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3월의 전설 [2020/10] 3월의 전설(66회) - 경기도 양평의 만세시위

페이지 정보

본문

위정척사의 본향, 노인들 활약 특히 두드러져 

인원이나 시위 양상 대규모로 치열하게 전개


글 | 이정은(3. 1운동기념사업회장) 


두물머리가 있는 양평은 한말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원류인 이항로(李恒老)의 본 고장이다,  양평군은 여타 시, 군과 비교해 볼 때 시위규모나 양상이 방대하면서도 치열하고 극렬하였다. 특히 만세운동기간도 3월초부터 4월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왜경의 총에 쓰러지고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치뤘다. 일제는 양평군 관내의 많은 동네에 불까지 질러 초토화 시키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즉 순우리말 두물머리가 있는 양평은 한말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원류인 이항로(李恒老)의 고장이다. 그는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서 위정척사 사상ᆼ을 완선했다. 이항로의 사상은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문인(門人)으로 이어져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의병항쟁의 대동맥이 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운동의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평민 의병장 김백선(金百先), 13도의병연합부대와  임진강의병 연합부대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이 고장 출신이다.


3월 10~16일 서종면, 갈산면, 설악면 움직임


 

“약 200명의 한 무리가 시위운동을 기도해서 헌병주재소에서 설유하여 해산시켰다.”

 경기도 양평의 만세시위에 관한 최초의 일제 보고였다. 이 최초의 시위는 3월 10일 양평군 서종면에서 일어났다. 위정척사 사상의 원류 이항로의 고장이었다. 그러나 더 자세한 상황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흘 뒤인 3월 13일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3월 16일 양평군 설악면 신천리에서도 시위 조짐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을 알리는 꿈틀거림이었다. 


3월 23일 청운면  


 양평군 청운면 천도교도인 신재원(申在元, 60세), 정경시(鄭慶時, 65세)는 6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서울과 기타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듣고, 청운면에서도 잠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장날이었다. 이날 오후 3시 40분경 두 노인은 만세시위를 벌일 작정을 하고 용두리 시장으로 행했다. 가는 길에 김종학, 민주혁을 만났다. 독립만세를 권유했다. 그들이 흔쾌히 동의하여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여물리 다리 아래에서 신재원이 사가지고 온 흰 천을 펼쳤다. 김종학의 붓글씨로 ‘조선독립기(旗)’라고 썼다. 깃발 3개를 만들었다. 민주혁과 김종학이 각기 1개를 들고 나머지 1개는 시장 부근에서 배포하기 위해 접어서 민주혁이 가지고 시장으로 갔다. 시장에 도착해서 김종학과 민주혁이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장에 나온 군중 150여명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헌병이 해산시키고 13명을 검거했다.


3월 24일 갈산면 양평시장 


 3월 23일 경성 연희전문학교 서기이자 기독교도인 이신규(李藎珪, 20세)는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는데 고향 양평은 잠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 명의의 격문 수십 매를 갖고 경성을 떠나 양평으로 향했다. 그는 3월 24일 갈산면 양근리에 도착했다. 그날 양근과 양평 두 마을 사이에 있는 시장의 장날이었다. 그는 시장에 모여든 약 1천여 명 군중 앞에 섰다. 


 “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연설이 불을 뿜었다.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1천 명의 만세소리가 산천을 흔들었다. 뿌려진 격문 중에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사는 것보다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 칼 밑에서 죽은 것만 못하다. 맹렬히 분기하여 독립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양평군 단월면 부안리의 천도교인 곽영준(郭英俊) 등 군중들은 깃발을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또한 한창호(韓昌鎬), 김경성(金慶星), 서상석(徐象錫), 김석봉(金石鳳), 한봉철(韓奉喆) 등도 양근리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활보했다. 


 오후 2시 40분경 헌병들이 이신규와 곽영준 등을 체포하여 양평헌병분견소에 구금했다. 이에 군중들은 헌병분견소 앞으로 몰려가서 체포자 석방을 요구했다. 오후 5시경 헌병이 이들을 해산시켰다. 


 한편 다른 수백 명의 군중은 양평군청, 갈산면사무소, 양평우편소 등으로 이동하여 수십 명씩 사무실이나 실내에 들어가 유리창 등 시설과 장부 등을 파손시켰다. 갈산면 면사무소에서는 면장 김찬제(金讚濟)와 면서기 서병일(徐丙一)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하였으나 끝내 부르지 않아 때리고 찌르기도 했다. 군수와 면장이 숨어 있을 것라는 말에 박영준(朴熙英)의 집을 침입하기도 했다. 군중들이 다시 다시 양평헌병분견소로 몰려가자 헌병이 강제로 진압했다. 


 경기도장관 마츠나가 다케키라(松永武吉)은 “양평군 갈산면장 김찬제는 3월 24일 소요가 일어났을 때 폭민에게 난타당해 일시 인사불성이 되었다가 즉시 의원으로 옮겨져 조치를 받아 양호해졌다.”고 보고했다. 


  3월 29일 강상면  


 3월 29일 양평군 강상면 교평리 나루에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강 건너 갈산면 양근리 시장으로 가려던 사람들이었다. 5일전 3월 24일 양근리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있자 경찰은 이날의 양근장을 폐쇄하여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강상면 송학리 신석영(辛錫永)이 깃발을 흔들며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군중들이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0일 양서면 


 3월 30일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약 13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30일 용문면 


 3월 30일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약 100명의 군중이 시위를 시작했다. 주모자 2명이 체포되면서 일시적으로 해산되었으나 2시간 후 다시 2,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주재소에 몰려들었다. 용문면 마룡리에서 농업과 잡화상을 겸하던 조영호(趙瑛鎬)는 큰 소리로 “독립은 천운이다.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모두 본적지로 귀국하라!”, “한 개의 계란이 쌍란이면 두 마리의 병아리를 부화할 수 있으나 두 나라를 한 나라로 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연설했다. 시위대가 구금자 석방을 거세게 요구하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헌병이 구금자를 석방하여 해산을 유도했다. 지원병이 도착하자 시위 참가자를 색출하여 검거했다.


3월 31~4월 3일 강하면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의 최대현(崔大鉉, 이명 大奎)도 68세 노인이었다. 그는 구한국시대의 오위장(五衛將)이었다. 그는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되자 부하 700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근대식 무기와 정규 군인의 훈련을 받은 그의 의병부대는  경기도내 각처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일본의 병합에 불평을 품고 항상 항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이태왕(고종)이 서거하자 그는 2월 13일 동리 강모에게 부탁하여 “성은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 능앞에서 제사를 지내고자 하니 상당히 기부를 하라”는 글을 써서 면사무소에서 이것을 양자 아들 최윤식(崔允植)을 시켜 10여 매 등사하여, 양평군 11개 면의 면장에게 발송하여 기부금을 모집하려 하였다. 


   3월 31일 오후 11시 최대현은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약 3백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인 4월 1일에는 양서면 도곡리의 면사무소,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2천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튿날에도 같은 장소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4월 3일 최대현은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과 고읍면 중심가로 갔다. 고읍면에는 양평군내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고읍면 네 고을 주민 4천명이 모여들었다. 최대현은 태극기를 들고 군중속으로 뛰어 들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양근 읍내로 가자!” 

 군중 속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최대현은 “읍내로 가야 한다!”고 하며 군중을 이끌고 양근 읍내로 향했다. 시위대열이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했을 때 헌병대가 출동하여 최대현은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위정척사의 본고장 양평에서 노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