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9] 독립운동에 앞장선 장애인 독립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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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멀고 팔다리 없어도 불굴의 투지로 일제에 항거하다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까지 먼 줄 아는가”
신체적 장애를 넘어선 초인적 저항 정신
글 | 편집부
신체적 장애는 독립운동의 한계가 되지 못했다. 시각 장애인이었던 심영식은 치마 속에 태극기를 숨기고, 앞이 보이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 독립선언서를 전파했다. 서대문형무소 간수가 “맹인 주제에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비아냥대자,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까지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은 만세 시위 중 왼팔 잘려 나가 피를 흘리면서도 당당히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심산 김창숙은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에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불굴의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출옥한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뿌리치며 항일의식을 꼿꼿이 지켰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에 항거했다.
개성 만세운동 주도한 시각 장애인
심영식(1887~1983)
심영식은 어린 시절 시력을 잃었고, 결혼 후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 평생 삯바느질로 남매를 홀로 키워낼 만큼 어려운 상황과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민족과 주변의 상황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 수백 장이 개성의 북부교회 강조원 목사에게 전달되었으나, 소심한 강 목사는 여러 사람에게 배포하지 못했다. 그러자 어윤회라는 사람이 보따리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독립선언문을 전달했는데, 그것을 본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 호수돈여학교 출신 전도부인 심영식이 합류했다. 시각 장애인이었던 그는 치마 속에 태극기를 숨기고, 앞이 보이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 독립선언서를 전파했다.
심영식은 3월 3일 개성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일본군 기마병의 행렬 앞으로 뛰어들어 군중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다 체포되었다. 이듬해인 1920년에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 소리가 서대문형무소 여자 감옥에서 울려 퍼졌을 때, 일제는 유관순과 심영식을 주요 인물로 지목할 정도로 열성이었다. 옥중 생활 중에 간수한테 불려 나가 뺨을 많이 맞아서 한쪽 고막이 터져 세상 떠날 때까지 귀에서 고름이 나올 정도로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시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정신적 학대를 당하기도 했다. 하루는 간수가 “맹인 주제에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비아냥대자,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까지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고 한다.
선천성 시각 장애로 앞을 보지 못한 까닭에 해방 후 독립유공자 신청을 못 해 오랫동안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의 독립운동 활동을 책으로 만드는 등 아들 문수일 씨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난 1990년에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왼팔 잘린 채 대한독립 외친 ‘조선의 혈녀’
윤형숙(1900~1950)

그리고 3월 10일 오후 거리로 나섰다. 일본 헌병은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의 맨 앞에 섰던 윤형숙의 왼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그는 팔이 잘려 나간 아픔도 견뎌내며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당당히 일어나 태극기를 다시 든 채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초인적 항거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비분강개해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이어갔다.
윤형숙은 그날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이 크게 다친 상태로 체포됐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은 그는 수년 동안 군병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유폐되었다. 이날 만세 시위 이후 ‘조선의 혈녀(血女)’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함남 원산 마르다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윤형숙은 요양차 전북 전주로 내려가 전주기전야학교 사감으로 일하고 고창군의 한 유치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건강은 점점 나빠져 1939년 고향 여수로 내려갔다. 왼쪽 눈의 시력마저 거의 잃었지만 봉산학원 교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야학을 열어 글을 모르는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던 어느 날, 더 큰 비극이 닥쳤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북한군이 여수까지 점령했을 때, 북한 인민군은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윤형숙을 총살했다. 독립운동으로 팔과 눈을 잃고도 누구보다 열심히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조선의 혈녀’는 2004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평생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벽옹(躄翁)’
김창숙(1879~1962)

심산은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을 받아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이후 스스로 ‘벽옹(躄翁)’이라는 호를 지어 썼다.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일어설 수 있는 병약한 상태였으나 불굴의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나는 대한사람이고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며 변호사도 거절했다.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4년형이 선고됐으나 항소도 하지 않았다.
감옥 생활에서도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꼿꼿했다. 간수들의 우두머리인 전옥에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책을 압수당하는 징벌을 받기도 했다. 전옥이 간수를 시켜 최남선의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를 전해 주자 “일본에 붙은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시끄럽게 짖어댄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며 책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몸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1934년 9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이후에도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뿌리치며 항일의식을 꼿꼿이 지켰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초창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 계열에서 정치활동을 했다. 1945년 12월,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 2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친일 세력이 득세하는 것에 항의하며 바로 비난 성명서를 내고 의원직을 거부했다.
6·25전쟁 후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다. 1952년 이승만이 정권 연장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이에 저항하다가 두 차례나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52년 6월에는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던 중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하반신을 못 쓰는 앉은뱅이였던 탓에 도망도 못 가고 의장석에 앉은 채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승만 독재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김창숙은 이승만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57년 7월 이승만 정권은 유도회 분규를 사주하고 깡패들을 동원해 심산을 몰아냈다. 이후에도 심산은 불굴의 의지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했고, 마침내 82세 나이로 병상에서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들었다. 상해 시절부터 이승만과 각을 세웠던 심산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1962년 3월에야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