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8] 일제에 항거한 항일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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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담아낸 저항 그리고 희망
민초들 항일의식에 뿌리내려
민족종합예술의 꽃을 피우다
글 | 편집부
1926년 10월 1일, 나운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감독한 영화 ‘아리랑’이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흑백 화면의 무성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면 감동한 관객들은 목 놓아 울며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일본 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조선의 영화는 종합예술의 경계를 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온 국민을 하나로 이어주는 민족영화로서 기능했다. 이 시기 영화인들은 식민 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일제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 등을 스크린에 담아내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1900~1937)
나운규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1920년 북간도의 한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에 가입했다. 그는 일제의 수비부대 간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 간 철로(회청선) 폭파 임무를 수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이 사건으로 윤봉춘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 끝에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감방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1923년 출옥 후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나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 창립에 관여했다. 1924년 윤백남 감독이 만든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 ‘심청전’에서 첫 주연으로 캐스팅돼 심봉사 역을 맡았다.

1936년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아리랑’ 제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했으며, 문예영화로 방향을 틀어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무리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심해져 1937년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운규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주제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일제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한국영화감독협회는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1990년부터 ‘춘사영화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으며, 1993년에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일제에 항거한 민족영화의 아버지 윤봉춘(1902~1975)

이후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보고 감동해 다음 해 ‘들쥐’에서 배우로 데뷔했으며, 이후 1930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구영 감독의 ‘승방비곡’, 1937년에는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이 된 ‘오몽녀’ 등에 출연하고 그의 임종도 지켰다. 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30년 무성영화 ‘도적놈’으로 감독에 데뷔한 후 ‘큰무덤’, ‘도생록’, ‘신개지’ 등 민족주의자의 자유사상이 투영된 작품들을 감독했다. 1942년 친일 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 가입 제의를 거부한 후 낙향해 영화계 활동을 중단했다.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그는 계몽영화사를 설립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965년까지 20년 동안에 20여 편 가까운 영화를 연출했다. 비록 16㎜였으나 ‘유관순’,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고향의 노래’, ‘논개’, ‘민충정공’ 등의 영화로 대중의 갈채를 받았고, 특히 유관순 이야기는 1947년, 1959년, 1966년 각각 당시 최고 여배우 고춘희, 도금봉, 엄앵란을 주연으로 세 차례나 영화로 만들었다.
또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작성해 당시 한국 영화 제작의 구체적인 사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격동의 시절, 영화제작의 열악한 현장이며 시나리오 완성방식, 장비·장소의 조달과 배우 물색, 홍보 및 배급 방식, 제작 비용 및 일제의 검열과 감시에 따른 번거로운 상황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 자료는 식민지 시절 조선 영화산업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유산의 가치를 인정해 등록문화재 제732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에 항거하던 영화인들의 활약이 밝혀져 1993년 나운규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항일 불꽃으로 살다간 ‘영화 황제’ 김염(1910~1983)

1927년 가난한 영화배우 지망생으로 중국 영화계에 뛰어든 김염은 영화사의 업무보조, 엑스트라, 단역 등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쑨위(孫瑜) 감독과의 인연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당대 중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쑨위 감독은 다른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그에게서 발견했고, 1929년 첫 영화 ‘풍류검객’에 캐스팅했다. 영화는 기대만큼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쑨위는 두 번째 영화 ‘야초한화’에서도 김염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야초한화’가 당대 히트작이 되면서 김염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이때부터 5~6년 동안 20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다.

김염은 중국 영화계의 총아로 군림하던 시절부터 남몰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오고 있었다. 1935년 바쁜 촬영 일정에도 비밀리에 난징으로 향해 백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다. 이후에도 김구 등과 수차례 만남을 가지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김염은 단지 영화 속에서만 일본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일본 회사가 참여하는 영화에는 출연을 거절했고, 마구잡이식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국가 일급배우로 임명되었으나, 정의와 자유에 대한 절개를 지키며 공산당원이 되기를 거부했던 김염은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수용소에 끌려가 극심한 노동에 병까지 얻어 73세의 나이로 불꽃 같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