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0/11] 만주 무장독립기지촌 건립의 선구자 - 백하(白下) 김대락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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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 시대의식으로 일제와 맞섰던
혁신유림의 선구자
글 | 편집부
백하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은 1845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금부도사인 우파 김진린(1825~1895)과 어머니 예천 맛질의 함양박씨 득영의 딸 사이에 4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효락(1849~1904), 소락(1851~1929), 정락(1857~1881)이고 누이로는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 된 우락(1854~1933), 진주 강씨 면에게 출가한 순락(1860~1937), 이중업과 결혼한 락(1862~1929)이다. 백하 김대락의 수학과정에 대하여는 서산 김흥락의 문인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유년 시절에는 조부 김헌수(1803~1869, 자 盛章, 호 百忍齋)에게서 공부하고, 성장기에는 숙부 김진기(1830~1917, 자 岡瑞, 호 愚下齋) 공에게서 받은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진기공은 도사공 김진린의 동생으로 개항기 위정척사 운동을 펼쳤던 안동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백하의 수학과정과 학문활동에 영향을 준 조부와 숙부 그리고 스승 서산 김흥락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분들은 국권회복 운동기에 최초로 의병항쟁과 척사운동을 펼쳤던 주도적인 인물들이었다. 근대 계몽운동 긍정 평가 후 신교육 확산에 전념 1907년 안동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도 백하 김대락은 신교육을 반대한 대표적인 유가적 인물이었다. 1909년 3월 매부이자 각별한 사이였던 석주 이상룡이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게 되고 지회장을 맡게 된 후 대한협회보를 배부하고 홍보를 하게 되니 이때부터 그는 신학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협회보를 읽고 그가 남긴 「독대한협회서유감」에 거울과 칼과 구슬에 비유하여 비로소 깨달았다는 감탄의 내용이 담겨있다. 그런데 그 거울과 칼과 구슬이 개화파들의 논리처럼 밖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때가 끼어 묻혀 있었을 뿐, 본래 우리 모습이라는 것이다. 백하는 이때부터 대한협회의 계몽운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3월 19일이자 황성신문에는 김대락이 50여 칸의 집을 내놓고 자신은 작은집으로 옮겨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김대락은 ‘내가 신교육에 대하여 그 시무에 필요됨을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이 큰 한이라, 이제 비로소 깨달았으니 어찌 헌신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리오’라고 하면서 신교육 확산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변화는 새신대의 흐름에 적합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자기성찰의 산물이라 판단되며 그의 신학문 수용과 실천은 당시 안동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켰다. 서간도 망명 선택, 만주 독립운동기지의 기폭제 역할 그는 “대부(大夫)가 아닌 선비로서 죽음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선비의 길을 실천하는 자정(自靖) 은둔(隱遁)의 성격이 강한 망명을 선택하였다. 망명지는 서간도로 단군이 나라를 세운 곳이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창업지인 백두산 아래였기 때문이다. 이곳이 신민회의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0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고향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동생인 효락의 아들 만식⋅제식 형제, 소락의 아들 조식⋅홍식⋅정식 3형제, 정락의 아들 규식이 망명길을 도왔고, 화식⋅문식⋅영식등 종질들과 창로⋅정로 등 손자, 문로⋅성로 등 증손자 긍식⋅성로 등 문중의 청장년 30여 명이 함께 했다. 이때 만삭의 임산부였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 대응이었다. 즉 식민지하에서는 살기도 싫었고 죽어서 묻히기도 싫었던 것이다. 고향 내앞을 떠나 서울에서 10일간 머물다가 1911년 1월 6일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을 떠나 의주 백마역에 내려 도보로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재 단동)을 거쳐 마차로 540리 지점인 회인현(현재 환인현) 항도촌(지금의 횡도천)에 도착한 것이 1월 15일이고, 그 후 중국 관부에 삼원포 정착을 교섭하고 집과 농장을 구하여 삼원포 이도구에 입주한 것이 4월 19일이었다. 1911년 1월 8일 얼음 덮힌 압록강을 건너면서 칠십 노인이 떠나기 싫은 고국산천을 압록강이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압록강 며느리 불러 손자 데리고 대양에 당도하니 누른 모래 비낀 바람에 흰구름에 아득하다 푸른 이내 속 멀리 동서쪽 포구는 닿아 있고 푸른 물이 중국과 조선을 나누어 흐르네 평탄한 얼음실이 용의 등처럼 열렸는데 태평한 마차 길엔 말바굽이 어기차다. 고향고국 떠나는 걸음 더디던 날에 일흔 살 나그네 회포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네 만주 안동(단동)에서 항도촌으로 가는 540리 길은 극심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차를 빌려 떠나기는 하였으나, 생전 처음 접하는 북방의 추위는 뼛속까지 시렸고 마차의 흔들림 또한 견디기 어려웠으나, 그보다 더한 것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었다. 이도구에 정착하기 전에 머물렀던 항도촌에서 증손자와 외증손자를 보았을 때도 고향(식민지)에서 출산하지 않아 오히려 통괘해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태어난 증손자 이름을 대당에서 태어나 기대하던 바에 부응하였다는 의미로 ‘쾌당’이라 짓고, 외증손자는 이곳이 고주몽이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하늘을 조회하던 날 항상 기린마 탔다는 전설로 ‘기몽’이라 이름 하였다. 삼원포 이도구에서는 1912년 2월까지 거주하였고, 그 후 통하현 합니하로 옮겨 살았으며 1년 후인 1913년 2월부터는 다시 유하현 삼원포 남산촌에 이주하여 살았다. 당시 경술국치를 맞아 시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와 함께 한 내앞 마을 사람들은 150여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의 길고 긴 서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가을에 갚기로 하고 중국인 부잣집에서 조입쌀을 꿔서 먹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삭줍기에 따라 나섰다 이렇게 집안 여자들이 이삭을 주워오니 양식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소작인의 생활 이야기는 허은(석주 이상룡의 손자 며느리, 백하의 종생손부, 왕산 허위의 증손녀, 허발의 딸)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도 “우리도 중국 지주의 땅을 얻어 소작을 시작했다. 일흔이 넘으신 할아버지만 빼고 온 식구가 다 나가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아버지도 소를 몰아 땅을 갈았다. 서툴러서 소가 제멋대로 이리가고 저리가고 하니까 나더러 소 앞에서 고삐를 잡고 끌라고 했다.” 위와 같이 만주생활은 고향 안동과 다른 생활환경인데 다가 1912년부터는 마적떼의 창궐과 풍토병의 만연되어 기후와 생활과 건강이 최악의 상태였다. 새로운 터전인 삼원포에 정착한 후 이제는 안정된 한인사회의 건설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튼실한 한인사회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인력을 양성하고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 독립군 양성소 신흥강습소 열어 경학사의 설립일자는 1911년 6월 22일이고,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는 1911년 5월 25일이다. 그 후 합니하의 신흥학교는 1912년 6월 7일에 준공식을 하였고, 개교는1913년 5월에 하였으며, 교육내용에 군사훈련을 겸하고 있어서 이것이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그러나 1911년 뜻하지 않은 서리가 내림으로써 그 동안 가꾸어 놓았던 농작물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1912년에도 대흉년을 만나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많은 사람이 풍토병으로 고생하였다. 이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경학사는 운영난에 부닥쳐 사실상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1913년 2월 다시 삼원포 남산으로 돌아온 백하는 경학사가 무너지고 온갖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동포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왕삼덕, 김동삼등과 새로운 자치조직인 공리회를 결성하고 6월 17일에 취지서를 작성했다. 「공리취지서」에서 밝힌 결성 이유를 요약하면, 1910년 나라가 변고를 당하여 요녕성으로 망명 온 것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형세를 돌아보니 숲에 던져진 토끼와 골짜기로 나아간 물고기처럼 후원자도 없다. 또 떠돌아다닌 나머지 가정에는 기강이 없고 사회에서 모욕을 당해도 막을 방책이 없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끝내는 요녕성의 거지가 될 전망이다. 이에 동포사회의 자치기구로 공리의 모임을 결성하여 공동생활을 공고히 유지하는 계획을 삼았노라는 것이었다. 공리회의 조직으로 십가장, 백가장, 천가장을 두고 그들 중심의 자치를 도모하였다. 도에 반대되고 덕에 어긋나 스스로 공리의 정치에 벗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십가안에서는 십장이 백가안에서는 백장이 이들을 탄핵하는 자치제도가 그 핵심이었다. 권유문, 분통가, 백하일기 등 만주 독립운동사적 가치 높아 백하공은 합니하에 머물던 1912년 9월 27일부터 분통가를 지었다. 이 시기는 합니하에서 새롭게 문을 연 신흥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어 갔던 시기이다. 내용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분통함을 노래하고 광복의 꿈을 읊었다. 내용을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보면, 첫째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분통하다고 읊었고, 둘째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가야할 길은 망명밖에 없다고 하였다. 망명처로는 단군의 개국처였던 서간도라 하였으며 그 곳으로 결정한 경위를 밝혔다. 셋째 떠나면서 일가친척에게 이별을 고하는 과정과 국경선을 넘기까지의 여정을 노래하였다. 여기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고토를 떠나는 서러운 심정이 간결한 행문 속에 간절히 표현되었다.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널 때는 임진왜란 때 왜군 때문에 고생하며 그들을 물리친 선조(임진왜란때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 11대 방조)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상황을 분통히 여김을 표현하였다. 넷째 일본을 쳐서 설분하고 싶은 심정을 읊었다. 다섯째 그러한 소원 즉, 대한독립이 이루어질 때를 상상하여 일제의 패망과 그 기쁜 과정을 노래하였다. 작자와 연대가 확실한 항일 저항가사로는 우리 문학사의 백미이다. 이와 같이 「분통가」는 식민통치의 불복종과 망명, 민족의식과 자긍심, 독립전쟁과 광복, 헌법정치, 공화정치 이념을 표방한 가사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문학적 규명을 떠나서 독립운동사를 기준해서 말하면, 1910년 나라가 망하면서 무력하게 침몰해가던 민족에게 보여준 외침이었다. 아울러 「분통가」는 앞의 권유문과 함께 1910년대 초기 어느 민족 지도자의 독립운동 논리와 비교해도 선진적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대락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1911년 1월 6일 서울을 떠날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1913년 12월 31일까지 만3년의 일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그 일기에 1911년 서정록, 1912년 임자록, 1913년 계축록이라하고 1912년 임자록을 쓰면서 자신의 일기를 보망록이라고 하나 학계에서는 이들을 ‘백하일기’라 부른다. ‘백하일기’는 만주망명 한인들의 정착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망명초기의 생활과 활동을 매일 매일 기록한 것은이 것뿐이다. 이는 만주한인 생활사와 독립운동사에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하일기’는 공적 가치와 더불어 사적 가치도 크다. 서간도 망명사회의 최고령자 백하공의 현실인식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기 가운데 「권유문」과 「분통가」 그리고 「공리회 취지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하가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전개했던 민족운동의 공통된 특징은 근대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도 논리의 기초는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며, 변화하는 역사의 새로운 기운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그 축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1914년 12월 10일 70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그토록 그리던 고향 내앞마을과 전통과 근대가 조화를 이룬 한인사회의 실현을 뒤로한 채, 이국땅 삼원포 남산에 영면하였다. 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