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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항쟁사 [2020/10] 만주, 연해주 등 한인동포 사회 중심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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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독립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다 


글 │ 편집부 


국내 의병 항일 투쟁은 191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국내에서의 독립항쟁에 한계를 느낀 많은 독립항쟁가들이 국외로 이동하여 새로운 항일 독립항쟁 근거지를 만들었다. 만주, 연해주 등지는 물론 일본, 미국 등에도 독립항쟁가들이 망명하여 한인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 독립군 양성소 | 신흥무관학교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처음 검토한 때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1907년이었다. 신민회는 해산당한 군인들이 참가한 의병 항쟁을 지지하였다. 의병 항쟁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현대화된 군사훈련과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방책을 세웠다.  


독립항쟁 거점 마련 │ 만주 유하현 삼원포  

1909년 의병 항쟁이 점차 쇠퇴하면서 신민회는 본격적으로 국외의 무관학교 및 독립군 기지의 설립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안창호, 이동휘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해당 사건과 관련 있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신민회는 다시 학교와 독립군 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고 1910년부터 이주를 시작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각종 사건들을 날조하여 신민회원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신민회가 해체되는 와중에도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동녕, 윤기섭, 김창환 등과 안동 혁심유림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유인식 등이 만주와 연해주에 동포들의 거주 지역을 개척하고 항일 독립항쟁거점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산업을 일으키고 자치 기구를 조직하여 사회·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민족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독립항쟁 극대화를 위한 이원체제 운영

민정과 군정 


  이들은 독립항쟁의 극대화를 위하여 민정기관과 군정기관의 이원 체제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먼저 자치 기관으로 우리 민족의 고토인 만주의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이상룡을 사장으로 한 경학사를 1911년 조직하였다. 경학사는 특히 인재 양성을 중시하여 신흥강습소를 세우는 등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고 이철영, 이동녕이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중국인의 박해와 풍토병 그리고 흉년이 들어 해산되었고 1911년 공리회가 조직되었다. 다시 1913년 허혁을 단장으로 한 부민단이 통화현 합니하에 조직되었고 1919년 이탁을 중앙총장으로 한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어 유하현 삼원포에 터를 잡았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혁신유림 친인척 2,500여 명이 만주로 집단 망명함에 따라 자치 기관의 관리와 운영은 안동 혁신유림들이 주도하였다. 군정 기관으로는 1912년 통화현 합니하에 정착지를 확보하여 이주하면서 부민단을 조직하고 학교를 새로 설립하였으며, 1913년 이름을 신흥중학교(교장 여준)로 바꾸었다.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을 다른 중학교로 넘기고 군사반만 전력함으로서 비로소 신흥무관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체계적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영기지 건설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1914년 신흥학우단과 부민단은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백두산 서편인 통화현 팔리초구 소북차에 백서농장(장주 김동삼)을 만들어 수천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군영을 세웠다. 신흥중학교 졸업생들과 각 분교, 노동강습소 등의 훈련생 385명이 입영하여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후에도 신흥학교 출신 청년들이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비밀 군영기지인 마록구 농장, 길남장이 설치되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신흥중학교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급증하여 수용에 어려움을 겪자 유하현 고산자로 옮기고 신흥무관학교(교장 이세영)로 이름을 바꾸었다. 합니하에 있던 기존 학교는 분교로 삼았으며 통화현 칠도구 쾌대무자에 또 하나의 분교를 두어 모두 3개의 학교를 운영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운영과 정신

교육목표와 교훈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고급간부 양성을 위하여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었고 분교에서는 3, 6개월 과정의 초등군사반을 두었다. 학교 운영은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신민회 회원들(이세영, 윤기섭, 여준, 김규식,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신팔균 등)과 1919년 만주로 망명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군인들(지청천, 김경천 등)이 중심이 되어 맡았다. 

신흥무관학교는 1913년 신흥 중학교 설립 이후 약 7년간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가 봉오동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결국 1920년 폐교되었다. 


● 신흥무관학교 교훈 ● 


 1. 나는 조국을 광복코자 이 몸을 바쳤노라

 1. 나는 겨례를 살리고자 이 생명을 버렸노라

 1. 나는 후사를 겨레에게 맡기노라

 1.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수호하라


● 신흥무관학교 교육목표 ● 


1. 불의에 반항정신

1. 임무에 희생정신

1. 체력에 필승정신

1. 고난의 인고(忍苦)정신

1. 사물에 염결(廉潔)정신

1. 건설에 창의 정신


청산리전투와 민족독립항쟁에 미친 영향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북로군정서 연성사관학교가 1920년 2월에 창립되자 이장녕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 150명이 파견되어 연성사관생도 300여 명을 속성으로 배출시키고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참여하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각종 독립군 단체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이후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의열단, 조선의용대 및 한국광복군 등에서 주축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신흥무관학교 출신(관련) 독립항쟁가

구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자 명단 비고

한국광복군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권 준, 김학규, 송호성, 윤기섭, 오광선 등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김원봉, 강세구, 권준, 김옥, 박태열, 배중세, 서상락, 신철휴, 윤보한, 이성우, 이종암, 이해영, 최윤동, 한봉근, 윤세주 등

무오

독립선언 이상용, 김동삼, 여준, 이동녕,, 이세영, 이시영, 이 탁, 허 혁 등 신흥무관학교 관련자


1919년 무장 독립항쟁단체인 서로군정서가 만주에서 조직되었다. 원래 정부 형태인 한족회의 산하 군사조직인 군정부가 있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의에 따라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개편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립군 양성, 일제 통치 기관 파괴,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 처단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서로군정서는 신흥학교 출신 젊은이들을 체계적인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일송 김동삼이 이끈 백서농장 독립군,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조직된 정규군대인 의용대와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생도)로 편성하였다.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은 1920년 초에 연성사관학교를 설립한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이 사관생을 양성할 교관을 파견해줄 것을 서한으로 요청하자 이장녕 외 150명의 교관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안도현 내두산 지역에 지청천 장군으로 하여금 1개 대대(교성대) 병력으로 주둔하게 하였다. 이어 참모장 일송 김동삼이 직접 북로군정서(왕청현 서대파)를 방문하여 1개월간 유숙하면서 일본군 침공에 대비하여 작전계획을 도모하고 안도현 내두산촌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서로군정서 교성대(지청천)는 홍범도 부대와 함께 청산리 전투(10월 25일~26일)에 참가하였다.


이외에도 북간도 지역에는 독립항쟁단체인 간민회(1911년)와 중광단(1911년)이 조직되었고 용정촌, 명동촌에는 서전서숙(1906년), 명동학교(1908년) 등의 민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1919년까지 간도 일대에 세워진 학교는 100개가 넘었다. 

연해주 지역에도 독립군 기지 건설이 활발히 이루어져 독립항쟁단체인 권업회(1911년)와 권업회가 수립한 대한광복군 정부(1914년), 러시아 한인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인 대한국민의회(1919년)가 수립되었다. 또한 신한인촌의 한인 학교 등 10여 개의 민족학교가 생겼다. 청산리전투 이후 흩어진 만주지역 독립단체는 대한통군부, 통의부를 거쳐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모두 3부로 재편 통합되었다. 


■ 독립군이 거둔 빛나는 승리 |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1920년대 들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들도 가세하여 독립군 부대의 기세는 극에 달하였다. 박장호, 조맹선 등이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고, 이상룡, 여준, 이세영, 김동삼, 김창환,  이탁, 지청천 등이 주축이 되어 신흥무관(정규사관)학교와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비폭력 항일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밀정을 처단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특히 독립군 부대는 주로 국경을 넘어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는 작전을 펼쳐 큰 성과를 얻었고 독립군의 활발한 국내 진공 활동에 시달린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에 안간힘을 썼지만 매번 패배의 쓴맛을 봤다. 이러한 무장 항쟁 가운데 가장 대표할만한 두 번의 전투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독립전쟁에서 거둔 첫 번째 큰 승리 | 봉오동전투


대한독립군을 결성한 홍범도는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고, 이후 독립군 무장 항쟁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홍범도는 효과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기 위하여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힘을 합쳐 독립군 연합 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순찰소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독립군은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파하고 화룡현 삼둔자로 돌아왔다. 독립군이 기습 공격한 사실을 안 일본군 39사단장은 곧바로 1개 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이를 미리 감지한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끌고 미리 삼둔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사살 120명, 중상 200명의 전과를 올리고 소총 160자루, 기관총 3문을 빼앗았으니 이는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과 본격적으로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투이자 독립전쟁에서 거둔 첫 번째 큰 승리였다.


삼둔자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보복을 하기 위해 한반도와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들을 총동원한 대규모 추격대를 편성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하고 나섰다. 봉오동은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으로 둘러쳐진 계곡 지대였다. 홍범도는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여 일부 부대는 봉오동 밀림 속에 미리 매복시켜 놓고 나머지 부대를 직접 이끌고 일본군을 깊숙한 계곡으로 유인하였다. 


일본군이 포위망에 걸려들자 독립군 연합 부대는 즉시 공격을 퍼부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은단 4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비해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니 이는 대단한 압승이었다. 이것이 봉오동전투다. 


봉오동전투는 뛰어난 예지력으로 작전을 지휘·통솔한 홍범도 장군과 지리적 요건을 활용한 허를 찌르는 작전, 열세인 병력에도 사기를 잃지 않은 병사들이 함께 이루어낸 합작품이었다. 봉오동전투는 만주 지역을 무대로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크게 물리친 빛나는 전과로서 이후 벌어진 항일 투쟁에 불씨를 지폈다. 


항일 독립전쟁사의 빛나는 전과 | 청산리대첩


  북만주 일대에는 서일, 김좌진, 이장녕 등이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항쟁을 벌였다.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다시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1920년 10월 간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한자리에 모였는데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가 먼저 만나고 이어 홍범도 부대가 합류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약 1,600명이었고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 광복단, 의민단, 신민단 등이 연합한 홍범도 부대는 약 1,400명 규모의 병력을 이루었다. 일본군과 싸울 것이냐 피할 것이냐를 두고 설전이 오간 끝에 일단 피하기로 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좌진과 이범석은 각각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울창한 계곡 사이로 숨은 뒤 추격해온 일본군 부대에 사격을 가하여 전멸시켰다. 이 때 일본군 전사자는 200명을 넘었다. 그 무렵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홍범도 부대도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해한 또 다른 일본군 부대와 협공하여 400여 명의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김좌진 부대는 다시 어랑촌 부근에서 머물고 있던 일본군 부대들을 이동하며 공격하였고 여기에 홍범도 부대가 합류하여 강화된 전력으로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계속해서 독립군은 일본군과 쫓고 쫓기는 접전을 벌였고 일본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사실상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10여 회에 걸쳐 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고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는 항일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전과를 올린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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