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0/09] 불운한 독립운동가 월송(月松) 김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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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장독립투쟁의 처음과 끝을 장식
통일된 하나의 해방조국을 염원하다
글 | 편집부
혁신유림으로 거듭난 내앞마을과 협동학교 개설 김형식(金衡植)의 자는 응엽(應燁) 초명은 회식(晦植)이고 호는 월송(月松)이다. 고종 14년(1877)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 병수(秉銖)의 딸이다. 그는 내앞마을의 중흥조 김진(金璡)의 둘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의 12대 손이다. 월송의 조부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은 금부도사 벼슬을 하여 내앞(川前)마을에서는 ‘도사댁’이라 부른다. 도사댁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세칭 ‘삼천석 댁’으로 많은 인재와 학문과 경제력을 고루 갖춘 지체 높은 집안이라는 뜻이다. 어려서 부터 한학을 익히고 유학을 가학으로 배웠다. 조부 우파 공으로부터 한학과 글씨를 전수하여 능문능필(能文能筆)하였을 뿐 아니라. 풍채는 헌헌장부(軒軒丈夫)로서 육척장신이었으며, 문, 사, 철을 두루 갖춘 문중의 촉망받는 젊은이였으며 1902년 형인 명식(明植)이 일찍 사망하자 형식은 백하 김대락의 유일한 아들로서 협동학교 운영과 만주망명 등 독립운동으로 닥쳐오는 집안의 풍운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기둥이 되었다. 1907년 내앞마을에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월송은 교사에 취임하였다. 그가 애국 계몽운동기 혁신적인 중등학교 과정을 가르칠 정도로 신학문을 어떻게 익혔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친 백하 김대락이 신사상을 받아들인 것이 아들 월송의 간곡한 진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문화에 대한 개명의식이 강했다. 학교의 이름이 ‘협동(協同)이 아니라 협동(協東)학교’로 된 이유는 개교 당시, 안동의 동쪽 7개면(임동면, 임현내면, 임북, 임서, 길안, 동후, 와룡면)의 인력과 재력을 협력하여 설립했다고 해서 ‘협동’으로 지었다 한다. 내앞마을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협동학교는 설립 1년 후에 경북 북부지방에서 몰려드는 유학생으로 넘쳐나 숙식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그때 월송의 부친 김대락 공이 기와집 50여 칸의 저택을 교실과 기숙사로 제공하고 자신은 옆집 초가에서 생활하니, 안동과 원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강의실과 기숙사를 함께 갖춘 협동학교는 전국 어느 학교에 못지않는 훌륭한 시설이었다. 당시 황성신문 1909년 3월 19일자 논설은 “근일 안동에서 보내온 소식에, 임하면 천전리에 사는 김대락 씨가 교육을 일으킬 사상으로 자기소유의 새로 지은 50여 칸 가옥을 내놓아 교사를 이루게 하고 자기는 작은(초가)집에 이주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문중의 원로 김대락과 대종손 김병식(초대 교장)이 협동학교 신교육의 선봉장이 됨으로써 천전 의성김씨 문중을 혁신유림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구실을 했고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1908년) 고모부 석주 이상룡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자 월송은 종형 근암 김만식과 함께 대한협회의 계몽운동과 협동학교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 서간도 망명 이후, 항일 독립기지 건설에 전념 서울에서도 참판 이석영. 이회영 6형제, 이동녕, 이관직 등 그 외 여러 집과 많은 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서로 의론하여 흥경. 통화. 유하. 해룡. 휘남 등에 정착키로 하였으나 유하현 삼원포에 주로 살았다. 삼원포 시가지에서 약 20리 떨어진 추가가 대고산 아래서 이상룡, 이회영, 이동영, 김창환 부자 등 300여 명이 노천회의 결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기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목표로 삼은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어서 신흥강습소(뒤에 신흥중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를 세워 청년들을 독립운동의 중견인재로 양성하기로 했다. 월송은 1912년경, 신흥학교 부근으로 이주하여, 백하 김대락과 석주 이상룡을 중심으로 학교 경영에 헌신하였다. 당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작은 단체들을 통합하여 공리회, 부민단이라는 자치단체를 조직하고 결성하는데 월송은 회장을 맡은 고모부 이상룡을 도와 열심히 활동하였다. 월송이 신흥학교를 운영함에 있어 여러 해 동안, 이석영 이회영 형제분의 사유자금이 많이 출연되었고 백하 김대락과 이상룡도 사유자금을 많이 출연해 학교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신민회에서 약속한 60만원의 독립자금이 신민회105인 구속사건으로 중단되자 1913년 정월에 이회영은 본국으로 이시영은 상해로 이동녕, 장유순은 연해주로 가고, 가뭄에 이른 서리가 내려 흉년으로 생활은 더욱 곤란해져, 학교운영도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황무지를 개간해 자급자족을 통한 독립기지 건설을 도모하고 밤에는 민족정신 함양 및 독립투쟁의 강좌를 실시하였다. 수전농사 개발에 성공, 독립투쟁의 기반 완성하다 만주에 많은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 모여 살다가 보니, 토지와 곡식과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망명 당시 지참한 화폐가치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자, 심산에 들어가 큰 나무를 베어내고 화전을 일구어 곡식과 감자를 심었다. 양식 걱정은 덜었으나 거처할 집이 귀하여 통나무로 틀방집을 짓고 토막 통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었다. 겨울엔 샘물이 마르면 눈을 녹여서 먹고, 석유 사기가 비싸고 힘들어 벽에다가 광창을 내고 송진을 태워 등불을 대신하니 아무리 연기통을 내었다 해도 방안은 온통 그을음과 연기로 가득했다. 공기가 나빠서 노약자는 건강에 많은 위협을 받게 되니, 차차 평원으로 내려와 농사짓기 쉽고 사용하지 않는 황무지 땅을 개간하였다. 버들뿌리를 캐내고 습지에 도랑을 내어 냉수를 뽑아내고 울로초 더미를 제거하고 수로를 내고 논을 만들어 벼를 심었다. 식량의 품질도 좋고 생산량도 많아 생활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신흥학교 생도들에게도 식량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14년부터 신흥학교는 매년 속성과 본과 졸업생 1~2백 명씩 배출하여 분산되어있는 각 마을마다 우리 동포들을 직접 계몽 또는 지도자로 활동하게 하거나 소학교 체육교사로 파견하는 등, 각 방면의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몇 백 명씩 되는 신흥학교 학생들이 황갈색 교복을 입고 쇠 방아쇠가 장치된 목총을 메고 대대 중대로 편제하여, 횡대로는 먹줄로 튕긴 것 같고, 종대로는 질서정연하게 훈련하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1912년에는 통화현 합니하로 이사했다가 다시 삼원포 남산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1914년 12월 10일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부친 백하 김대락이 작고하였다. 1919년 3.1운동 뒤에는 한족회가 결성되어 월송은 학무부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헌신하였고, 1920년 12월 4일에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부총판을 위촉받아 경신참변(일명 간도참변) 후의 동포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3년 1월 독립운동 전선의 재정비를 위하여 상해에서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월송은 한족회 대표로 참석하여 그해 여름까지 상해에 머물렀다. 그해 가을에 만주로 돌아와 영안으로 이사한, 양아들 정로의 집으로 가서 휴양을 취하였다. 마침 거기에 대종교 3세교주로 취임한 윤세복이 대종교 본부를 설치하여 그와 교우하며, 그의 아들 윤필한을 둘째 사위로 맞이하는 경사가 있었다. 1924년에 전만통일회 중앙위원에 추대되었으나, 신병으로 취임하지 못했고, 1925년에는 정의부 민사위원장(내무부장)에 선임됐으나 역시 건강 때문에 사양하였다. 이 해에 셋째 사위로 이태형을 맞았는데, 월송은 후일 자신이 정리한 ‘선고유고’를 맡긴 것으로 보아 이 셋째 사위를 가장 믿었던 것 같다. 건강이 회복되자 1927년에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고, 취원창으로 이사하여 그곳 조선족 민족학교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5년부터 액운이 닥쳐 둘째 딸과 며느리 평해 황씨가 작고하고, 설상가상으로 부인 진성이씨도 와병으로 작고하였다. 가장 힘든 시기를 만난 월송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하여, 정로는 어린손자를 데리고 조선으로 회국시키고, 월송은 돌아가지 않고 ‘무면도강’이라 떨어져 독거생활을 하게 되니 종질되는 문로가 부친같이 모시었다. 그것도 한두 달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40여세 되는 얌전한 독신여성을 맞아 결혼하자 이분이 부인 엄씨이다. 1937년 5월 11일 월송의 회갑일을 맞아 고향 안동에서 양아들 정로가 오고, 사위, 친족, 종반, 지우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회갑 축하연을 열었다. 1938년에는 새로 얻은 부인 엄씨가 아들 직로를 낳았다. 이 무렵 고모부 석주 이상룡의 무덤을 석주공의 조카 이광민이 조선인 산소가 많은 취원창으로 이장할 때, 비문과 석각자체를 월송이 썼다. 1940년 가을에 사촌 규식과 함께 삼원포 남산에 있는 아버지 백하 김대락 공의 산소를 찾아 가토하고 지석 대신으로 흰 사기사발 안에 검은 페이트로 글을 써서 산소 앞에 묻어두었다. 그후 월송의 세 식구는 길림성 영길현 강밀봉 인근에 사는 사위 이태형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정세가 험악해지자 1943년에 직로 모자를 고향으로 보내고 홀로 취원창으로 돌아왔다. 그에 앞서 ‘선고유고’를 사위 이태형에게 맡기면서, 평소 그의 사상을 피력했다. 무신론, 미신타파, 남녀평등, 또 제사를 지낼 때 남녀와 적서의 차별을 타파할 것을 강조하고 고모부 “석주 이상룡의 ‘대동역사’를 민족사상의 중심”이라 역설하였다. 1944년 연안의 독립동맹에서 파견한 이상조로부터 독립동맹 북만지부 책임자로 위촉되어 독립운동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월송은 조선의용군의 정당인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의 초청을 받아 독립동맹 북만지부 책임자의 자격으로 평양에 갔다. 그 뒤 혁명자 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1948년 4월 19일 조국의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평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참석한 남북연석회의에 개회식의 임시의장(사회)을 맡았다. 이후 길림시에 살다가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나 6.25동란이 발발하여 다시 길림시로 돌아온 평해사람 황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평양과 금강산에서 여러번 공(월송)을 뵈었는데 혁명자 후원회에서 지내시다가 연로하여, 금강산 장안사 국영양로원에 휴양 중 전화(戰禍)가 미치자 외인에게 수욕 당할 것을 염려하여 구룡폭포에서 자진하였다.”고 한다. 향년이 74세였다. 이때 절명시를 마지막으로 남긴다. 此 山 應 有 仙 이산에 응당 신선이 있어도 肉 眼 不 分 看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白 髮 雲 聳 間 백발이 구름 사이로 솟으니 人 謂 我 神 仙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이르네 위의 절명시를 찬찬히 읽어보면, 죽음 직전에 쓴 시가 아니고, 앞으로 닥쳐올 미래와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날의 고심 끝에 쓴 작품으로 사료된다. 1연의 ‘신선’은 속세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월송 자신이고, 2연에서는 그 신선(월송)을 인간의 육안으로는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했다. 3연에서 ‘백발(신선 곧 월송)이 구름 사이로 솟으니’는 월송이 속세(구름)를 벗어나 죽음에 이름을 나타내고, 4연의 ‘사람人’은 색안경을 끼고, 이념에 매몰되어 평가하는 사람이 아닌, 올바르게 평가하는 후대사람은 월송을 ‘신선’(진정한 독립운동가)으로 부른다고 할 수 있겠다. 전 국민대 조동걸 교수는 “월송이 금강산 신선이 되어 외인의 수욕도 당하지 않고, 독립동맹의 김두봉과 이상조가 숙청당하는 것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월송을 왜 금강산 장안사로 휴양을 보냈을까? 투신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 의심에 대해, 월송의 종손자 김시중의 증언이 있다. 6.25전쟁 전에 김일성은 7~8명 핵심 인물을 모아놓고 남침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는데, 월송 혼자서 ‘이러려면 독립운동을 왜 했느냐.’며 를 반대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김일성의 노여움을 사서, 금강산으로 유배되다시피 쫓겨났다는 얘기다. 그러다 김일성이 전화(戰禍) 속에 있는 월송을 방관만 할 수 없어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월송은 자신을 데리러온 사람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하고 곧바로 비룡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월송 김형식이 금강산 비룡폭포에서 자진한 지 올해가 70년이 된다.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은 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표적 독립 운동가이다. 나라를 빼앗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고향을 떠나 낯선 만주 벌판에서 천신만고 조국독립을 염원하며 싸워온 망명한 동포의 지도자로서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꿈꾸었던 ‘온전히 독립된 조국’을 목격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 자손들은 조상들의 독립운동을 떳떳하게 기리지도 못하고 덮어 둔 채로 숨죽여 살아왔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오로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색안경을 쓴 채 그들의 발자취를 뒤쫓고 있다. 독립 운동가들의 발자취 자체는 색깔이 없는데도… 그러는 사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들은 우리에게 잊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