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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09] 9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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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독립 의지 불태운 

독립지사들의 기개와 나라사랑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1910년대 중국 동북지역(만주)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두루 시찰하였던 박은식(朴殷植)은 홍범도 등과 같은 옛날 의병 용사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그러한 모습을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나는 요즘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유랑하면서 두루 각처의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아 잡거나 땔나무를 해서 시장에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 호구(糊口)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이들은 모두가 지난날 의병 장령들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고, 오로지 중얼거리는 것은 조국 뿐이고 잠자리에서도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를 부르고 통곡하곤 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니 공리(功利) 따위는 일신을 더럽히는 물건처럼 여겼다. 오직 속에 가득히 끓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서,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어찌 참된 의사(義士)라 하지 않으랴. 나는 그들을 깊이 존경하고 아낀다.”참으로 대단한 독립지사들의 기개와 가치관이다. 우리가 깊이 음미할만한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대지진(関東大震災) 발생, 

한인 대학살 자행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東京) 일대에서 대지진(関東大震災)이 일어난 뒤, 한인(조선인) 6,000여명이 학살되는 대참변이 벌어졌다. 관동대지진은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과 일부 시즈오카·야마나시 지역에서도 발생한 진도 7.9의 대규모 지진이었다. 이 때 사망자 10만 5천여 명, 부상자 11만 5천여 명의 큰 피해가 났다. 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혼란이 심해지자 일본 국민들의 불만을 재일한인들과 일부 사회주의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여 한인 학살사태를 초래하였다. 대지진 발생 이후 피살된 한인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일본인 전문가가 조사한 자료집에 실린 주요 증언 사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인을 10명씩 묶어 세운 뒤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죽지 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9월 3일 낮이었다. 다리 아래에 조선인 몇 명을 묶어 끌고 와서 자경단원들이 일본도로 베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다. 임신해서 배가 크게 부른 여자도 찔러 죽였다. 내가 본 것으로는 30여 명이 이렇게 죽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상하이판(上海版) 『독립신문』은 1923년 9월 4일 맨 먼저 호외를 발행하여 관동대지진과 재일한인 관련 소식을 보도했다. 그 뒤에도 큰 관심을 갖고 사실상 최초로 한인들의 피해를 체계적으로 조사, 보도했다. 『독립신문』은 이 해 12월 5일자(제167호)에서 모두 6,661명이 희생되었다고 밝혀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관동대지진시 학살된 한인 숫자는 거의 이 보도에 근거하고 있다.



강우규 의사,  

사이토 조선총독에 폭탄 투척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져 내외를 놀라게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직접 의열무장투쟁에 투신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독립운동가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나이였다. 


 신임 조선총독을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37명에 달하는 많은 관헌들을 살상했으니 그 충격은 컸다고 할 수 있다. 강의사는 거사 직후 현장을 여유있게 빠져나와 서울 시내에 잠적했다. 그러나 15일 만에 한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 11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는 사형 당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태연하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의연한 기개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요.”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 

진상보고회 개최


 9월 7일 일본의 조선인 아나키즘계열 단체 흑도회(黑濤會) 회원들은 1922년 7월 니가타현(新潟縣) 시나노카와[信濃川] 소재 댐 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또는수십명) 집단학살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도쿄에 있는 김약수(金若水)·나경석(羅景錫) 등 유학생 간부들과 함께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조사활동을 벌이는 한편, 규탄대회를 준비했다. 이 해 9월 7일 도쿄 YMCA강당에서 김약수의 사회로 열린 합동규탄대회에서 박열(朴烈) 등 흑도회 회원들은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의 응원을 받아 경과보고와 함께 연설을 진행하고 학살만행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연설을 중지시키고 주동자들을 체포하는 등 탄압을 가하였다.


임시정부 연락원 이양엽 밀정에게 피살


1921년 9월 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선 선원으로 활동하던 이양엽(李陽燁)이 일본 밀정 김정규(金貞奎)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그는 평북 삭주(朔州) 출신이었다.1919년 임시정부의 연통제 하에서 평안북도 연락밀선(連絡密船) 선원으로서 전학세(全學世)·정인찬(鄭仁贊)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의 임무는 압록강 연변 평안북도 지역 각 군청과 관할지역을 비밀리에 내왕 연락하기 위해 마련한 5인승 배 1척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1919년 박장호(朴長浩)·전덕원(全德元)·조맹선(趙孟善) 등이 남만주 지역에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1년 9월에 관전현(寬甸縣) 소구재구(小久財溝)에서 김정규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1923년 1월 통의부(統義府) 직원 등 4백여 명은 관전현에 모여 그를 비롯한 독립군 전사자 46명의 합동추도회를 열었다.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의정원)는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1차 개헌)을 공포하여 국무총리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등 임시정부 ‘개조’를 단행했다. 또 9월 15일 국내의 한성(漢城)정부(4.1, 서울)·상하이 임시정부(4.11)·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3.21, 블라디보스톡) 정부 조직을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통합방식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일어나 문창범(文昌範) 등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측은 상하이 임시정부 주도의 통합을 부인하기도 했다.


대종교 교주 나철,  

일제 폭정규탄 유서 남기고 자결 


1916년 9월 12일 대종교(大倧敎) 교주 나철(羅喆, 본명 나인영)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앞에서 일제의 폭정과 대종교 탄압을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15년 10월 조선총독부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교세가 확장되고 있던 대종교를 불법화하는 등 탄압하였다. 나철의 순교 후 대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재만한인 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활발한 포교와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본부를 북간도(중국 연변) 지역으로 옮기는 일대 결단을 내렸다. 즉 제2대 교주 김교헌(金敎獻) 주도로 1917년 봄에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 부근으로 총본사(總本司)를 이전한 것이다.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본거지를 옮긴 대종교는 이후 고유의 신앙을 매개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7년 7월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화룡현 일대에서의 3·1운동 시위, 1920년 10월의 청산리독립전쟁, 기타 중광단과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각종 독립운동 단체의 설립과 활동, 각종 교육·계몽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은 매우 유명하다.

 

김익상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한 김익상(金益相)은 1921년 9월 국내로 잠입했다. 이 달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하러 온 수리공처럼 가장하고 남산 기슭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갔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으로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지만,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큰소리를 내며 폭발하여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김익상은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 나왔다. 


이 후 그는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상하이(上海) 황포탄(黃浦灘) 부두에서 내리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오성륜(吳成崙)·이종암(李鍾巖)과 함께 저격한 ‘황포탄의거’를 감행하여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 장서  

김홍빈 익사 순국


1921년 9월 13일(음력 8월 1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 장서(掌書) 직책의 임무를 수행하던 김홍빈(金洪斌, ?~1921)이 압록강을 건너던 도중 물에 빠져 숨졌다. 그는1920년 7월 임시정부의 국내 지방행정조직이자 국내 연락기관인 연통부(聯通府)의 창성군 장서(掌書)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명령과 공문 전달, 구국재정단원(救國財政團員)의 모집, 군자금의 수합과 납부,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통신 연락의 임무를 수행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용철(申容澈)·강리달(姜利達) 등과 함께 국내로 밀파되었다. 귀국 후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같은 해 9월 13일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를 향해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도강(渡江)하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9월 20일 임시정부에서는 고인의 독립운동과 안타까운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성대한 추도식을 개최했다. 이 때 신우현(申禹鉉) 백기준(白基俊)의 추도시가 낭송되었다. 신우현은 “복수하려는 의로운 기운이 연달아 일어났고(雪恥義氣連) 복수의 칼날을 연마한지 십여년(磨劍十來年), 독립의 큰 기세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大局猶未了) 의로운 혼을 압록강변에 바쳤네(魂寄鴨江邊)”라고 만사(輓詞)를 지어바쳐 그의 충절을 기렸다. 


박재혁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1920년 9월 14일 박재혁(朴載赫, 1895~1921)의 부산경찰서 진입 폭탄투척 의거는 의열단 거사중 최초의 성공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는 1920년 8월 중국에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0년 3월 의열단이 단행한 경남 진영·밀양 폭탄의거는 실패했고, 곽재기·윤세주 등의 대대적 검거로 끝나고 말았다. 의열단은 진영·밀양 의거 당시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를 응징코자 하였다. 이에 부산 출신의 박재혁이 거사에 나섰다. 그가 부산경찰서에 진입하여 의거를 결행한 대담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과감하게 부산경찰서에 서적상으로 가장하고 진입하여 청사를 일부 파괴한 것은 물론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경찰서장을 처단했다. 그러나 자신도 중상을 입은 상태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 의거는 부산 지역사회와 전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부산경찰서 투탄의거는 1920년대 의열투쟁의 효시였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경성고등법원에서 1921년 3월 31일 최종적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던 중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단식을 단행하여 이 해 5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일제, 105인사건 조작, 독립운동 탄압 


1911년 9월 16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는 이른 바 ‘105인사건(신민회사건)’을 조작하여 윤치호(尹致昊)를 필두로 신민회(新民會) 등 관련 민족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하기 시작했다. 1907년 중후반 안창호·이동녕·이승훈 등은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단체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계몽운동과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등을 모색했다. 그런데 1910년 11월 황해도 일대에서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 모집사건이 발생했다(안악사건). 이를 구실로 조선총독부 헌병 경찰은 신민회 등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간부들을 체포하면서 이 사건을 확대 조작하여 이른 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총독부는 연루혐의자 389명 가운데 123인을 1912년 5월에 기소하여 6월 말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 이 해 9월 제1심에서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나 1913년 7월 대구복심법원의 제2심 공판에서는 105인 중 99인이 무죄판결로 풀려났다.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등 6인에게만 징역 5∼6년형을 선고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고문과 조작 등으로 점철된 무리한 탄압사건이었다(윤경로,『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성대학교출판부, 2012). 이후 신민회 계열 지사들은 중국 동북지방(만주)과 러시아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앞장섰다.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이 해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및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다음과 같은 ‘한국광복군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원년(서기 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자(玆)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중화민국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 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일본, 중국 동북지방 침략

(9·18사변, 만주사변) 


일본 관동군은 1930년 9월 18일 중국동북의 펑텐(奉天, 현재 瀋陽) 교외 류타오거우(柳條溝, 일명 柳條湖)의 철로를 폭파하는 등 이른 바 ‘만주사변(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고 함)’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침략했다. 관동군은 전격적 군사작전으로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괴뢰 ‘만주국(滿州國)’을 세워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1931년 ‘만주사변(9·18사변)’이후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중국(인)과 연대하여 공동투쟁하는 양상을 보였다. 중국동북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은 중국 국민정부(또는 중국의용군) 계열과 연계되었고,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들 다수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동북항일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 침략세력과 투쟁하였다.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순국  


1934년 9월 20일 남만주지역 최후의 독립군 조선혁명군 사령관이었던 양세봉(본명 梁瑞鳳, 1896~1934)이 순국하였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 출신 독립군 사령관으로 중국인들은 물론 한인 교민 등 민중에게 큰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일제 당국은 그를 암살할 흉계를 꾸몄다. 이를 위한 특별공작은 평북 강계 출신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주도했다. 그는 양세봉을 잘 알고 조선혁명군을 도왔던 중국인 왕밍판(王明藩)을 매수해 양세봉을 제거하려 했다. 왕밍판은 일본군과 괴뢰 만주국 군경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양세봉과 조선혁명군 참모들에게 ‘한중 합작’을 협의하러 가자고 거짓 제안했다. 왕밍판은 양세봉 등을 환런현(桓仁縣) 샤오황거우(小荒溝) 골짜기로 유인한 뒤에 결국 양세봉을 암살하고 말았다. 독립군 장병과 동포들의 애도 속에 부근의 고구려 흑구(黑溝)산성 아래에 묻혔던 양세봉의 시신은 일본경찰에게 다시 목이 잘리는 수모를 겪었다.


13도창의군 대장 이인영 순국 


1909년 9월 20일 전국 연합의병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를 이끌었던 이인영(李麟榮, 일명 李寅榮, 李時榮, 1868~1909)이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1907년 말에서 이듬해 초 서울 진공 직전 전성기의 13도 연합의병 부대 총수는 약 1만 명(혹은 8천 명)을 헤아렸다. 이 가운데 근대적 무기인 양총을 가진 과거 진위대 병사들과 기타 훈련받은 군인출신이 거의 3천 명이나 되었다. 13도 연합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전국의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1907년 말에 진격을 개시했다. 이들이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후퇴한 1908년 2월 초(음력 1907년 12월 말)까지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인영은 이 때 직접 3백 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산하 각의진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본군이 먼저 쳐들어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원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체제를 갖춘 뒤 음력 정월(1908년 2월 경)에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기도 양주군에 있을 때인 1908년 1월 28일(음력 12월 25일) 부친 사망의 부고를 전해 받았다. 이에 그는 곧 후사를 군사장 허위(許蔿)에게 맡기고 부친이 있었던 문경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이로써 전국 연합의진의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20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일본군 장교의 심문시에도 13도창의대장으로서의 의연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굳센 독립정신과 충효정신을 분명히 밝혔다. 또 임종시에는 동양평화를 기원하는 한시를 남겼다.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자결


1921년 9월 28일(음력 8월 27일)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총재를 역임한 대종교 독립운동 지도자 서일(徐一, 본명 서기학, 1881~1921)이 북만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그는 1920년 10월 하순의 청산리전투에서 홍범도 독립군 연합부대와 함께 명성을 떨친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 부대의 무기구입을 주도했으며, 친히 무기운반대를 이끌고 연해주에 가서 온갖 난관을 헤치고 무기를 본거지로 운반해 왔다. 그러나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을 이끌고 북만주로 북상했다가, 1921년 6월 시베리아의 알렉셰프스크(현재 스보보드니)에서 이른 바 ‘자유시사변’으로 독립군이 큰 타격을 받은 뒤 북만주의 중러 국경지대로 돌아왔다. 서일은 중·러 국경지대인 흥개호(興凱湖) 부근의 넓은 평야가 발달한 당벽진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데리고 농사를 짓는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소식을 탐지한 일제 당국은 부근 지역에서 출몰하며 약탈을 일삼던 마적떼(토비)를 사주하여 독립군 일행을 습격케 하였다. 그 결과 1921년 9월 27일 당벽진 북산 위에서 12명의 부하 장병들이 마적떼와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서일은 마을 동포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지도자로서의 책임감과 무력항쟁의 기반이 물거품이 된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는 최후의 길을 결심하였다. 비분강개한 서일은 9월 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대종교의 폐기법(廢氣法 - 숨을 쉬지 않는 방법)으로 자결, 순국하는 장엄한 최후를 보였다.



유관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12월 충남 천안군 병천(竝川, 아우내)에서 태어나 악명높던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9월 28일, 만 1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우선 10여 년 전에 공개된 목천 3·1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경성복심법원(지금의 서울 고등법원) 판결문의 주요 부분을 소개해 본다. “피고 유관순은 경성(京城)에 있는 이화학당 생도인데, 대정 8년(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음을 보고, 같은 달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같은 해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竝川, 아우내)시장의 개시(開市)를 이용하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같은 날 오후 1시경 이 시장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수천 명의 군중단체에 참가하여 앞에서 언급한 태극기를 흔들며 이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 “…만세를 부른 후 자신은 주재소로 가서 보았더니 아버지의 사체가 있었기에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민족을 죽이느냐」고 말하고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지 않으려고 갑자기 그 가슴에 매달렸다…” 


1919년 4월 1일 병천 만세세위운동 과정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少悌)가 일본 헌병에 피살되었고, 숙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도 참가하는 등 온 가족이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여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지만,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심 형량이 과중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3·1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전개하는 등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국 열악한 옥중생활과 간수들의 모진 고문, 구타 등의 여독으로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 해 4월 일본의 ‘특사령(特赦令)’으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는데, 석방을 불과 3일 앞둔 시점이었다. 



선천경찰서 폭파 박치의 사형집행으로 순국 


1921년 9월 30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결사대원으로 평안북도 선천경찰서를 폭파한 박치의(朴治毅, 1904~1921)가 평양 감옥에서 교수형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나는 다만 조국을 위하여 죽을 따름이다’라고 말하며 성경을 외우고 찬송을 부른 후,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간수 등 주위사람을 놀라게 했다. 


선천 출신이다. 1920년 8월경 남만주의 광복군총영에서 파견된 제3대 결사대원 임용일(林龍日)·이학필(李學弼)·김응식(金應植) 등 세사람을 만나 이들의 국내 특파활동에 적극 찬동하고, 구체적 실천계획에 참여했다.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이 밖에서 망을 보는 사이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경고문 등 몇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뿌리고 피신했다. 그러나 경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동지 20여 명과 함께 9월 7일 경 체포되었다. 거의 1년간 재판 끝에 1921년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이 선고되자 갑자기 일어서서 두손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라고 크게 소리쳐 방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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