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2022/09] 함남 정평의 만세시위 1 l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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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다 된 주재소…끝나지 않은 유혈 만세시위
“10년 쌓인 울분이 터져 나온 것이다”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3월 2일 밤 함경남도 정평군 부내면 정평 읍내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그날은 독립선언 둘째 날이었다. 읍내에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정평 헌병분견소 헌병들이 급히 16매를 수거, 압수하고 경계에 들어갔다. 일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선언서가 전달되자 마을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유혈 시위를 불사했다. 중과부적이 된 헌병들이 실탄을 발포했다. 주재소는 피바다가 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이어진 헌병들의 탄압으로 1명이 부상을 당하고 11명이 체포 구금을 당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3월 2일 정평에 독립선언서 배포
그날은 독립선언 둘째 날이었다. 읍내에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정평 헌병분견소 헌병들이 급히 16매를 수거, 압수하고 경계에 들어갔다. 일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선언서가 전달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후 정평이 잘 보여 준다.
3월 7~8일, 12일 정평 부내면 만세시위
부내면 풍양리 원종집(元鍾潗, 33세)이 선언서를 받아 읽었다.
“독립선언서!”
그는 크게 감동받았다. 자신이 사는 부내면 풍양리에서는 매월 음력 1일과 6일에 장이 섰다. 다음 장날은 음력 2월 6일, 양력으로 3월 7일이었다. 원종집은 다음 장날에 독립운동을 벌일 결심을 했다.

목면상 장예학이 적극 나섰다. 그는 3월 7일 이대벽, 이종하가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윤화락(尹和洛, 33세), 노문표 등과 함께 부내면 풍남리로 달려갔다. 윤화락은 “나는 3월 4일 아침 집 뜰에 떨어진 독립선언서를 읽고 기쁘게 생각하여 만세를 불렀다.” 또한 동리민에게 “조선독립선언서를 읽은 기쁨으로 모두 만세를 부르라”고 고무하였다. 300여 명이 모였다.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동은 부내면 남산리 길 위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였다. 풍서리 윤화락은 군중들에게 “조선이 독립되는 것은 경사다.” “조선독립선언서를 읽은 기쁨으로 모두 만세를 부르자”고 연설했다. 일동은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장터에서 헌병의 출동으로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밤 8시경에 다시 김순연, 한경만 등이 읍내 주민 200여 명과 함께 정평헌병분견소와 정평 군청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6명이 체포당했다.
김순연과 한경만, 원종집과 노용빈 등은 재판에 회부되어 1심에서 징역 1년 6월 등의 형이 선고되자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까지 상고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원종집은 고등법원 법정에서 “오늘의 폭발은 어찌 일조일석의 일이겠는가. 10년의 쌓인 울분이 오늘에 이르러 터져 나온 것이다. (중략) 속히 조선의 독립을 허락하라”고 하며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 내용이 고등법원 판결문에 남아 있다.
그 다음날인 3월 8일 부내면에서 학생 8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평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3월 12일 다시 부내면 장날이 왔다. 읍내 천도교인, 기독교인 80여 명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평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도 인사 3명을 체포했다.
3월 13일 춘류면 대규모 시위

춘류면 신하리의 한장번(韓壯蕃), 우창기(禹昌箕), 원세후(元世垕), 이석관(李錫觀), 이준수(李晙洙) 등 5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3월 13일 신하리 장날이 오자,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여 휘두르고 영생학교 교사 이준수는 선도자가 되어 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춘류면 신상리에서부터 신포리와 신하리 사이를 왕래하며 시위를 벌였다. 낮 12시경 이들 주도자들은 신상리 시장에 모여든 군중 1,500명을 이끌고 시장과 주변 마을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장번은 시장 중앙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국 만세!”를 불렀다. 우창기, 이석관, 원세공도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을 독려했다. 이석관과 이준수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치면서 신상리 우편소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오후 1시경 김흥식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 17~8기를 나누어주며 군중들을 지휘할 때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고 태극기 3기를 빼앗았다. 그러나 한장번이 태극기를 흔들며 나섰다. 그 사이에 시위군중은 약 4천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는 해질 무렵까지 계속되다 오후 6시경 일단 해산하였다.
오후 8시경이 되자 다시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오후 9시 30분 신하리 예수교 교당 부근에 약 5천 명의 대군중이 집결했다. 이석관, 이준수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앞장섰다. 대규모 시위군중은 산천을 뒤흔들듯 독립만세를 외치며 신상리 우편소 앞으로 나아갔다.
헌병들은 군중을 압박하며 이석관, 이준수를 체포했다. 그러자 신상리 주민 300명은 신상리 헌병주재소로 쳐들어갔으며, 일본인 철도 인부 숙소에도 짚에 불을 붙여 던져 태웠다. 헌병들은 철도 인부들과 실탄을 발사하여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만세시위는 다음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춘류면 시위는 매일신보에 보도될 만큼 눈길을 끌었다.
“밤에 군중이 남신상리 헌병주재소와 철도 공부의 숙사를 엄습하고 돌과 나무조각을 함부로 던지며 폭행을 함으로 부득이 발포하여 진압을 하였고 14일 오후 1시경에는 정평군의 덕장(선덕면 선덕장리)에서 군중 5백 명이 헌병주재소를 엄습하고 난폭한 행동을 함으로 부득이 발포하고 진압을 하였는데 군중 측에는 부상한 자가 4명이라더라.”(매일신보, 1919년 3월 17일자)
3월 14일 선덕면 유혈 만세시위
3월 12일에는 선덕면 동원리에서 주민 3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선덕장 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그 다음날인 3월 13일 오후 6시 30분경 1918년 7월 선덕면장 직에서 물러난 문석해(文錫海)는 구남동 최도곤(崔道坤, 31세, 농업)을 조용히 불렀다.
“지금이야말로 조선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집집마다 2명 이상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소.”
하며 경고문과 참가 권유 권고문을 주었다. 최도곤은 자기 집으로 최두언 등 12명을 불러 권유하고, 또 흥덕리의 박문익(朴文翼, 34세)을 찾아가 권유했다. 박문익은 경고문을 받아 주화원에게 전달했다. 주화원은 3월 14일 이응교 등 5명에게 전달하며 참가를 권유했다. 주화원에게 경고문을 받은 이형률은 서인택 등 15명에게 참가를 권유했다. 조직적으로 면민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4일 오후 1시 선덕장(宣德場) 시장에는 천도교, 기독교 교인 등 약 500명의 군중들이 집결했다. 서인국(徐寅國), 주종혁(朱鍾赫)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만세 군중들은 시장에서 선덕장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서인국, 주종혁은 시위대를 이끌고 사무실로 진입하여 헌병들의 무기를 빼앗으려 몸싸움을 벌였다. 군중들이 뒤따라 사무실에 들이닥쳐 책상을 뒤엎고 무기고로 밀고 들어가 문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고자 했다.
중과부적이 된 헌병들이 실탄을 발포했다. 5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주재소는 피바다가 되었다. 시위대는 해산했다. 이어진 헌병들의 탄압으로 1명이 부상을 당하고 11명이 체포 구금을 당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