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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0/05] 순국스크랩 -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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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광복단과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독립전쟁 위해 선택한 무력항쟁

통쾌한 기쁨 안겼으나, 비극적 결말

         

글  |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상해의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1920년 북간도(지금의 연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은 1920년 1월 4일, 여섯 명의 철혈광복단 소속 열혈 애국청년들이 일본의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의 용정 지점으로 운송 중이던 일화(日貨) 15만원(圓, 현재 원화가치 약 250억원)을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탈취한 자금을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총과 탄약) 구입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이 사건은 일제 식민당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통쾌한 기쁨을 안겨준 쾌거였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불과 27일 만에 세 명의 주동인물이 일제 당국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탈취했던 자금 대부분을 빼앗기고, 세 명의 사건 주역들이 일제의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고 말아, 그야말로 비극적인 결말로 끝남으로써 후일 두고두고 국내외 동포들의 가슴에 통한의 기억으로 남게 된 사건이었다.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주도한 철혈광복단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을 주도한 단체는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이며, 사건의 주역들은 모두가 철혈광복단 단원들이었다. 철혈광복단은 같은 노선과 목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별개의 조직으로 활동하였던 광복단과 철혈단이 1918년 말에 철혈광복단으로 통합되었고 이후 약칭 ‘철광단’으로 불리던 비밀결사였다. 

광복단, 철혈단, 그리고 철혈광복단은 북간도와 노령지역의 항일운동세력의 중추적인 위상을 차지했던 조직이었다. 이들 조직에는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등 비공개적 조직이나 권업회(노령), 간민교육회․간민회(북간도),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한국민의회(노령), 대한국민회(북간도 지역)을 비롯한 허다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의 핵심간부들과 조직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체는 비밀결사적 성격 때문에 내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역사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광복단은 한국병합 직후인 1911년 초 북간도 지역에서 13명의 항일운동가들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발기인은 전일, 이흥삼, 김형수, 구자익, 이낙준 등이었고, 조직을 이끌었던 중심인물은 이동휘, 오주혁, 이종호, 장기영, 백규삼, 황병길, 김동한, 계봉우, 김하석, 김하구, 오영선, 구춘선, 김립, 이명순, 오병묵 등이었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제2의 러일전쟁을 전망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나자구(羅子溝) 무관학교를 설립․운영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실패로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대한광복군정부는 1915년 중국과 일본간의 21개조 문제가 대두되자 중국과의 연합에 의한 대일 독립전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독립전쟁을 수행한 사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한 나자구 무관학교는 노령과 중령의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청년’들의 최다수를 배출하였으나, 1년여 만에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당국에 의하여 폐쇄되었다.

철혈단은 연해주 한인의 합법적 자치단체였던 권업회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해산되자 혁명적 비밀결사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다. 철혈단은 “민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유지(有志)한 청년들을 결속하여 장래의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던” 비밀혁명단체였다. 철혈단의 중요인물은 김철훈, 김진, 최의수, 최이준, 한강일, 정순철 등이었다. 철혈단은 “수청을 근거로 하고 중앙은 해삼위에 두어 사업하였”으며, 1915년부터는 “수청 동호동에 지방총회를 두고 기타 각 지방에 지회를 조직하여 사업하였다.” 노령 각지에 산재한 철혈단의 단원 수는 275인에 달하였다.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광복단과 철혈단은 철혈광복단으로 통합하였다. 원래 두 단체는 조직될 때부터 목적과 정강이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통합되었다. ‘철광단’은 폭력, 즉 무장투쟁의 방법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졌던 청년단체로서, 간도지역과 노령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었다. 최계립에 의하면, 15만원사건 당시 철혈광복단은 300명 이상의 여성 단원들을 포함하여 단원수가 1,353명에 달했다고 한다.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철광단은 그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고 있었다.

철광단은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25일 러시아, 서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을 소집한 ‘노중령독립운동단체대표회의’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등 3․1운동을 계획하였고 전민족적 중앙기관으로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철혈광복단은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정부적 지위’와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의 위상을 두고 각축․경쟁했던 대한국민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조직이었다.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또한 용정에서의 3.13 독립선언시위 당시 시위대를 이끌고 그 선봉에 섰다. 3․13 시위 당시 중국 경찰의 사격으로 희생된 시위대원들의 시체를 제창병원으로 운반한 것도 철혈광복단원들이었다.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의 전개과정 

간도 15만원사건은 3․1운동 당시 일제가 잔인한 폭력적 탄압과 학살로 평화적인 시위운동을 진압하자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항쟁의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따라 무기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계획된 거사였다. 간도 15만원탈취작전에 직접적으로 참가한 애국지사들은 윤준희(尹俊熙), 임국정(林國禎), 한상호(韓相浩), 최봉설(崔鳳卨), 박웅세(朴雄世), 김준 등 여섯 명이다. 

이들은 간도 용정촌 남방 2리 동량어구(東梁於口)에서 1920년 1월 4일 5시경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촌 출장소로 운송중에 있었던 일화(日貨) 15만원을 탈취하였다. 당시 이 은행자금은 일본인 순사 3인, 한인순사 1인, 회령지점 한인서기 김용억(金容億), 그리고 회령의 한인상인 진길풍(陳吉豊)의 6인이 운송하고 있었다. 탈취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장우가상차(長友嘉相次)가 현장에서 관통상으로 즉사하고, 동행했던 진길풍이 관통상을 입고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사건 직후 일본관헌의 집중적인 수사로 조선은행 용정촌 출장소 서기(부기원) 전홍섭(全洪燮)이 체포되어 사건 주동자들의 대략적인 신상이 드러났다. 

일제당국은 사건의 주동자들을 색출․검거하기 위하여 중국 경찰의 협조를 받으며 4, 50명씩 작당하여 간도와 함북 일대 각지를 수색하여 한인사회를 불안케 했고 한인 농민 다수를 체포하여 온갖 악형을 가하였다. 일제 영사관 순사들은 최봉설과 임국정이 사건 후에 들렀던 와룡동의 최봉설 집을 수색하고 그의 부친 최문약과 오촌숙 최병국을 체포하였고 일행이 머물렀던 의란구 유채구(依蘭溝 有菜溝)의 김포수 집도 수색하였다. 

탈취 작전에 참가한 애국청년 가운데 당초 약속대로 박웅세와 김 준은 집으로 즉시 귀환했고, 윤준희, 최봉설, 한상호 등 4인은 사건 다음 날인 1월 5일 의란구 유채구의 김포수 집에서 김하석(金河錫)을 만났다. 김하석은 국민의회의 군무부장 대리로서, 임국정, 채계복(蔡啓福)과 함께 이미 12월 23일 간도의 와룡동에 와 있었다. 이 회합에서 탈취한 자금은 국민의회 군무부에 헌납하여 사용하기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운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사건 주동자의 리더격인 윤준희가 군무장 김하석의 재무취급자로 임명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김하석 5인은 중러국경을 넘은 후 며칠을 기다리다가 1월 22일 포시예트를 떠나 다음날인 1월 23일 블라디스토크에 도착한 후 신한촌에 숙소를 정했다.

이들 일행은 숙소를 나누어 임국정과 최봉설은 채계복(채성하) 집에, 윤준희와 한상호는 조윤관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1월 28일 임국정과 김하석이 조선은행권을 휴대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잠입하여 군총 2천 정의 신속한 구입을 의뢰하였다는 정보가 블라디보스l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등 5인이 신한촌을 포위 습격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최봉설만이 헌병대들과 격전을 하며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들이 갖고 있던 일화 13만원과 권총, 탄약포 등이 압수되고 말았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3인은 전홍섭, 나일과 함께 요코하마(橫濱), 부산, 경성, 원산을 거쳐 청진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결국 일제는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의 제1심 재판에서 윤준희, 임국정 사형, 한상호, 최봉설, 박웅세, 김준 무기(징역), 전홍섭 15년형을 선고하였다. 1921년 2월 12일에 내려진 경성복심법원의 제2심 재판장은 제1심 판결을 뒤엎고 전홍섭에게 15년 형을, 나머지에게는 모두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들의 상고는 기각되었으며, 1921년 8월 25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윤, 임, 한 3의사는 끝내 사형되고 말았다.

간도 15만원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노령과 북간도 지역은 급격한 정치적 전환기에 처해 있었다. 즉, 볼쉐비키 세력이 이끄는 러시아혁명세력이 반혁명적 백위파 세력을 구축하면서 급속하게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지역은 아직도 백위파와 이를 지원하고 있던 일본간섭군이 점령하에 있었다. 

사건의 주역들이 1920년 1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피신하여 무기 구입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인 1월 31일 즉,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바로 그날, 이들은 숙소를 습격한 일본헌병대에 의하여 새벽 3시에 전격적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사건의 주역들이 체포된 바로 그날 러시아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하였다. 다음날인 2월 1일 장도정, 김 진, 이재익 등 한인대표들은 러시아혁명군사령부를 방문하고 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는 한편, 일본영사관에 감금되어 있는 애국청년들의 석방과 압수된 금전의 반환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한 발 늦은 조처였다.

사건 자체만큼이나 이처럼 주모자들이 러시아혁명세력의 블라디보스토크 장악 직전에 체포됨으로써 그 안타까움이 후일 애국지사들과 동포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은 회한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유족들의 회한과 살아남은 자들의 행방

임국정의 모친(임뵈뵈)과 윤준희의 부인(최씨)은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원을 내어 승낙을 받은 후, 세 열사의 시체를 찾아 홍제리 밖에 서울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군중적 장례식’을 거행하고 묘비 앞에 큰 비석을 세웠다. 광복 후인 1966년 11월 24일 전택보(위원장), 문재린(부위원장) 등 여러 사람의 주도로 이들 세 의사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이장하였다. 

일제의 감옥에 수감 중이던 전홍섭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폐병이 발병한 탓에 석방되어 고향(경흥 고읍)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전홍섭은 야밤에 모친, 부인, 딸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노령으로 가 민족운동에 종사했다고 한다. 

한편, 탈출에 성공한 최봉설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사건 후 처음 신한촌에 왔을 때 머물렀던 채계복의 집으로 도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10여 일 동안 채계복 3형제(계복, 계로, 창도)와 부모(채성하 장로)의 보호, 이혜근의 극진한 간호로 건강을 회복한 후인 2월 10일 채계복과 유익정(유익환)의 도움을 받아 농촌지방인 수청으로 도피하였다. 

채계복은 일본영사의 체포를 피해 중국 요하(饒河)현으로 도피하였으나, 부친 채성하 장로와 오빠 채창도는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1년 동안 구금되었다. 최봉설은 채성하와 채계복 등 그 형제들의 은혜를 평생토록 기억하기 위하여 채씨 형제들의 돌림자인 ‘계’자를 자신의 이름에 넣어 ‘최계립(崔溪立)’으로 바꾸었다. 급진적 항일단체인 적기단(赤旗團) 등 혁명운동에 매진하던 최계립은 1937년 강제이주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거주하면서 1959년 1월 사건 40주년을 기념하여 쓴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등 사건에 대한 회상의 글들을 남겼다.

박웅세는 결혼식을 올리느라 자금 운송과 연해주행에 참가하지 않아 체포를 면했다. ‘박 건’으로 이름을 바꾼 박웅세는 사건 후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 당시 고려공산당고려부(코르뷰로)의 요원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해방 이후 1947년 5월초에 서울로 귀국하여, ‘한국군사후원회 회장’, 함경북도 도민회 중앙위원, 한국민족대표자대회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또 다른 사건의 주역인 김 준의 사후 행방에 대하여는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최계립에 의하면, 사건의 주역들과 함께 체포되었던 나 일은 무죄 석방되어 간도에서 항일운동에 종사하다가 일본당국에 체포되어 효수되어 전봇대에 달았다고 한다.

고려인 작가 김 준(사건의 주역 김 준과는 다른 인물)은 이 사건을 소재로 1955년에서 1960년까지 5년에 걸친 집필작업 끝에 1964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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