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항쟁사 [2020/09] 뜨거운 독립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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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연해주 등 한인동포 사회 중심으로 전개
글 │ 편집부
국내 의병 항일 투쟁은 191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국내에서의 독립항쟁에 한계를 느낀 많은 독립항쟁가들이 국외로 이동하여 새로운 항일 독립항쟁 근거지를 만들었다. 만주, 연해주 등지는 물론 일본, 미국 등에도 독립항쟁가들이 망명하여 한인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는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된 19세기 후반부터 우리 민족의 상당수가 건너가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어 독립항쟁 기지가 될만한 여건이 충분하였다. 우리 민족의 권익과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자치기관과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우는 한편, 애국 단체를 조직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도 계속하였다.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다 | 독립항쟁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 1910년대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활동 무대를 옮긴 독립군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먼저 독립항쟁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한민족 집단 거주지로 북간도 일대의 용정촌과 명동촌, 남만주의 삼원보, 연해주의 신한촌, 밀산부의 한흥동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독립항쟁기지는 동포 사회를 바탕으로 납세 및 의연금 형식의 군자금을 조달하여 무기 등을 구입하고 독립군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독립군들은 1919년 3.1 운동을 벌일 당시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을 겪으며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에 1920년대에는 독립군 기지를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히 펼쳤다. 이 때 조직된 대표적인 항일무장독립항쟁단체로 천마산대, 보합단, 구월산대가 있다. 1919년 최시흥 등이 조직한 천마산대는 평안북도 의주에 위치한 천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경찰 및 친일주구 처단에 주력하다 만주로 이동하여 광복군총영에 통합되었다. 1920년 김동식 등이 평안북도 의주에서 조직한 보합단은 의주 동암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기관을 파괴하고 악질 친일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다 1923년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복군총영 등이 대한통군부를 결성할 때 함께 통합되었다. 구월산대는 1920년 이명서 등이 황해도 신천에서 조직한 단체로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과 독립항쟁을 방해하는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다 만주의 독립군에 합류하였다. 만주 항일 투쟁의 힘 | 신민회와 안동 혁신유림 1907년 비밀리에 조직된 항일독립항쟁단체 신민회는 민중계몽, 국권회복, 실력양성을 목표로 국내에서 교육구국운동,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경술국치를 앞두고 일제의 항일 투쟁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신민회는 국내 활동에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다. 안창호를 비롯하여 이갑, 이동휘, 신채호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은 1909년 미국과 연해주, 만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1910년 신민회는 활동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각각 회의를 열고 독립전쟁론에 뜻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구축, 무장 독립 전쟁으로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국내에 남아 있던 신민회 세력은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탄압을 받다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한 안동의 혁신유림이 국외 독립항쟁을 이끈 데에는 안동문화권만의 선비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 남인들의 정계 진출이 막히자 안동 유림들은 학문의 발전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집성촌, 학문적 동지, 혼맥 등을 통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며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안동 유림들은 의병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서양의 신문화와 신사상을 받아들였고 혁신유림으로 전환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류인식, 이상룡, 김동삼, 김대락, 김후병 등이 대표적인 혁신유림이다. 이들은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와 계몽 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안동은 우리나라 독립항쟁의 성지라 불릴 만큼 조선 말기 의병 항쟁부터 광복을 위한 독립 투쟁에 이르기까지 독립항쟁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다.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안동 지역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는 350명을 넘어선다. 안동지역의 독립항쟁은 유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대의명분을 중시한 안동 유림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항쟁을 펼치는 것을 당연시 여겼으며 부(富)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양반들 간의 갈등이 적었고 집단 간의 결속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들 양대세력이 힘을 합쳐 1911년에 세운 것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였다. 일제에 맞서 무력으로 투쟁하라 | 무장 투쟁의 전개 이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독립항쟁은 무장 독립 전쟁론이었다. 3.1 운동 당시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이 이루어짐에 따라 무장을 하고 직접 싸우는 것만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장 독립 투쟁은 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대표적인 독립군 부대로는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 서로 군정서, 군무 도독부, 국민회군, 대한독립청년단, 대한독립당, 혈성단 등이 있었다. 특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무장 독립 투쟁사에 길이 남을 명전투였다. 일제가 이 전투에서 패배한 보복으로 간도 지역 동포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집과 농작물을 불태우는 등 온갖 탄압을 가했지만, 무장 독립 투쟁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쉼 없이 전개되었다. 애국지사들은 국내외에서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하거나 침략 행위에 앞장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주살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의열 투쟁이라 한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노인단 소속 강우규는 서울역에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사이토 총독 처단 작전은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의열 투쟁은 주로 1920년대~193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한국 독립항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이었다. 의열단의 목표는 식민 통치와 관련된 기관과 핵심 인물을 응징하는 것으로, 테러와는 차원이 다른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 의열 단원은 주로 18세에서 26세 사이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동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조선 총독부와 동양 척식 회사 등 일제의 우리 민족 수탈 기구를 파괴하고 일제 관료 및 친일파를 처단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현하다 | 의열단 비폭력 평화 시위로 전개된 3.1 운동이 일제의 잔인하고도 폭력적인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으며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하자 독립군들은 독립을 위해 강력한 무장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군 부대와 항일 의열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1920년대 의열 투쟁에 있어 가장 빛나는 성과를 이룬 단체는 단연 의열단이었다. 의열단의 정신은 의열단의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잘 드러난다.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가 기초하였는데 일제침략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잔악한 일제를 한반도로부터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으로 맞서야 하며 외교를 가지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열단은 의혈단이라고 불리며 주로 조선 총독부와 경찰서,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일제의 주요 시설을 무너뜨리고 조선 총독부 고위 관리와 친일파 우두머리를 처단하였다. 이는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민중 봉기를 유발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1920년대 후반 들어 개별적인 무장투쟁에 한계를 느낀 의열단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난징에 군사간부양성학교인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웠다. 이어 중국 지역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