세요.”하고 부탁하였다. 흥미면 식여리 율목동 교회 전도사 최일영(崔日永)이 이날 독립선언서 15매를 받았던 것을 보면 교회 계통을 통해 인근지역에도 선언서가 전파된 것 같다. 


옹진 마산교회에서는 목사 부재에다 주요 교역자들이 미리 독립운동에 대한 언질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전도사가 나서 기꺼이 역할을 맡았다. 그런 곳에 3월 1일 토요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반응은 선언서를 얼른 여러 사람들과 다른 지역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3.1운동은 누가 지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3.1운동 나름의 문법’을 발견해 갔음을 옹진의 사례가 보여 준다. 


김선수는 독립선언서 7장을 받아 온천리 길가 요지에 게시하던 중 옹진헌병분대에 발각,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오후 3시경 헌병들이 들이닥쳐 이경호, 최희승, 조충성이 연달아 검거되고, 밤 10시경 김영만도 체포되었다. 


3월 2일 최초의 흥미면 율목동 교회 만세시위


옹진읍내 마산교회에서 선언서 15매를 받은 흥미면 식여리 율목동(栗木洞) 교회 전도사 최일영은 3월 2일 일요일 주일 예배를 위해 율목동 예수교회당에 모인 약 60여명의 교인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교인들과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마산리 교회에서 서울의 밀사를 만나지 못한 마산면 온천리 마산교회 목사 곽정숭도 여기에 참여하여 교인들에게 선언서 취지를 설명하였다. 다음날인 3월 3일 최일영은 시위를 시내에 확산시키기 위해 율목동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강령(康翎) 헌병주재소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3월 3일 마산면 온천리 시위 


3월 1일 온천리 마산교회에서 선언서를 배부받아 시중에 게시, 전파하다 붙잡혀 헌병분대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김선수와 최희승은 3월 3일 마산시장(溫井市場이라고도 불림) 장날 장꾼들 앞에서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다시 옹진헌병분대에 체포됐다. 


동남면 전당리 시위


동남면 전당리 김응두(金應斗)는 3월 3일 옹진읍 마산교회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받아 귀가했다. 그날의 광무황제(고종)의 장례식 날이라 오후 6시경 전당리 교회당에서 교인 40명이 광무황제 봉도식(奉悼式, 추도식)을 거행하기 위해 모였다. 봉도식을 마칠 즈음 김응두는 교인 몇 사람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니 후일 이것을 확인한 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고 말했다. 바로 그때 이창운(李昌雲), 김연식(金淵植), 원병욱(元炳郁) 등 20여 명의 교인이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옹진읍내 마산시장에 갔다가 돌아와 외쳤다. 

“오늘 옹진 읍내에서 만세를 외쳤으니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 

그리하여 60명이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5명이 검거되었다. 


3월 8일 천도교인들의 마산면 2차 시위


다시 마산면 온천리 온정장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마산면 천도교인들이 나섰다. 오후 3시 조동룡(趙東龍), 김봉구(金鳳九), 강여백(姜汝伯) 등 3명이 주도하는 가운데 30명의 천도교인은 온천리 고천잡화점 앞 네거리에서 약 100명에게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연설하고 앞장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도 호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며 독립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13일 옹진 강령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이번에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나섰다. 옹진군 부민면 강령공립보통학교(康翎公立普通學校) 4학년생 약 40명은 아침부터 등교하지 않고 소재불명이 되었다. 이들은 “다른 학교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유독 강령보통학교만 방관, 좌시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며 2, 3개소에 숨어있었다.  


4월 7일 가천면 만세시위


4월 7일 밤 옹진군 가천면과 경계를 접한 해주군 대거면(大車面)에서 군중들이 대거산(大車山)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호응하여 옹진군 가면면 삼괴리 구문일(具文一), 최종수(崔宗壽) 등은 마을 주민들과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밤 10시에는 가천면 장현리 부근에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약 200명이 장현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헌병이 출동하여 주모자 3명을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시켰지만 형세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일제는 헌병 6명을 파견하여 장현리 일대 경계를 강화하였다. 날이 밝자 헌병들은 시위 참가자 색출을 시작하였다. 야간 시위로 검거된 사람은 11명에 달하였다. 가천면에서는 삼괴리(三槐里)를 비롯한 여러 마을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4월 13일, 15일 흥미면 2차, 3차 만세시위 


흥미면 안락리 남고동에서 박봉희(朴鳳禧), 오태근(吳台根), 조업증(趙業曾), 박덕구(朴德求), 차문옥(車文玉), 조평도(趙平道) 등이 약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6명이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3월 2일 옹진군 최초의 만세시위를 일으킨 흥미면 식여리 율목동에서 4월 15일 오전 11시 약 5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5명이 검거되었다. 


이처럼 옹진군 만세시위는 목사 부재 중 전도사가 독립선언서를 받아 주변에 전파하며 3월 2일부터 4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교회 집회, 장날 만세시위, 산상 봉화시위, 학생들의 동맹휴교 등으로 독립만세시위의 ‘문법’을 스스로 발견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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