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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0/11]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납북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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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 그들  

분단된 조국에서 민족통일을 외치다


글 | 편집부


  인간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 ‘외압’의 손바닥으로 ‘진실’이라는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납북 독립운동가들 역시 그러하다.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을 외쳤던 중도계열 민족주의자들은 6·25전쟁 때 납북되었고, 사실과 다르게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남은 가족들은 감시와 핍박 속에서 살았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로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웠다. 오랜 시간이 흘러 역사는 그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았는지 증명했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사에서 제자리를 찾길 바라며 납북 독립운동가 몇 분을 지면에 소개한다. 

 


조소앙 | 임정 외교부장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만든 사상가


조소앙(1887~1958)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상가이자 외무부장으로 김구에 이어 사실상 2인자 역할을 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형을 통해 개인·민족·국가 간 평등을 이루는 삼균주의를 창시하고,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제정 당시 국가이념으로 삼은 인물로 알려졌다. 


조소앙은 1887년 경기 파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조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성균관에 입학해 경학과 신학문을 공부했다. 황실유학생으로 선정돼 도쿄 제일중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촉망받는 엘리트 관료의 길을 버리고, 1915년 형제들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되었고, 6월 파리강화회의 대표였던 김규식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으로 파견됐다. 비록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8월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 촉구 결의라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2년여에 걸쳐 유럽과 혁명러시아 등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혔는데, 이때 유럽 사민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30년 이동녕·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으며, 이때 삼균주의가 공식적으로 반영됐다. 이후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중요 정책과 이념을 제시했고, 수많은 문건을 작성했다. 여러 차례 바뀐 임시정부 헌법들과 주요 성명서·발표문·선전문·포고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문건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의 총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건국강령(1941년 발표)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제헌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조소앙을 ‘한국 헌법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해방 이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자주통일 민족국가 건설에 힘쓰다 6·25전쟁 중 납북돼 1958년 9월 10일 숨을 거뒀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조소앙은 6형제와 부인 등 일가족 14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아 한 집안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 유공자를 배출한 기록을 남겼다.



유동열 | 임정 군무총장

초대 통위부장 맡아 국군 창설에 공헌


유동열(1879~1950)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지낸 인물로, 민족혁명당을 조직해 독립단체를 통합했으며 광복 후 초대 통위부장을 맡아 국군 창설에 공헌하는 등 평생 군인으로 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유동열은 189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일본 근위사단에서 실무경험을 쌓고, 1904년 러일전쟁 때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해 러시아군과 싸우기도 했다. 서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6군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대한제국군에 복귀했다.


대한제국군 무관학교와 유년학교 교관을 지내고, 1905년 군무국 참령으로 승진해 시위대 기병대장과 참모국 제2과장을 지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지하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때 안창호 등이 주도한 신민회의 반일운동에 참여했으며, 서북학회를 통해 계몽운동도 전개했다. 1909년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처단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됐다.


이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했다. 1913년 출소 후 만주로 망명해 길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17년 노령 연해주 쌍성에서 전로한족회를 조직했고, 1919년 2월 김동삼·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선언서’ 39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국내외 임시정부 추진세력으로부터 신망이 높아 한성 임시정부에서 참모부총장, 노령 대한국민회의에서 참모총장,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군무총장에 각각 임명됐다. 한때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보였지만, 1930년 임시정부로 복귀해 국무위원·군무부장을 지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해 통일전선을 구축했고, 1938년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 통합을 추진해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국방부장)을 맡아 국군 창설에 공헌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그해 서거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김규식 | 임정 부수석

대한민국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외교활동가 


  김규식(1881~1950)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김규식은 1881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본과의 통상 문제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는 바람에 어려운 생활을 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귀국 후에는 교육 활동을 했다.


1913년에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승리한 나라들이 전쟁 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파리에서 회의를 열자, 신한청년단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비록 일본의 방해와 강대국들의 무관심으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국내로 돌아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다. 또한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 북측 대표들과 회담을 벌이기도 했지만, 끝내 분단을 막지는 못했다.


일찍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김규식은 언어 능력이 빼어났다고 한다. 영어는 물론이고 불어나 독일어, 라틴어 등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 있다가 6·25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가 1950년 세상을 떠났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안재홍 | 미군정 민정장관

9차례 옥고 치르며 민족주의 운동에 헌신


  안재홍(1891~1965)은 일제 식민지시기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고대사 연구에 몰두해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으며,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웠다. 독립운동가·정치가·사학자·언론인으로 치열하게 살며 1919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27년간 9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안재홍은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동제사에 가입해 신채호 등과 함께 활약했으며, 그 후 귀국해 중앙고보 교감을 지내며 3·1 운동 당시 시위를 지도했다. 이어 대한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붙잡혀 3년간 복역했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해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조선일보사 사장 겸 주필로 10년간 재직했다. 물산장려회 이사로 활동하며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다. 신간회 총무로 활약하다 투옥되어 8개월 후 풀려났고,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2년간 복역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조국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해 국사(國史)를 깊이 연구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몰두,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해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반목을 해소하고, 국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광복 후 비상국민회의 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1947년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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