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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0/12] 삼전도의 치욕, 병자호란과 의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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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Focus |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참으로 장하고 거룩한 이름, 의병(義兵)

스스로 일어나 조국수호에 앞장서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중들의 힘은 컸다.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는데, 그들은 참으로 용감했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9일(음력), 이 날 청(淸) 나라 태종(太宗)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 심양(瀋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朝鮮)을 침략해왔다. 우리는 이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1627년(인조 5년) 후금(後金, 뒷날의 淸)이 침략해왔을 때 – 정묘호란(丁卯胡亂) - ‘형제의 맹약(盟約)’을 맺고 철군한 후 9년만에 당한 침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광해군(光海君 : 재위 1609~1622)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취한 결과였다. 


 어디 그 뿐인가.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음력)에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되고 온 국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지 않았던가. 조정의 대신들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었지만, 나라의 장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네편 내편으로 나뉘어 당파(黨派) 싸움에 매몰되어 있었다. 무비유환(無備有患)의 극치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


병자호란은 후금이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서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자는 요구를 해왔는데, 이를 거절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정묘호란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은 후, 후금은 때로는 군량(軍糧)의 조달을 요청하기도 하고, 또 많은 세폐(歲幣)를 요구해왔다. 이 뿐이 아니었다. 1629년(인조 7년) 윤 4월에는 군대 1천여 명이 국경을 넘어 함경도에 와서 살인 ‧ 약탈을 자행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하였다.  


 한편, 1632년(인조 10년)에 후금은 만주와 몽골 일대를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의 조정을 한층 더 옥죄어왔다. 그리고, 정묘년에 맺은 ‘형제의 맹약’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우리 조정은 척화(斥和) ‧ 배금(排金)의 주장이 우세하였다. 그런데, 이 때 돌출사건이 발생하였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皇帝) 즉위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使臣)들이 배신(陪臣)의 예를 올리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귀국하는 사신을 통해 국서(國書)를 보냈는데, 조선이 사죄하지 않으면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가자 우리 조정에서는 척화‧배금의 기조가 높아져갔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청나라 태종은 왕자(王子)와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이 와서 사죄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협박하였다. 그러나, 이에 조선의 조정이 응하지 않자, 청나라가 침략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정묘년 ‘형제의 맹약’ 후 양국 간에 평화가 유지되지 못하고, 긴장관계가 계속되더니 급기야 전쟁을 불러오고 말았다. 


 1636년 12월 9일(음력),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나라 군대를  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지만, 12월 16일 선봉군(先鋒軍)이 이곳을 포위하고 말았다.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조정에서는 군신간(君臣間)에 얼굴을 맞대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한 가랑이에 두 다리 넣는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었다.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음력),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례를 갖추고,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의병항쟁(義兵抗爭)이 빛났다


 

  그러나, 민중(民衆)들의 힘은 컸다.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는데, 그들은 참으로 용감했다. 


 그 앞자리에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준룡(金俊龍)이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군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여 용인(龍仁)의 광교산을 거점으로 삼아 청나라 군대와 격돌하였다. 남한산성과 30리 밖이었다. 이 때, 김준룡은 전라도 전 지역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광주에서 허익복(許益福)‧범진후(范振厚)가, 강진(康津)에서 김수만(金壽萬)‧수권(壽權) 형제가. 함평에서 정대명(鄭大鳴)이 김준룡의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김준룡이 이끈 부대는 3,7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 김준룡은 스스로 호남관의연합(湖南官義聯合) 도총장(都摠長)이 되어 부대를 통솔하였지만, 청나라의 군대와 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전라도관찰사 이시방(李時昉)과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대가 힘을 보탰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 때, 전라도 구례에서도 왕의성(王義成)이 중심이 되어 창의하였는데, 이정익(李廷翼)이 노비 100여 명을 이끌고 왕의성의 의진(義陣)에 합류하였다. 한호성(韓好誠)‧양응록(梁應祿)‧고정철(高貞哲)‧오종(吳琮)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경상도 의성에서도 많은 수의 의병이 창의하였다. 그 앞자리에 신적도(申適道)와 그의 두 동생인 달도(達道)와 열도(悅道)가 함께 하였다. 이들은 정묘호란 때도 큰 공을 세웠는데,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척화의 편에 서서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의 군대에 용감하게 대항하였다. 신적도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김엽(金燁)‧욱(煜)‧찬(燦) 3형제는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함께 순직하였다. 이들과 함께 쌍령전투에 출전하였던 손창서(孫昌緖)‧김결(金潔)‧김경발(金慶發)‧이시백(李時白)‧이사운(李思雲)‧이심근(李深根)‧김옥(金鈺)도 의성사람이다. 김득민(金得民)‧호영(鎬榮) 부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부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함께 남한산성으로 나아가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펼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또, 이 때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던 이민성(李民宬)도 경상좌도(慶尙左道) 호소사(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으며, 동생 민환(民寏)도 함께 하였다.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전라도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순(李興淳)과 그의 동생 기순(起淳)도 의병을 모집하여 여산(廬山)에 집결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는데, 이들이 청주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되돌아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우리 민중들은 참으로 놀라웠다. 국가가 외침을 당하여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들이 스스로 일어나 자기희생을 감내하면서 적국의 군대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의병’(義兵)이라고 부른다. 그 출발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경상도 의령의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가 조국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병자호란 때에도 전국 각지에서 민중들이 분연히 일어나 조국의 수호에 앞장섰다. 의병, 참으로 장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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